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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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벽두부터 술을 마셔도 아버지는 아들을 탓하지 않으셨다.
다만 술 냄새를 날릴 수 있도록 조금 걷자고 하셨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저택을 벗어나 말없이 걸었다.
길거리는 불안에 찌든 얼굴을 한 이들로 붐볐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름한 짐 보따리를 만들고 있었다.
중심지에 산다고 해도 시골 영지의 주민들이었다.
세간살이라고 해봐야 변변찮은 것들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살림살이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피땀이 묻어 있었다. 차마 버리고 떠날 수만은 없어, 그들은 울상을 지어야 했다.
삶의 흔적을 그러쥐고 떠나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본래 아버지가 산책을 나설 무렵이면 인파가 모여들곤 했다.
인심 좋은 아버지는 평민이라 해서 무시하는 법이 없었던 덕이었다.
때로는 그들의 고충을 앞장서 해결해 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덕에 영지민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들이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친절하던 이웃들은 이제 제 앞가림을 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어쩌다 우리를 본 영지민 몇몇이 깜짝 놀라 인사를 하러 오긴 했으나,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를 제지했다.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러한 의도로 그들을 막아 세웠을 터였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부자간의 산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옅은 술 냄새가 풍기는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을 따름이었다.
새벽부터 검술 수련을 해오던 나였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일은 드물었고, 설혹 있다 해도 밖에서 이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다들 나를 보고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를 떠올린 내 낯빛이 절로 우울해졌고, 아버지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많이 힘들더냐?"
"뭐가요?"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말은 불퉁스럽기만 했다.
싸가지 없다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내가 아니었으나, 어젯밤의 일 때문인지 머리가 복잡했다.
리아는 저택으로 오기 전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언제부터, 라고 묻는 일조차 무의미했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했으니까.
그 중요한 문제를 가족 중에 오직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리아의 모습을 한 미트람을 보고도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점이 못내 서운하고 불쾌해서, 오랜만에 만들어진 부자만의 시간에도 내 표정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쓸쓸한 낯을 할 뿐이었다.
“어쩌겠느냐, 황명이라는데…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
나는 또 다시 흘러나온 ‘운명’이라는 낱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미트람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요즘따라 지겨울 만큼 많이 들었던 말이라 내 목소리가 조금 더 달구어졌다.
“……아버지는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내 반문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불타오르던 그 황금빛 눈동자는 이제 세월의 풍파에 지쳐 있었다.
흐릿한 불씨만이 남은 그 눈을 보고, 나는 점점 더 격정에 잠겼다.
“귀족이라면 영지를 지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영지도, 영지민들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쫓기듯 떠나가야 하는 상황이…….”
“불가능하잖니.”
단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짧은 말소리에는 까닭 모를 중압감이 담겨 있어, 내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아버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거다. 불가능한 것에 매달려서 기적을 바라면,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고 비참해지지… 운명을 거슬러서는 안 돼.”
“그래서 영지를 버리자고요?”
“그렇지 않으면?”
떼를 쓰는 아이를 달래듯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는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이 돈 탓인지 다소 감정적인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력을 모으면…….”
“귀족 가문은 자원봉사 단체가 아니다, 이안… 라이넬라 가문이 생판 모를 남의 영지에 그 귀하다는 마도병단을 지원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유르디나 가문도 마찬가지다.”
이어지는 논거 하나하나가 타당했다.
기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에 대해서는 이미 델핀 선배와 논의가 끝난 뒤였으나, 이처럼 희망 없는 상황에서까지 손을 빌릴 수는 없었다.
악신의 권속은 그토록 강대한 적이었다.
일천의 정병을 가지고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미트람의 말이 옳았다.
암흑교단이 10년이 넘도록 공을 들인 계획을 분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제국 중앙군의 정예들이 나서야 할 터였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페르쿠스 가문은 한미한 곳이다. 너를 제외하면 기사다운 기사조차 존재하지 않아… 막을 수 없다면,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해.”
“……수백 명이 죽고 다칠 텐데요.”
“수백이 아니라면 수천, 수만이 죽을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마냥 편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야 당연하겠지만.
귀족으로서 가장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당사자였으니까.
“어차피 너야 알아서 제 살 길을 찾아가겠다만은, 그래도 기억해 두어라. 귀족은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책임도 짊어질 줄 알아야 한다. 잘못된 선택은 언제나 대가를 부르지…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는 않구나.”
아버지의 낯이 퍽 처량해졌다.
무력감에 젖은 탓인지, 혹은 슬픈 과거를 떠올린 탓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말이 문득 뇌리에 틀어박히는 것을 느꼈다.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미트람 토벌을 떠나기 전 내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암흑교단의 혀에 넘어가지 말라고.
그때는 아버지로서 흔히 할 수 있는 조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미트람과 리아의 이야기를 연달아 들어 보니, 얼핏 묘한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입에서 즉흥적인 질문이 내뱉어졌다.
“여동생은요?”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돌려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반문이 이어졌다.
“……무슨 소리냐?”
“리아 말이에요, 저택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다면서요.”
내 설명을 듣고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애써 고개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그의 입에서 뻔한 변명의 말이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에 크게 앓았던 탓이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말…….”
“암흑사제는요?”
이것만큼은 아버지도 처음 듣는 소식인 듯했다.
일행에게도 함구령을 내린 정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밝혀봐야 리아에게 하등 좋을 것이 없을 듯해서 숨겨두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전해야 할 소식이기도 했다.
더불어 캐물어야 할 부분도 남아있었다.
“그 암흑사제, 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그 충격적인 말에도 아버지는 내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옅은 탄식처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떨구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깊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착각한 것은 아니고?”
“그럴 리가요, 닮은 사람도 아니었어요… 리아 그 자체던데요.”
물론 쇄골에 점이 없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말할 용의는 없었다.
오빠가 여동생의 쇄골 점까지 알고 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남들에게는 징그럽다는 소리만 듣고 말 터였다.
혹시 몰랐다. 리아라면 조금 좋아할지도.
그렇게 각별한 사이에 있는 가족이었다.
내 여동생에게 나조차 모를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이제 지쳐 버린 목소리로 아버지께 재차 물어야 했다.
“아버지, 도대체 뭡니까… 암흑교단이 왜 리아를 똑 닮은 복제품을 만들 수 있냐고요.”
우두커니 서 있던 아버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흐릿해진 음색으로 말했다.
“……길거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구나.”
대중에게 공개할 만한 속사정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그럴 만한 이야기였다면 비밀로 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나는 순순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거리를 돌아, 다시 저택으로.
저택에서도 인적이 드문 뒤뜰로 가서야 아버지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울적하고 쓸쓸해 보였다.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용인들조차 움찔 떨며 비켜섰을 지경이었다.
나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다만 나는 아버지가 마음을 정리하고 진실을 말해 주기를 바랐다.
이제 와서 숨길 수도 없는 비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판단을 내린 듯했다.
아버지는 기나긴 한숨 끝에 가문의 비사를 풀었다.
“……리아는 네 여동생이 아니다.”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하고 심장이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는 무슨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지조차도.
아버지는 괴로운 표정을 하며 내게 사연을 늘어놓았다.
“정확히는 여동생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해야겠지… 네게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 시절 너와 리아가 유독 사이가 좋아 보여서…….”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나와 아버지는 아차, 싶은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진중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뒤뜰을 대화 장소로 택한 것이 실책이었다.
내가 산책을 갔다 돌아오면, 으레 물수건을 가지고 찾아오는 인물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허리를 한참 넘어 내려오는 흑발에, 금괴를 녹여 만든 듯한 금빛 눈동자.
내 여동생 리아였다.
그녀도 모르고 있던 비밀이었는지 리아의 낯이 창백히 질렸다.
나도 아버지도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뒤뜰에서 셋의 침묵이 계속되던 그때.
비로소 더듬거리며 리아의 입이 열렸다.
“지, 지, 지…….”
아버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속으로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리아가 어떤 심정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진짜?!”
그래,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급격히 화색이 도는 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두 부자의 시선이 불신을 담아 리아를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리아는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렇게 묻는 여동생의 눈빛은 뜻 모를 활기로 반짝거리고 있기까지 했다.
침묵 끝에,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왜 좋아하는데?”
리아는 나와 친남매가 아니라서 꽤 기쁜 모양이었다.
괜히 섭섭하게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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