〈 257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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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무심한 말에 성녀는 더욱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아 출신인 만큼, 약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진짜인 그녀였다.
고작 그 정도로 납득하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당신, 이럴 줄 알았던 건가요?! 그랬으면 그 암흑사제를 살려서 또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는 길도 있었는데!”
“미트람을 살려?”
픽, 하고 사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래도 술이 들어가니 그나마 감정의 표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봤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웃기는 소리… 그 교활한 녀석이 본체를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드문 줄 알아? 그대로 살려줬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활동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녀석이 꾸미는 흉계에 다치고 죽는 이들이 못해도 수백은 넘을 테고.”
“그, 그렇지만…….”
당신의 영지잖아요, 라고 성녀는 말하고 싶었으나 사내의 낯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에 ‘그렇지만’ 따위는 없어. 일일이 따지면 사정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언제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려야 하는 거야… 예외를 두면 안 돼. 나도, 그 누구도.”
먼저 할 말이 궁해진 쪽은 성녀였다.
최소한 수백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함부로 논해 봐야 그 무수한 삶을 책임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껏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잃었던 성녀였기에, 그 무게를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반론에 나선 것은 엘시였다.
그녀는 이전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다만 여전히 확고한 적의를 담아서 물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사내는 엘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그는 또 다시 위스키 병을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그 많던 술이 벌써 반절이나 사라져 있었다.
엘시는 노골적인 무시에 더욱 울컥해서 외쳤다.
“어차피 너는 주인님이 아니잖아! 네가 뭔데 주인님의 영지를 두고 버리라 마라야?! 우리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얼마나 강한데,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그러나 그 달아오른 목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틀어막히고 말았다.
단지 사내는 엘시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동자였다.
만일 심장을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눈앞의 사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사내의 결정에 사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메마른 낯빛 사이로 얼핏 스치는 사내의 기억이 보일 것만 같아, 엘시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구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럴 수 없을 뿐이지.
아마도 그 또한 몇 번이고 시도해 봤을 터였다.
먼 미래에서.
그러다 너무 많이 넘어지고 다쳐서, 이제는 그러지 않을 따름이었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나? 가주님이나 아서, 레이놀드 경은 내가 알아서 설득할 테니, 다들 짐이나 빨리 챙겨. 대규모 작전이라 더 이상의 여유는 없어.”
그렇게 말을 정리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덜컥 물어왔다.
“……그렇게 버리면?”
셀린이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그녀는, 이것이 질문인지 도발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렇게 버려서, 오빠는 뭘 지켜왔는데?”
탁자 위의 위스키를 챙기던 사내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가 유심히 셀린을 향했다.
그럼에도 셀린은 여인들과 달리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울컥해서 점점 더 달구어진 음성을 토해냈다.
“가족? 친구? 아니면 연인? 영지까지 버려 가면서 도대체 뭘……!”
“세상.”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순간이었다.
셀린의 눈동자가 멍하니 사내를 향했다.
독주를 반병이나 비운 사내였다.
이제 동공이 풀릴 만도 한데도, 사내의 눈빛은 아직 형형하기만 했다.
마치 잿더미 속에 남은 잔불처럼.
“……그 외에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가족, 친구, 연인.
그 모든 것을.
사내는 마지막으로 위스키를 들이키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슬픈 뒷모습이었다.
괴로운 정적 속에서, 오직 성녀만이 한숨 섞인 기도를 토해냈다.
“임마누엘…….”
수백 명의 목숨을 버린다.
그것이 이 자리의 결론이었다.
**
응접실을 나선 이후, 사내가 보여준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직후 제국의 행정관 아서를 찾아갔다.
여인들에게 그랬듯 사내는 사정을 설명했지만, 아서는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아무리 암흑사제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한들, 이를 곧이곧대로 신용하기는 힘들었다.
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불가합니다. 이는 황제 폐하께서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사안이에요. 암흑사제의 말만 믿고 대규모 퇴각 작전을 펼치기에는…….”
사내가 손가락을 내리그은 것은 그때였다.
마치 핏물이 흘러내리듯 허공에 기묘한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행정관이라면 그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서의 눈동자가 툭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졌다.
사내는 그 극적인 반응에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책임지고 퇴각 작전을 실시해. 레이놀드 경에게서는 황명이라고 전하도록.”
“……네, 넵!”
아서는 평민 출신에 뒷배조차 없는 행정관에 불과했다.
사내의 명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설령 뒷배가 있었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지시였다.
용혈 문자는 황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용혈 문자의 소유자가 내리는 명령은 황제의 명과 동일했다.
뜬금없이 황제가 직접 찾아와 지시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아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내의 뜻을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이 빠져 있던 아서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으려 했다.
사내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까짓 허례허식까지 지킬 시간이 있나? 그럼 당장 일부터 시작해.”
“아, 알겠습니다!”
아서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착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용혈 문자를 보인 이후,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페르쿠스 자작을 설득하는 일도 간단했다.
제국의 행정관 아서의 권위를 빌려, 황명이라고 말을 전하면 끝이었다.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귀족은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페르쿠스 자작은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한숨과 함께 가솔들에게 지시를 하달해야만 했다.
영지 전역에 대피령을 발령하라고.
물론 사내의 폭풍과도 같은 행보는 그 즈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덧 뒤뜰로 걸음을 옮긴 그는 무심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리스.”
“네, 이안님.”
당연하다는 듯 사내의 등 뒤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를 지닌 미인, 제국 첩보부의 네리스였다.
그녀는 정보를 수집하면서 페르쿠스 저택의 뒤뜰에 은신해 있던 차였다.
“연락망을 통해 검공께 말씀을 올려라. 아무래도 페르쿠스 영지로 오셔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백익 기사단의 차출을 요청해.”
“……네, 네?”
더는 의문을 품지 않기로 한 네리스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얼빠진 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검공이라면 황족이자 제국 유일의 마스터가 아니던가.
감히 누군가 오라 가라 할 위치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는 상대가 용혈 문자의 소유자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조차 그 권위를 인정해 한 수 접어주는 황실의 큰 어른이 바로 검공이었다.
심지어 백익 기사단이라니, 제국 중앙군의 정예 기사단 중 하나를 차출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네리스는 곧 부복하며 사내의 명을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사내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에손도끼가띄었던 탓이었다.
이를 목격한 그녀는 곧바로 이안의 충직한 부하로 되돌아왔다.
“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뒤늦은 수습에도 사내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가 고민하듯 허리춤에 매달린 손도끼를 톡톡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네리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뚝뚝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사내는 굳이 손도끼를 들지는 않았다.
다만 싸늘한 음색으로 경고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잊지 마. 제국의 까마귀는 까막눈이어야 한다.”
상대의 신분도, 수집한 정보도 모른 체 하라는 뜻이었다.
더불어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처럼 얌전히 상부의 지시를 따르라는 의미도 있었다.
명심하겠다는 듯, 네리스는 한 번 머리를 땅에 찧더니 황급히 떠나갔다.
제국 첩보부의 연락망을 가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사내의 손에는 늘 위스키 병이 들려있었다.
처음에 마시던 병은 다 비운 지 오래였다.
이제 두 번째 병마저 반 이상 비워진 뒤였다. 사내의 얼굴에도 얼근한 취기가 감돌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내는 비척비척 걸어 저택에 준비된 제 방을 향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이제 누워 잠을 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사내를 뒤쫓아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레토였다.
그는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그 어깨를 붙잡았다.
사내의 시선이 자연스레 등 뒤를 향했고,레토는 그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물었다.
“……너는 안 되냐?”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레토는 재차 물어야만 했다.
“네 힘이면, 그 악신의 권속인지 뭔지 이길 수 없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로 달구어진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못해, 지금 불려온 것도 예외적인 상황이야. 그래서 한동안 곤란해질 예정이고… 내가 직접 미래를 뒤틀 수 있는 정도는 정해져 있어.”
그래서 단편적인 정보밖에 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사내는 덧붙였다.
지금이야 이미 알려진 단서들이 있어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제공하는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소진되는 힘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만으로도 레토가 사내를 붙잡은 성과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레토는 아직 궁금한 점이 더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사내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캐물었다.
“그럼 네 기억을 이안에게 제공하는 건? 이안의 말을 듣자하니, 정체불명의 꿈을 꾼다던데… 그거 네 기억 아니야? 그 이후에는 네가 쓰던 기술도 익히는 것 같고.”
사내는 그 추론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동화율이 너무 높아져 있어.”
“뭐?”
“동화율 말이야… 그 애송이가 내 기억을 너무 훔쳐봤다고. 그래서 원래 내가 원하는 시점에만 나타나야 하는데, 의식만 잃으면 내가 불려 나오는 거야.”
그는 후우, 하고 날숨을 내뱉으며 문 옆의 벽면에 등을 기댔다.
남은 술을 처리하려는 듯, 사내는 위스키 병을 기울여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럴수록 내 강렬한 감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정신력이 나만큼 강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러니까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이상해지는 거야.”
“……동화율이 이보다 더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데?”
“나도 몰라.”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나라고 과거로 돌아오는 게 두 번째인 줄 알아? 역대 최초라고… 그러니까 모르지, 나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야.”
혹시라도 애송이가 망가지면 모두 끝장이니까.
그 흐릿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남은 술을 혀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입가를 쓱 닦아내며 비틀비틀 방문을 열었다.
슬슬 대화를 끝마치자는 신호였다.
레토는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레토는 작별인사 대신 단 한 음절의 의문을 내뱉었다.
“……왜?”
사내의 황금빛 눈동자가 흘깃 레토를 향했다.
몸짓은 이미 취객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눈빛만큼은 너무나 강렬했다.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 세상을 구해봐야, 너한테는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까지 애를 쓰는 이유가 뭐냐고.”
입을 다문 채, 사내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사내는 픽,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모르겠어.”
그것이 그날 사내가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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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안 페르쿠스가 돌아왔다.
“……뭐야 이거.”
그를 대하는 태도가 일변한 주변인들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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