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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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솔직히 말해 골치가 아프긴 했다.
그러지 않아도 영지를 버리라는 이야기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리아까지 울먹이고 있으니,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돼서 여동생을 달래주지 않을 수도 없고 말이다.
물론 그 외에도 신경 쓰이는 점이 있기는 했다.
지금까지는 하도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암흑사제 미트람은 리아와 똑 닮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복제품’이라고 했던 몸이었다.
당연히 리아의 본신은 아닐 테지만, 내심 의문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트람은 인체를 복제하기 위해 오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종일 페르쿠스 저택에 머무는 리아를 암흑사제가 연구하기는 불가능했다.
물론 일방적인 진술에 불과한 말이었다. 전적으로 신용할 만한 이야기는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인지 희미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지 않았던가.
페르쿠스 가문에는 비밀이 있다고.
다만 당장 고민해 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만일 가문에 비밀이 존재한다면 내게 밝히지 않은 까닭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게 밝히지 않았다면, 리아에게도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리아에게 캐물어 봐야 혼란만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리아를 달래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리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를 미워해.”
“하,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보아하니 미래에서 온 인격이 또 무언가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애교를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내게서 조금쯤 거리를 두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아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평생 얼마 들어본 적도 없는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수상했다.
내 추론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쓰지 않던 경어는 왜 쓰고 있고.”
“그, 그것도 오라버니께서…….”
“안 그래도 돼.”
리아는 움찔, 하고 몸을 떨면서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아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조금 거리가 있지만 머리를 쓰다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턱, 하고 내 손이 리아의 정수리를 덮었다.
“넌 내 여동생이잖아.”
“오, 오빠아…….”
리아의 황금빛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 진심을 알아준 듯했다.
이처럼 오빠를 사랑하는 귀여운 여동생을 내치다니, 미래에서 온 ‘나’는 쓰레기가 분명했다.
내가 리아의 머리를 살그머니 쓰다듬자 리아는 울먹이며 나와 거리를 좁혔다.
폭, 하고 소녀의 몸이 내 품에 안겼다.
향기로운 체향이 문득 코끝을 스쳤다.
여체 특유의 향이었다. 이러고 보면 리아도 여자는 여자다 싶었다.
어느덧 몸의 굴곡도 완숙해진 것도 같고.
무언가 여동생에게 절대 품어서는 안 될 감상을 가슴 한켠에 간직하며, 나는 리아를 달랬다.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리아…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널 매몰차게 대한 적 있어?"
"어, 없었는데… 어, 어제 오빠가… 흐어엉……."
아직 전날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리아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럴 만도 했다.
평생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지내오던 사이였다.
부모님과 형이 바쁠 때 리아를 돌봐주고 놀아주었던 유일한 가족이 바로 나였다.
때때로 화를 내기도 했지만 리아를 냉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만큼은 리아의 아군이자 버팀목이어야 했으니까.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싸늘하게 리아를 대한 셈이었다.
리아가 자존심이든 뭐든 내던지며 매달리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는 꼴이, 혹여 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면 리아는 다시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내게 집착해 오던 그녀였다.
그동안은 다소의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오냐오냐 받아 주리라 생각해 왔을 터였다. 그런데 정작 진짜로 미움 받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난 모양이었다.
이를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우선 점점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리아에게 제동을 걸 수 있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긴 했다.
만일 나였다면 결코 리아에게 그토록 차가운 반응을 보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리아에게 괜히 불안감을 심어주었나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리아가 내게 더욱 집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만 지금으로서는 펑펑 우는 리아를 달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힘주어 리아에게 맹세했다.
“걱정하지 마, 리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버릴 일은 없어.”
한 톨의 가식조차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영지를 버리라는 말조차 견디지 못해 술을 찾는 나였다.
리아를 버리라는 소리마저 들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내 단단한 약조에 리아가 돌려준 것은, 꽤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기사니까?”
아직 정식으로 서임을 받지 않은 터라, 나는 기사가 아니었다.
물론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의례적으로 ‘경’이라는 존칭을 쓰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예우였다.
굳이 리아가 내게 ‘기사’라는 낱말을 꺼낼 까닭은 없었다.
만일 있다면 오직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리라.
내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언제적 이야기야?”
“몇 년 안 됐어,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풀이 죽은 리아의 목소리에서 불퉁한 심경이 전해졌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정진하던 시절, 나는 당연히 기사가 될 줄 알았다.
당시의 나는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특출난 배경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설치는 것뿐.
그런데 마침 난데없이 여동생이라는 꼬마 계집애가 나타났으니, 그 환심을 사보겠다고 기사를 자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린 시절의 짧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고 보니 그 시절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리아는 물론이고, 네드 또한 아직도 나를 ‘스승님, 스승님’ 하며 따르고 있지 않은가.
네드는 기사를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나와 같았으니까.
잠시 과거를 유영하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동생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덕이었다.
아직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리아는 말했다.
“나, 나한테는 엄청 소중한 기억이라고… 그때 오빠는 날 공주님처럼 대우했는데.”
“그렇게 공주 시절이 그리웠어? 지금이라도 공주님이라고 불러줄까?”
내가 놀리듯 말하자 리아는 째릿,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슬슬 예전의 성질머리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려 했다.
“아, 진짜 놀리지 말……!”
그러다 깜짝 놀라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하며 멈추었지만 말이다.
다시 내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리아는 결국 말끝을 흐렸다.
“말, 말… 말아주세요. 오라버니…….”
유순해진 여동생의 모습도 꽤 귀여웠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리아를 뇌리에 잘 기록해 두기로 했다.
나는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리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리아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내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공주든 아니든 넌 내 여동생이니까, 걱정하지 마.”
“치, 누구는 공주를 하고 싶은 줄 아나…….”
리아는 입술을 삐쭉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오빠가 기사니까 하고 싶은 거지.”
“그럼 진로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 나도 나중에 내가 뭐가 될지 모르겠거든.”
그러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리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암흑사제 따위가 아닌 진짜 내 여동생이었다.
그 안정감은 차원이 달랐다.
나를 칼로 찌르고 광소를 터트리던 미트람의 모습은 솔직히 소름이 돋았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봐야 심란한 마음은 그대로라 술을 한 잔 걸쳐야 할 듯 싶었지만.
슬슬 리아도 진정한 듯했으니, 나는 축객령을 내리려 했다.
리아의 이어지는 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그래도 고마워, 그때 오빠가 아니었으면 못 견뎠을 거야.”
우선 내 품에 안긴 리아를 떼어내려던 나는, 그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 말에 실린 감정의 밀도가 달랐다.
리아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눈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리아를 달랬다.
“무슨 소리야? 너는 우리 가족인데… 꼭 내가 아니었어도, 형이나 부모님께서 잘 돌봐 주셨을 거야.”
“으응, 아니야.”
그러나 이어지는 리아의 부정에는 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녀를 돌봐주지 않았으리라는 그 알 수 없는 믿음.
내 의아한 눈빛이 슬쩍 리아를 향했다.
그녀는 조금 쓸쓸한 낯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늘 그랬다.
리아는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름대로 친근한 사이이긴 했지만, 꼬박꼬박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는 관계였다. 리아가 반말을 쓰는 상대는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이를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병을 치료하느라 타지에서 살다 열 살 무렵에나 저택에 돌아온 리아였다.
모든 사람들이 낯설어 보였을 테고, 그중에서 그녀를 전담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 유독 내게만 살갑게 굴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단지 리아를 돌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 내가 리아를 도맡게 된 것이라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인가.
일순 미트람의 진득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드는 착각이 일었다.
‘운명’.
“오빠, 사실 말이야…….”
이슬에 젖은 꽃잎처럼 촉촉한 속삭임이었다.
나는 그 달콤한 향기에 정신이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나, 저택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어.”
고작해야 나는, 말없이 리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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