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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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기억 속을 혼곤히 부유한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덧 세계는 일변해 있었다.
짧은 혼란 끝에 오감이 차례로 열리기 시작했다.
우선 열대의 눅눅한 공기가 피부를 쓰다듬었다.
불그스름한 흙에서는 알싸한 향이 풍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잎사귀를 스치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보니 대낮이었다.
그 황금빛 주렴(??)을 헤치며, 나는 자그마한 소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조차 나 있지 않던 여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문명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잘 닦인 길을 걷는 것이 얼마만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야생을 벗어나 문명의 품으로 돌아왔음에 감격했을 따름이었다.
그래봐야 짧은 재회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스승님의 심부름이 끝나면 다시 대수림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였다.
주어진 시간은 길어봐야 사흘이나 나흘, 그럼에도 나는 오랜만에 도시의 향취로 젖을 생각에 기대가 됐다.
특히 금번의 외유에는 특별한 동행인도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를 따라 고깔모자의 끄트머리가 흔들렸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자그마한 체구와 더불어 그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는 마치 인형을 연상케 했다. 얼핏 보기에는 10대 중후반쯤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보다 연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였다.
그렇게 내가 유심히 뜯어보고 있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아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여서요.”
내 뻔한 질문에 소녀는 싱겁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그 손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는 태도였다. 일단은 내가 사형이고, 그녀가 사매일 텐데.
도리어 그 격의 없는 언행이 사매의 매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후배님이랑 첫 데이트잖아?”
숨김없는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괜히 낯이 뜨거워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해야 했다. 얼마 전까지는 시치미를 떼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그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러는 쪽이 더 유효한 전략이라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은 둘째 치고, 아직 스승의 밑에서 독립도 하지 못한 나였다.
그에 반해 사매는 이미 마도에서 일가를 이룬 대마법사였다. 심지어 제국의 고위 귀족 출신이라. 가문의 위세도 대단했다.
그녀에 비해 내겐 모자란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도 일생을 동행할 사이라면 동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이었다.
스승님이나 사매가 들으면 알량한 자존심을 부린다고 비웃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은 적이 있는 사매였다.
적어도 그녀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은 강해지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오러의 개화에, ‘결(?)과 해(?)’라는 숙제까지 풀어야겠지만 말이다.
일부러 고민하는 기색을 지우고, 나는 재차 사매에게 물었다.
“……그래도 유독 기분이 좋아 보여서요.”
흐응, 하고 묘한 소리와 함께 사매의 눈꼬리가 휘었다.
“어제 황제 폐하를 뵀다며?”
“네, 뭐… 그 후로 스승님이 심부름을 보낸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러자 사매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탁, 하고 내 등짝을 후려쳤다.
그 반동으로 내 등이 쭉 펴지자, 사매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님한테 들었어, 임마! 황제 폐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며!”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말 그대로 금시초문이라 나는 맹한 대답을 돌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매는 신이 나서 총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만면에 깃든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제야 사매가 기분이 좋아진 까닭을 알 만했다.
그녀는 혹여 내가 황제의 눈에 들었을까 싶어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내 출세길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벌써 호들갑을 떨다니.
사매는 특히 나와 관련된 일일수록 감정의 변화가 극심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만일 황제 폐하가 너를 중히 쓰시겠다면?”
“어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뭘 믿고 맡기겠습니까…….”
“그, 그럴 수도 있지! 자, 봐! 네 눈이 얼마나 선량해 보이는지!”
그러면서 사매는 훅, 하고 제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 맑은 눈동자에는 내 금빛 동공이 비치고 있었다.
딱히 선량해 보이는 눈매는 아니었다.
내 떨떠름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으나 사매의 기대감은 꺾이는 법이 없었다.
도리어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까지 모았을 따름이었다.
“제국의 권력은 모두 황제 폐하로부터 나오잖아?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눈에만 들면, 네 앞길도 창창해지는 거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매에게 또 한 마디를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꿈을 꾸는 소녀 같은 표정의 사매가 퍽 귀여웠던 탓이었다.
하여간 예쁘기는 더럽게 예뻤다.
결국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사매에게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요?”
“그럼!”
사매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렇게 답했다.
그녀는 요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남편 될 사람이 잘 된다는데, 당연히 좋지.”
나는 그 좁혀지는 거리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사매는 내게 다가오고, 나는 밀어낸다.
그러다 사매가 툴툴거리기 시작하면 내가 달래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매가 내게 애정을 표하는 만큼 내가 무언가를 돌려준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내가 느끼고 있는 자괴감이나 무력감을 모르고 있을 사매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토록 일방적으로 내게 매달리는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내가 자신감을 되찾았으면 해서, 만일 그 우위마저 사라지면 내가 먼저 떠나가 버릴까 봐.
나쁜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 보기로 했다.
“……사매.”
“응? 왜 그래, 남편… 그, 그리고 사매 아니라고!”
늘 그렇듯 사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시시덕거리다 벌컥 화를 냈다.
‘사매’라는 호칭은 나와 그녀의 사이를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더 깊은 관계처럼 보이지만, 일단은 사형제지간이라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 거리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 호칭을 비틀어 버렸다.
“그럼, 마누라?”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마누, 마누… 뭐?”
우쭐해져서 말을 이어가던 사매의 혀가 멈칫했다.
뻐끔거리는 입이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남편이 있으면 마누라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 그, 그! 그렇긴 한데……."
드물게도 사매는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뒤늦게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귀까지 새빨개진 그 얼굴마저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전환된 공수에, 나는 능글맞은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먼저 남편이라 부를 때는 언제고."
"……야, 야! 그거언!"
사매는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보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마땅한 핑계가 떠오를 턱이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받은 만큼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결국 사매는 또 다시 말꼬리를 늘여야 했다.
“노, 농담이었고…….”
그러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꼴이, 혹여 내가 이를 진짜로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그랬다가는 여태껏 들였던 공이 모두 날아갈 테니까.
앞으로 사매가 무슨 말을 해도 ‘농담’으로만 받아들이면 답이 없었다.
이때 모르는 척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고위 귀족 출신답게 자존심 하나는 만만찮은 사매였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을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물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도리어 한 술 더 떠 상반신을 굽혔다.
나와 사매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입과 귀의 높낮이도 평형해졌다.
내가 사매에게 속삭인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농담 아닌데, 사매.”
수세를 취한 사매는 공세일 때와 달리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터질 듯이 붉어진 낯으로 외쳤다.
“아아, 진짜!”
내 멱살이 붙잡힌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어어, 하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들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매가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내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생에 첫 입맞춤은, 의외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쪽, 하는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간질거리거나 달콤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단지 말랑한 감촉이 전해지더니, 사매의 체향이 코끝을 훅 스치고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어느덧 사매의 눈동자가 핑핑 돌고 있었다.
나는 넋을 놓은 채 사매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까, 까불지 마! 어딜 감히 선배하고 맞먹으려고… 그, 그리고 네가 먼저 고백한 거다? 난 농담이었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매는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으으, 하고 내 눈치를 살피다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고깔모자의 챙을 꼭 쥔 채로.
얼굴이 어찌나 붉었던지 그 이마에서 김이 나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허, 하고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쪽이 사형인데.”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인정받지 못할 사실을 읊으며, 나는 사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도시에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사매와 단 둘이서 보낸 며칠은 즐거웠다.
시간의 밀도가 단숨에 몇 배는 상승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토록 행복한 나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만 알았다.
대수림이 불타오르기 전까지는.
일렁이는 불꽃이 나의 시계를 벌겋게 달구었다.
**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숨결이 거칠었다. 악몽들이 파편처럼 뇌의 혈관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낯선 사내의 기억과, 의식이 끊기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들이 혼입된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대수림에 있던 사내인가?
그렇지 않으면 여동생에게 찔려 볼품없이 쓰러진 사내인가.
얼마쯤 헐떡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마자 내가 부르짖은 이름은 하나였다.
“……리아!”
복부에서 맹렬한 통증이 일었으나, 나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리아를 찾으러 가야 했다.
보이는 풍경으로 보아 내가 누워있던 곳은 침실이었다.
아직 일행이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랬다면 진작 피난 행렬에 얹혀 가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툭, 하고 무언가가 내 발에 걸렸던 탓이었다.
내 의아한 눈빛이 발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단박에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땅바닥에서 뭐하고 계십니까, 아이린 경?”
한때 자존심 높았던 고고한 여기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 스승님…….”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계집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린 경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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