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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59화 (259/649)

〈 25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2)

* * *

성녀의 따스한 위로는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모를 성녀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나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로서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늘 틱틱대고 나를 골려먹기나 하던 성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나를 꼭 끌어안고 진심을 담은 위로를 하다니,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을 정도였다.

처음에 나를 유심히 살펴본 것으로 보아, 미래의 ‘나’를 본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면 성녀의 태도 변화 또한 ‘나’에게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내 사고회로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이에도 성녀의 달래기는 계속되었다.

이제는 약간의 울음기마저 섞여 있을 정도였다.

성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만은, 당신만큼은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을게요… 힘들고 아플 때마다 곁에 있어줄 테니까, 반드시 제게 상담하세요.”

“그, 그렇군요.”

내뱉은 목소리는 성녀의 보드라운 골짜기에 막혀 웅얼거림이 되고 말았다.

슬슬 사정을 캐묻고 싶은데, 성녀가 나를 풀어주지를 않았다.

사실 내가 조금만 힘을 쓰면 성녀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을 터였다.

유술을 익힌 덕에 성녀의 완력이 강한 편이긴 했다. 그럼에도 평생을 검만 수련한 나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성녀를 밀쳐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분이 좋았으니까.

성녀의 품은 아늑하고 푹신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였다.

남자는 아무리 자라도 어린애라고 하던가.

그 말처럼 나는 성녀의 모성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성을 상징하는 어떤 신체부위였지만.

그래도 잠자코 이야기를 듣자하니 성녀가 이러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성녀의 말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끊임없이 등정하고 있었다.

‘혼자’라든가, ‘아픔’이라든가, ‘곁에 있어주겠다’든가.

아무래도 성녀는 미래의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본래의 내 미래가 그러한 꼴이라니 슬프고 무서웠겠지.

나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훔쳐보았던 단편적인 기억만 종합해 보더라도 그가 어떤 상태일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었다.

그에게 남은 사명이라고는 ‘세상을 구하라’라는, 공허한 한 마디뿐.

그는 마지막에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미래라서, 나는 푸하,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슬퍼하는 성녀의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성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안 페르쿠스 아닙니까.”

“……그 사람도 본인이 ‘이안 페르쿠스’라 주장하던데요.”

아차, 그랬지.

다시 성녀의 눈동자에 연민이 어릴 무렵, 나는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다르죠, 그 사람 옆에는 성녀님이 없었을 테니까.”

사실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 점을 언급할 만큼 내가 눈치 없지는 않았다.

성녀는 여전히 슬픈 낯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안심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제가 걸어갈 길도 분명 다를 겁니다. 성녀님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들이 제 옆에 많잖아요… 굳이 괴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안, 그… 조금 힘들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성녀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누가 봐도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성녀가 왜 이러나 싶어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성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내게 말했다.

“……페르쿠스 영지를 버리기로 했어요.”

성녀를 설득하던 내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한동안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버리다니? 페르쿠스 영지를?

도대체 왜.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지만, 내가 가까스로 짜낸 언어는 단 한 마디뿐이었다.

“절대 안 됩니다.”

직후, 나는 닥치는 대로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제국의 행정관 아서였다.

그는 성녀 이상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펄쩍 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쩔쩔 매며 무릎을 꿇으려다 화들짝 놀라 그만두기도 했다.

내가 얼이 빠져서 그를 바라보니, 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를 건넸다.

“기, 기침하셨습니까? 말씀하신 지시는 순차적으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페르쿠스 자작께서 협조적으로 나와 주신 덕에…….”

“지시라니요?”

내 반문에 이제는 아서가 넋을 놓을 차례였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를 일종의 시험이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미래의 내가 내린 지시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대규모 퇴각 작전입니다. 악신의 권속이 소환되면 현 전력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하니, 사흘 이내에 페르쿠스 영지를 비우기로…….”

“……사흘? 사흘 안에 어떻게 영지민들이 전부 떠나요.”

아서는 내 물음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가 송구하다는 듯 괴로운 현실을 읊었다.

“그래서 최소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일전에 이안 님께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이런 씨발.

나는 차마 아서의 앞에서 욕을 내뱉지는 못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며 회의실을 떠나가야 했다.

그 이후에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말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도리어 여인들은 그 괴상한 작전 내용보다 나를 더 걱정하기까지 했다.

“이안 선배, 괜찮으세요? 어떡해… 그, 그래도 힘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씀해 주셔야 해요. 꼭이요!”

이는 세리아가 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 당장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다고 하려다 억지로 참아냈다.

어떻게 귀족이 영지를, 하물며 영지민까지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셀린은 창백해진 내 낯빛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안 오빠…….”

그녀는 힘없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가 없대.”

수가 없다니?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이 일천이고,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까지 와 있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고, 엘시 선배와 레이놀드 씨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레토였다.

내가 응접실에 헐떡이며 들어서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왔냐?”

“야, 레토. 너도 그거냐?”

무엇을, 이라고 레토는 굳이 반문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보자마자 내 속내 따위는 단숨에 헤아렸다는 태도였다.

그는 한숨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더라… 그 괴물을 당장 상대할 전력이 없는데, 맞상대를 하는 건 미친 짓이야.”

“최소한 영지민들이 대피할 시간은 벌어줘야 하는 거잖아! 지금껏 저택에 앉아 세금이나 받고 있던 이유가 뭔데?! 이럴 때 희생해야 하니까…….”

“이안, 암흑교단은 아직 세가 건재해.”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레토도 슬프고 안타까울 터였다.

그도 나와 함께 이곳에서 수많은 추억을 쌓으며 자라왔으니까.

그렇게 괴로운 눈빛을 하면서도, 레토는 하나하나 까닭을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했다.

“당장 퇴각 중에 어떤 습격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전력 중 대부분은 페르쿠스 가문의 것이 아니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하지만…….”

“무작정 전력을 투사한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그러면서 레토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 쪽으로 탁, 하고 던졌다.

빼곡한 메모가 들어찬 종이였다.

나는 멍하니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최상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체 거인.’

“어제 미래에서 온 네게서 얻어낸 정보야. 자세한 이야기를 할수록 이 시간대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대서, 대략적으로만 정리했지… 그런데도 저 꼴이야.”

내 눈이 서류에 적힌 메모를 주르륵 훑어 내려갔다.

‘무한한 재생.’

‘주위의 시체를 부활시켜 아군으로 삼음.’

‘군단으로는 상대 불가, 소수의 정예 토벌대를 구성해야 됨.’

‘재생을 막기 위한 수단이 필요함.’

말도 안 되는 적이었다.

악신의 권속이란 이리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단 말인가.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대응했다간 도리어 피해만 더 커질 거야. 시체가 늘어나니까.”

사형 선고였다.

그것도 내가 제일 신용하는 책사로부터 내려진 사형 선고.

“미안하다, 이안…….”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과 지독한 무력감.

나는 못난 인간이었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 수백 명의 앞에서는 그럴 터였다.

**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위스키를 한 병 꺼냈다.

듣기로는 전날의 ‘나’도 과음을 한 모양이었지만, 가족이나 일행 중 나를 말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나 내 마음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술에 만취하면 또 미래에서 온 인격이 빙의할지도 모른다.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사내가 친히 ‘불가능’이라고까지 덧붙이지 않았던가.

따라서 내가 술에 취해 잠들더라도 미래의 인격이 다시 불려 나올 확률은 높지 않았다.

또, 설령 그가 불려 나온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긴 했다.

영지를 버리겠다고 결정한 당사자는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오늘따라 두통이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내 침실의 문을 열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만일 내 방에 의외의 선객이 없었다면, 나는 그 계획을 충실히 이행했으리라.

그러나 방문을 열자마자 나는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금빛의 이슬을 머금은 소녀였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리아 페르쿠스, 내 여동생이었으니까.

다만 내가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리아가 내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는 일쯤이야, 이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내가 놀랐던 점은 지금 리아가 취하고 있는 자세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울먹이면서, 소녀는 말했다.

“제, 제발 리아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자존심을 내다 버리면서까지 여동생이 내게 건네고자 했던 부탁이란, 고작 그뿐이었다.

나는 리아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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