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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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던 날씨는 어느덧 한겨울의 동장군으로 화했다.
때 아닌 여름의 한파였다.
하늘에서는 비 대신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명백한 이상기후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공포로 젖어 들었다.
떠날 채비를 하던 손이 더욱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진다는 것은 ‘시체 거인’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악신의 권속이 머무는 마계는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는 동토였다. 마계와의 연결이 강해질수록 현세 또한 그 기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낮부터 흩날리고 있는 눈발이 그 증거였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다들 서두르지 않으면 위험했다.
차가운 바람을 마주하며, 나는 문득 네리스 선배가 그리워졌다.
제국 첩보부에 속한 네리스 선배는 탐문에 능했다. 부탁만 한다면 ‘시체 거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모아왔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네리스 선배를 부르지 못했다.
네리스 선배와의 연락이 끊겨 버린 탓이었다.
짐작키로는 미래에서 온 ‘나’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은 듯했다.
어차피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얼굴을 볼 사이였다. 그 외에 내 곁을 떠나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 명령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부디 그것이 영지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래에서 온 ‘나’는 영지를 버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고 했다. 만약 영지를 구할 수단이 있었다면, 진작 언질을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여러모로 암울한 전망뿐이었다.
더불어 리아가 사실 내 여동생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내 정신력은 점점 한계를 시험받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 자세한 사정을 캐물어야 했는데,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리아가 보는 앞이었다.
아무리 리아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해도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슬픈 과거사를 파헤쳐 봐야 리아만 더 아플 뿐이었다.
그래, 아마도 그럴 터였다.
정작 리아는 무척 기뻐 보였으나, 그러리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부자간의 대화가 유야무야되고 만 전말이었다.
대신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기는 했다. 내가 가문의 비밀을 알 날도 이제 머지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여러 사건을 거쳐, 벌써 시간은 정오 무렵.
어느덧 나는 저택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먼저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마중을 나온 참이었다.
물론 작별인사를 건네러 온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가솔들이 나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작은 환송식의 주인공은 바로 세리아, 내 후배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였다.
애초에 델핀 선배의 명을 받아 페르쿠스 영지로 온 그녀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을 이끄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으므로, 그 책임을 다하러 떠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세리아는 사병을 이끌고 곧 피난 행렬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델핀 선배도 나를 도우라 했으니, 가문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찌됐든 간에 짧은 만남에 따르는 짧은 이별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세리아가 이끄는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이 달려올 터였다. 그럼에도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를 떠나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아론 형은 또 다시 홍옥 원석을 그녀에게 쥐어주었을 정도였다.
형은 내게 한 마디를 남기며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제수씨에게 잘해야 한다.”
제수씨 아니라니깐.
다만 그렇게 말해봐야 들어먹을 사람도 아니라, 나는 한숨만 푹 내쉬었을 뿐이었다.
형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형도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세리아 또한 소심해서 제 의사를 표현하기를 힘겨워했다.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워 세리아를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해서 나와 세리아의 관계를 착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벌써 홍옥 원석을 셋이나 받은 세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결국 차례는 돌고 돌아, 내가 마지막으로 세리아 앞에 섰다.
아침에 마신 술 냄새가 아직 풍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아끼는 후배를 보낼 몰골은 아니라, 나는 머쓱한 미소를 머금어야 했다.
“……미안, 세리아. 내가 조금 힘들어서.”
“이해해요, 이안 선배.”
상냥한 세리아는 내 처참한 꼴을 보고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도리어 그녀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훑기까지 했다.
“……금방 돌아올게요. 최대한 많은 영지민들을 지킬 수 있도록.”
나는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이었다.
대신 나는 오랜만에 세리아에게 농담을 던져 보기로 했다.
“알렉스 경이 순순히 협력해 줄까?”
“후후, 글쎄요… 북부의 기사니까 적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릴지도.”
그 말에 나는 첫 만남부터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던 노기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날 때는 나를 ‘또라이 공자’라고 불렀던가.
은근히 맛이 간 영감님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진짜로 그럴 것도 같아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아는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짓던 싸늘하고 도도한 무표정은 이제 없었다.
그 점에 나는 깊이 감사했다.
한때 외롭고 고독해 보였던 소녀가 드디어 온기를 되찾은 것만 같아서.
“내일 봬요, 이안 선배… 그, 그리고 조심하시고요!”
“그래, 걱정 마.”
도망치는 마당에 무슨 조심할 일이 생기겠니.
나는 그렇게 안일한 마음으로 세리아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묘한 감각들을 느꼈다.
달콤한 살내음.
보드랍게 닿던 입술의 감촉.
살풋 미소를 지으며 고깔모자를 눌러쓰는 소녀와, 타오르는 해질녘의 노을까지.
그 모든 꿈의 결말은 한결같았다.
불타는 대수림.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풍경 속을 부유했다.
취기에 젖은 몸이 그 질척한 기억의 한 편으로 내려앉을 찰나.
쿵, 하고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곧장 머리맡에 두었던 검을 잡았다.
검사의 본능이었다.
숨을 죽이며 주위를 살폈으나, 나를 일깨운 노크 소리는 한 번이 끝이었다.
두 번째는 없었다.
그 점에 의아함을 느끼며 침대 밑으로 내려선 그때였다.
내 눈에 기묘한 색조가 눈에 띄었다.
핏빛이었다.
문 너머에서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나섰고, 문 앞에는 사용인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돌봐준 하녀가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발악처럼, 그녀는 최후의 목소리를 짜냈다.
“도, 도망쳐야…….”
그리고 푹, 하고 꺾이는 고개.
더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입에서는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씨발.”
그와 동시에 저택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하녀의 눈을 감겨 준 뒤, 당장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아수라장이 벌어져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 몇몇이 닥치는 대로 타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야수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미트람의 실험체들.
미트람은 죽었으나, 그 실험체들은 남아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페르쿠스 저택에도 실험체들을 심어두었을지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숫자는 조금 적어 보였다.
1층 로비에는 오직 두 명, 하기야 저택에 머무는 사용인 자체가 몇 명 없기도 했다.
나는 검을 던져 실험체 하나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미트람이 죽은 탓인지 그 불사신과 같은 재생 능력은 사라진 듯했다.
정중동의 묘리를 담아, 또 한 번 그려지는 은빛의 실선.
1층 로비에서 사용인들을 덮치던 실험체 둘은 그렇게 죽어 버렸다.
실험체에게 노려지던 사용인들은 영문조차 모른 채 덜덜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도, 도련님… 하, 한스가 어째서…….”
“암흑교단 짓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이를 악문 채 내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몰라 가족들의 방도 살펴보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리아의 방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래도 외출한 모양인데, 내 마음이 절로 조급해졌다.
재빨리 무장을 갖추고 나오니 1층에는 벌써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그간 워낙 많은 사건을 거친 덕인지 다들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침착한 긴장 속에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혹시 상황 파악한 사람?”
내 질문에 유렌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 암흑사제가 의식에 이상한 술식을 삽입한 모양이야.”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 그에게로 모였다.
유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실험체를 발작시키는 무언가를 소환 의식에 넣어둔 거지… 권속의 강림이 임박하면 더 난리가 나도록.”
“그럼 지금 마을은?”
“개판일 거야.”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은 비단 숙취 탓만은 아닐 터였다.
나는 이마를 짚은 채 휘청이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리아는?”
암흑교단과 관련 있는 사람은 비단 실험체들뿐만이 아니었다.
리아도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질문에 셀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에 없어?”
나는 후우, 하고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우선 부모님부터 깨우고, 마을로 나가 보이는 대로 실험체들을 정리해줘. 아무래도 피난 일정을 조금 앞당겨야…….”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꺄아아악!”
“……리아!”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짐작해냈다.
머리가 새하얘지더니, 나는 어느새 소리의 진원지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역시나 실험체에게 습격당하기 직전의 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저앉은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리아를 본 내 시야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식칼을 들고 리아를 덮쳐들던 실험체에게 도끼를 내던졌다.
팍, 하고 도끼가 팔을 절단하자 실험체는 더더욱 울부짖었다.
들고 있던 식칼이 처량하게 땅 위를 굴렀다.
나는 내달리던 힘을 그대로 담아 실험체를 발로 차버렸다.
으득, 하고 뼈가 으깨지는 감각과 함께 실험체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그 몸뚱아리는 땅 위를 구르며 몇 번이고 튕겨 오르고 있었다. 전달된 충격량이 그만큼 무시무시하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저 실험체는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
팔이 잘리고, 핏물이 터져 나와 리아의 얼굴에도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리아는 덜덜 떨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엉덩이를 뒤로 끄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당장 리아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리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오, 오, 오, 오빠…….”
더듬더듬, 리아는 나를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눈물이 촉촉이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걱정하지 마, 너는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저택에서 기다려… 알았지?”
“으, 응… 흐윽, 흑, 흐어엉…….”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리아는 그제야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여동생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한참 동안이나 리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난 후, 리아는 조금 진정이 됐는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도리어 리아가 나보다 낫다 싶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에, 나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심지어 전날 음주를 하고 잠들었던 참이 아닌가.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다.
리아는 여전히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만일 내 품에서 떨어지려고 했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리아의 손이 땅바닥을 더듬었고,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푹, 하고 복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어라, 하고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리아의 손에는 어느덧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실험체가 들고 있다 떨어트렸던 그 식칼이었다.
내 눈동자가 멍하니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조차도 스스로 저지른 짓을 믿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지경이었다.
잠시 사고가 현실로부터 분리된다.
그 부유하는 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또 다시 들려오는 섬뜩한 소음이었다.
푹, 하고 또 다시 식칼이 내 복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아니, 그보다 위인가.
내 입에서 울컥 핏물이 새어나왔다.
리아는 덜덜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아, 아니야…….”
나는 조심스레 리아의 팔을 쥐었다.
느껴지는 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인했다.
병약하던 리아가 낼 만한 힘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유독 삽질을 할 때면 힘이 강해지곤 했는데…….
참 빌어먹을 복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푹, 하고 다시 내 몸을 찌르는 칼질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 내가 오, 오, 오빠를… 그,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악!”
그 악에 받친 절규를 들으며, 나는 가까스로 몸을 빼내 철푸덕 쓰러질 수 있었다.
시야가 흐렸다.
술이 덜 깨서 그런가.
그나마 저 멀리에서 당황해서 달려오는 일행이 보여 다행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읊조렸다.
“리, 리아는…….”
리아만큼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내 의식은 뚝 끊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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