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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58화 (258/649)

〈 258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1)

* * *

나른한 꿈이다.

빛의 포말이 파도처럼 시야를 휩쓸고 지나간다. 순백으로 물든 세계를 다시 채록하는 것은 낯선 사내의 기억이었다.

아니, 낯선 사내인가.

어느덧 눈을 뜨면 나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열대의 습기가 느껴진다.

은은한 적색으로 물든 흙에서는 독특한 향취가 풍겼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땀방울이 이마에서 떨어져 내렸다.

대수림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유독 그 한 마디가 귓전에 틀어박혔다.

“……결(?)과 해(?).”

탁, 하고 손도끼가 깔끔하게 장작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벌써 몇 년 동안 조막만한 스승에게 시달려 온 참이었다.

어느덧 나는 능숙한 자세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이래서야 누가 나를 대마녀의 제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오히려 나무꾼이라 해야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이러한 제자의 속내도 모르고, 스승은 옆에서 조잘거리고만 있었다.

“그 이치를 깨달아야만 한다.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결, 혹은 해로 나뉘지… 흐름 속에서 너를 세우고 남을 풀어헤칠 수만 있다면, 네 검이 가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서 후, 하고 스승은 물고 있던 곰방대를 불었다.

매캐한 약 냄새가 퍼져 나갔다.

대수림에서만 자라는 약초의 향이었다. 이처럼 스승은 늘 말린 약초를 곰방대에 넣고 피우곤 했다.

대개는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였다.

그마저도 없으면 스승은 일상생활 중에서도 신음을 흘릴 만큼 괴로워해야 했다.

흡혈귀를 가두는 결계는 수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무려 수백 년을 살아온 악마였다.

악신 오메로스와 계약하여 힘을 얻은 마인들은 하나같이 강자들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존재인 흡혈귀의 강력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짓 한 번으로 나무들이 무더기로 잘려나가고, 발짓 한 번으로 천 리를 도약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괴물.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이가 얌전히 결계 안에 갇혀 있을 리가 없었다.

매일 같이 결계를 부수려 몸부림을 쳤고, 그럴 때마다 결계의 핵을 이루고 있는 대마녀의 육신은 고통 받아야 했다.

대마녀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도 그래서였다.

생체 활동에 필요한 마력마저 아끼기 위해 어린 시절의 육체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흡혈귀를 가둬둘 수 있었으니까.

결국 대마녀가 쓸 수 있는 힘은 본신의 파편 정도밖에 남아있지 못했다.

그 자그마한 힘만으로도 대륙을 쥐락펴락 할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익스퍼트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나라든가.

어쩌면 내가 아직 오러 특성도 개화시키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한 탓일지도 몰랐다.

내 입에서 곧 심란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이고 나발이고, 지금 오러의 힘도 제대로 개화시키지 못한 놈이 뭘 하겠습니까. 일단 오러 특성부터 일깨워야…….”

“쯧쯧.”

스승은 무어가 그리 못 마땅한지 혀를 쯧쯧 찼다.

허리춤에 척, 하고 두 손을 얹은 폼이 나를 혼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조막만한 소녀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못난 놈, 그렇게 초조하더냐? 오러란 심상의 구현! 누누이 네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고 말했거늘…….”

나는 스승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마스터에 도달한 스승이 아닌가.

고작 오러를 개화시키겠다고 끙끙대는 내가 한심해 보일 만도 했다.

넓게 생각하고 멀리 보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정작 그 보일 듯 말 듯한 경계선에 걸친 사람의 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목이 타는데, 샘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길을 찾지 못하는 심정이었다.

특히 옆에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문득 소녀 하나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래도 사매는 벌써 대마법사고.”

“그래, 말 잘했다. 요즘 둘이서 꽁냥거리느라 이 스승을 찬밥 취급하지 않았더냐! 그래도 신경 쓰이는 여자 앞에서는 잘나 보이고 싶은 모양이지? 후, 이래서 사내놈들이란…….”

턱, 하고 실로 오랜만에 손도끼가 장작을 패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일순 숨을 들이킨 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정곡을 찔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흥, 뭘 그렇게 보느냐? 너희와 함께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설마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으려고.”

“아니, 아니, 아니! 오해라니까요. 사매랑은 그런 사이 아니라고 몇 번을…….”

물론 스승은 내 변명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질렀을 따름이었다.

“둘째야! 첫째가 그리도 네가 좋다는구나!”

그러면서 스승은 베에, 하고 혀를 내밀고 종종걸음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이어질 전개를 직감한 내 손이 이마를 짚었다.

내가 또 다시 한숨을 푹 내쉴 무렵, 예상대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매가 눈에 띄었다.

신이 나서 총총거리며 달려온 사매는 키득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우리 후배님, 그렇게 이 선배가 신경 쓰였어?”

“……오해입니다.”

단호한 어조였으나 사매는 조금도 믿어주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쿡쿡, 하고 검지로 내 옆구리를 찌르며 나를 도발해 오기까지 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조금 짜증이 나는 모양새였다.

“에이, 모른 척 하지 말고… 야, 그래도 고백은 남자 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알지?”

“아, 진짜 놀리지 마세요. 그리고 언제적 이야기입니까, 요즘은 남녀평등 시대인데.”

“흐응, 그건 그렇지.”

히죽, 하고 사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까치발을 들었다.

내 팔을 붙잡고 밀착하느라 보드라운 감촉이 팔뚝에 닿았다. 여체 특유의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내 달큰한 속삭임이 내 귓가를 훅 달구었다.

“……그럼, ‘이안 라이넬라’는 어때? ‘엘시 페르쿠스’보다는 낫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안 라이넬라’랑 ‘엘시 페르쿠스’라.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내가 갈등하는 사이, 사매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우리 아이들도 생각해야지… 라이넬라가 어느 이름에든 꽤 잘 맞아. 우리 형제들 중에도 특이한 이름이 좀 있거든.”

정 그렇다면 ‘라이넬라’로 할까, 라고 무심코 생각했을 찰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사매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매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악! 왜, 왜 때리고 지랄인데!”

내게 일격을 허용한 사매는 분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주의를 주었을 뿐이었다.

“다 큰 처녀가 겁 없이 남자한테 달라붙는 거 아니다, 사매.”

내 말에 사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애꿎은 땅만 툭툭 차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씨,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줄 아나… 그, 그리고 사매 아니라고!”

늘 그렇듯 ‘사매’라는 호칭에 울컥하는 그녀였다.

나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을 영위하던 어느 날, 나는 스승에게 부탁을 받았다.

“첫째야, 네가 둘째랑 같이 도시로 가봐야겠다.”

제국의 황제가 대수림에 방문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

덜컥, 하고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며 거친 숨을 들이켰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또 다시 꿈이었다.

흐릿하기만 하던 낯선 기억들은 이제 구체적인 풍광을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도 처음이었다.

‘엘시’라, ‘라이넬라’라는 성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엘시 선배가 틀림없었다.

설마 미래에서 온 ‘나’도 그녀와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

참 세상 일은 알 수 없었다.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숙취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수통에 담긴 냉수를 들이키니 조금 기분이 나았다.

무언가 달라진 점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책상 위에 놓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뒷면에 휘갈겨 써진 글자가 추가되던 예의 그 편지였다.

그곳에는 역시나 새로운 문장이 하나 더 쓰여 있었다.

‘다음은 없다. 불가능.’

아무래도 내 뜻대로 그를 불러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어차피 늘 잠깐씩만 내 몸을 빌리고 사라지던 인간이었다.

모종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돌파했으니 나름 잘 써먹은 편이었다.

그동안 미래의 인격이 빙의할 때나, 그의 기억을 훔쳐볼 때마다 술이나 약물로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착안한 편법이었다.

솔직히 말해 확신은 없었다.

지난번 뒷골목의 ‘사기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때 한 번 실험해 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날도 술에 진탕 취해 잠드니 편지에 낯선 글귀가 추가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내 가설을 증명할 수는 없었으니, 사실 도박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엠마에게 강력한 마취독을 부탁했던 것도 즉흥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 쓰더라도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나 쓸 심산이었다.

그 상황이 의외로 일찍 찾아왔을 뿐이지.

내가 눈을 뜬 곳이 침대 위인 점으로 보아, 다행히도 내 예상은 맞아떨어진 듯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나는 방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아직 술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한시가 급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두어야 했다.

단 하루만에 저택의 분위기는 일변해 있었다.

본래 여유롭고 한적하기만 하던 저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용인들에게서 까닭 모를 불안과 조급증이 느껴졌다.

의아하긴 했으나 이 또한 설명을 들으면 해결될 의문이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내 눈에 처음으로 눈에 띈 사람은 성녀였다.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난반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이라면 으레 로비에 두곤 하는 천신상 앞에서 기도 중이었다. 그 표정이 애처롭고도 구슬펐다.

사내라면 누구든 그 사연을 궁금해 할 만한 모습이었다.

기도 중인 성녀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성녀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가슴을 간질이는 색감의 연분홍빛 눈동자였다.

여인은 내 인기척을 눈치 챈 것인지, 슬쩍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유심히 내 낯을 뜯어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듯했다.

결국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슬쩍 손을 들어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이안.”

성녀는 탄성처럼 내 이름을 작게 부르짖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간 많은 염려를 끼친 모양이었다.

까탈스러운 성녀가 이토록 상냥하게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꾸욱, 하고 내 얼굴이 무언가에 파묻혔다.

푹신하고 탄력 있는 감촉, 언젠가 느낀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여인의 달콤한 살내음이 뇌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일순 사고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불쌍한 이안…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절대 숨기지 말아요. 알겠죠?”

성녀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던진 위로였다.

다름 아닌 그 성녀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뭐야 이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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