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4)
* * *
“운명이 그렇다.”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 무기질적인 음성에 소녀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고깔모자를 꾹 눌러쓰는 그 손길이 애처로웠다.
푸른 눈동자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얼핏 불꽃처럼 튀었다.
“운명이란 거스를 수 없지… 나 또한 한때는 자유를 찾아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문이 싫어서 살아가던 몇 년이었지.”
“……이미 들었어요.”
불퉁한 목소리였으나 중년의 사내는 소녀를 나무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어린 시절부터 소녀를 지켜봐 왔던 그였다.
소녀의 버릇없음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그는 소녀의 삼촌이었으니까.
그의 이름은 레이놀드 라이넬라.
마주앉은 엘시 라이넬라의 삼촌이자, 라이넬라 가문이 자랑하는 대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진작 깨달았어야지.”
레이놀드의 말에는 고저가 없었다.
애초에 소리 높여 누군가를 나무라는 법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 평탄하고도 차가운 음성으로 조곤조곤 따지고 들었을 뿐.
그래서 엘시는 유독 레이놀드를 무서워했다.
그는 대마법사에 이른 강력한 마법사였을 뿐만 아니라, 연이은 사건사고에도 지치지 않고 그녀를 나무라는 몇 안 되는 가족이었다.
엘시가 그를 꺼려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본성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시는 저보다 강한 사람이 두렵고 싫었다.
언제든 돌변해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힐 것만 같아 무서웠다.
사실 그녀의 내재된 폭력성은 늘 그러한 공포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가해졌던 폭력이 너무나 두려워서, 도리어 스스로가 공포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레이놀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는 엘시를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고, 또 이안처럼 엘시에게 상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엘시는 레이놀드가 싫었다.
‘미친 꼰대 새끼’, 엘시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렇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용기까지는 없었기에 그저 속으로만 그럴 따름이었다.
“가문이 뜻을 굽혀야 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내가 페르쿠스 영지로 온 것도 너를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냐… 그런데 귀중한 전력인 마도병단을 이끌고 남의 영지를 지켜?”
“하,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엘시를 보고, 레이놀드는 드물게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시.”
그 한심하다는 눈빛에 엘시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그녀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졌다.
“너는 라이넬라다, 페르쿠스가 아니라.”
한때는 그토록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호칭이었다.
‘라이넬라’는 엘시의 정체성이나 다름없었다.
그 투견장에서 살아남아, 가장 우수한 투견이 되어 가문의 이름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왔던 그녀였다.
엘시가 라이넬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엘시도 내심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라이넬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라이넬라가 지닌 힘을 빌리고 싶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이처럼 나약한 겁쟁이라, 엘시는 언제나 스스로를 의탁해 왔다.
하루는 가문에게, 또 하루는 이안에게.
그렇다면 이제 엘시는 어디를 선택해야 하는가.
마음 같아서는 연모해 마지않는 이안을 고르고 싶었다.
가문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엘시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안의 도움이 되고 싶었고, 그럴 수만 있다면 가문의 힘도 얼마든지 동원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엘시, 명심하거라…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는 것을.”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만일 그 언어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엘시는 진작 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겼을 터였다. 그만큼이나 엘시는 라이넬라의 가훈이 지긋지긋했다.
“너도 라이넬라라면, 라이넬라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페르쿠스 영지를 버린다는 선택을 지지하라는 뜻이었다.
이안이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는 영지를 말이다.
엘시는 울컥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엘시는 레이놀드의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싸늘하고 차가운 눈동자였다.
자그마한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동공에서는 단호한 결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강자의 눈이었다.
엘시는 이내 고개를 수그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네.”
물론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팍팍 묻어나오는 음색이었다.
그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할 레이놀드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엘시를 쳐다보더니, 슬쩍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안 공자는 네 짝으로 괜찮겠더구나.”
“네, 알겠… 네, 넷?!”
풀이 죽어 고개만 주억거리던 엘시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또 지루한 일장연설이 이어지겠거니 싶어 반쯤 넋을 놓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희소식이 들려왔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까탈스러운 레이놀드가 누군가를 인정하다니.
엘시는 새삼 주인님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레이놀드는 엘시의 극적인 반응을 보고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엘시는 어느새 탁자를 짚고 몸까지 일으킨 뒤였다.
본래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레이놀드였으나, 혈육의 정마저 이길 수는 없었던 듯했다.
엘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귀엽다는 감상이 전해졌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이안 공자의 검술 솜씨가 대단하더구나.”
그러면서 레이놀드는 시선을 슬쩍 방 한 켠에 쌓인 전리품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동강난 채 굴러다니는 갑옷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이안이 금사검으로 박살낸 실험체가 입고 있던 갑옷이었다.
“강철로 만든 갑옷을 저토록 깔끔히 베어내다니…….”
탄성과 탄식이 반씩 섞인 감탄사였다.
그 모습에 엘시는 우물쭈물하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주인님이 인정을 받아 좋기는 한데, 조금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긴 했다.
저 갑옷을 조각낸 것은 미래에서 온 ‘그’였으니까.
그러든 말든 레이놀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실력은 충분하고, 이제 마땅한 혼처를 구하기도 글렀다. 형님께 내가 말씀을 올려보마.”
“……야, 약혼이요?!”
“그래.”
엘시는 남몰래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그녀의 머릿속을 몇 명의 여인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음탕한 젖탱이 년, 이 사실을 알면 아주 통곡을 하겠지? 꼴좋다.
그리고 델핀 그 계집애 말도 들어봐야지. 설마 자리를 비운 사이 약혼까지 맺을 줄은 몰랐겠지? 주인님 같은 소리는 얼어죽을…….
그렇게 그녀의 뇌리를 여러 사람이 스치고 스치다가, 문득 누군가가 그 자리에 멎었다.
이안 페르쿠스.
사실 그의 의사가 제일 중요했다.
엘시의 질문이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그럼 주인… 아, 아니! 이안 님도 동의한 거예요?”
그러자 레이놀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문 간의 약혼에 있어 당사자들의 뜻은 중요하지 않다.”
사내의 엄중한 목소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사실 그렇기는 했다.
라이넬라 백작이 약혼을 제안한다면 페르쿠스 자작은 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실리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득밖에 없는 결합이었다. 페르쿠스 자작이 귀족이라면 이를 거부할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다만 엘시는 그 말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
이안의 삶을, 제 기구한 운명에 묶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신이 났던 작은 투견은, 어느덧 귀를 눕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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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의 바람이 매섭고 찼다.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지만 이해할 수 없는 기후였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덥고 습한 대기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페르쿠스 영지에는 때 아닌 한파가 미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유렌은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마계의 기후야.”
유렌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지난 전투 때 유렌을 억지로 저택에 남기고 떠났던 탓이었다.
솔직히 말해 아이린 경 혼자로는 안심이 되지 않던 차였다. 그래서 호위에 잔뼈가 굵은 유렌에게도 리아를 부탁했던 것이다.
물론 전투광인 유렌이 이를 마음에 들어 했을 턱이 없었다.
그가 요새 내게 쌀쌀맞게 구는 이유였다.
“델피렘이 다스리는 마계에서는, 영원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지. 그래서 악신의 권속이 강림할 때마다 눈보라가 이는 거야.”
툴툴대면서도 아는 내용은 친절히 설명해 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무어라 반응이라도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조금 고민했다.
그렇게 고심 끝에 내뱉어진 말은, 무척이나 담백했다.
“……서둘러야겠네.”
그 말대로였다.
페르쿠스 영지는 멸망을 앞둔 도시처럼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다들 부산스럽게 짐을 챙기고는 있으나, 저중 몇 명이나 이곳을 떠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심지어 이곳에 남아 죽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임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으며 술을 들이켰다.
나야 채비할 것도 없는 인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한량 같이 술병을 기울이더라도 귀찮게 굴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래도 한 명은 있던가.
“스승님!”
활기찬 소년의 목소리였다.
슬쩍 시선을 옮기니, 예상대로의 인물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좀 더 자라야 할 체구의 꼬맹이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 내 시중을 들곤 했는데, 그때 종종 검술을 가르쳐 주곤 했던 아이였다.
나는 한숨과 함께 소년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네드, 너도 얼른 짐 챙겨야지!”
“에이,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여동생만 챙기면 되는데요.”
물론 그 정도로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는 네드를 재차 나무랐다.
“아무리 그래도 짐이 이것저것…….”
“아아, 알겠어요! 그럼 가주님 말씀만 전해드리고 바로 갈게요.”
나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네드를 바라보았다.
저러다 뺀질거리며 나와 한담을 나누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지?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알고 있어요, 그보다 전해야 할 말씀이… 어라.”
그렇게 이어지던 네드의 말이 멈칫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아서, 나는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페르쿠스 저택에는 이와 같은 색조를 간직한 이들이 몇 명 있었으나, 상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이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 좀 하자.”
내게도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었다.
마신의 권속이 강림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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