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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65화 (265/649)

〈 265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8)

* * *

아이린 경은 눈물을 쏟으며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가면을 쓴 괴한한테 당했다고요?”

“네, 네…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렇습니다.”

주눅이 든 아이린 경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실종되어 있었다.

제 눈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난데없는 새 수수께끼의 등장에 머리를 벅벅 긁어야 했다.

내뱉는 음색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절로 어렸다.

“아니, 그것뿐입니까? 그렇게 수상쩍은 인간이 왜 지금에야 나타나는데요?”

“그, 그건 저도 잘… 아! 그러고 보니, 쓰러지기 전에 빛이 번쩍하긴 했습니다!”

빛이 번쩍했다니.

조금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니었다.

내 낯빛이 떨떠름해지자, 아이린 경은 재빨리 다시 머리를 마룻바닥에 처박았다.

쿵, 하는 소리가 한숨을 찢고 울려 퍼졌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리아 아가씨께서 홀린 듯이 몸을 일으키시기에, 방심한 나머지…….”

“……아무리 방심해도 그렇지.”

나도 인내심의 한계가 있었던지라, 어쩔 수 없이 책망의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이린 경은 눈물을 머금고 제 칼을 내 발치에 올려두었다.

“주, 죽여 주십시오… 이 못난 목숨, 스승님께 도움도 되지 못하고 황녀님께 돌아갈 수도 없다면 차라리…….”

“아니, 왜 그렇게 극단적인데요.”

그 와중에 루페미온 가문의 여식이라고 검은 고급품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질색하며 말했으나, 아이린 경 또한 진심으로 보였다.

그녀가 서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무릎은 여전히 꿇은 채였다.

여기사는 훌쩍이며 물기에 젖은 제 눈가를 손으로 훔쳐냈다.

“저 같이 무능한 사람은 기사로 죽을 가치도 없다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수치를 감내하는 것도 책임이겠죠. 기사를 그만두고 얌전히 신부 수업이나 받으면서…….”

“됐습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두면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였다.

아이린 경은 더욱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녀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미색은 예전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호위기사로 있을 때처럼 쓸모가 아예 없지는…….”

“한 번만 더 그 이야기 하면 혼납니다.”

아이린 경은 내 싸늘한 음색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단지 힘없이 시선을 내리깔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잠겨야 했다.

아이린 경은 무려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였다.

기사로서 생활한 지도 몇 년은 되었다. 아무리 황위계승서열이 밀린다고 해도, 황족의 호위를 전담할 정도였다.

방심했다고 한들 일격에 혼절시킬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최소한 내게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가면을 쓴 괴한이 그 이상으로 강했다.

그래서 더욱 헷갈렸다.

호위 기사를 쓰러트렸다면 리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짓은 무궁무진했다.

납치를 해서 인질로 삼아도 그만이고,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려도 말릴 이는 없었다. 그만한 실력자가 리아에게 당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쓴 괴한이 선택한 것은 그중에서도 최하책이었다.

방치.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쏟아지는 고민거리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초에 명민한 두뇌와는 거리가 멀던 나였다.

풀리지 않는 숙취에 부상까지 겹치니, 더는 사고를 진행시키기 힘들었다.

이는 레토나 성녀한테 맡겨야 할 문제였다.

결국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자, 아이린 경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스, 스승님! 성녀님께서 분명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됐으니까, 아이린 경도 그만 일어나시죠… 지금은 손 하나하나가 귀합니다.”

아이린 경은 머뭇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낯빛에서는 은근한 안도감이 비치고 있었다. 용서를 받아서 기쁜 모양이었다.

용서라기보다 넘어가 주는 쪽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은근히 폐급 기질이 있는 여자였다.

아니라면 모종의 계기로 인해 폐급이 되어 버렸거나.

어느 쪽이든 아이린 경을 버릴 수는 없었다.

미래에서 온 '나'에게서 강력한 기술을 전수받았을뿐더러, 말했다시피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익스퍼트나 되는 고급 전력의 손을 놀게끔 두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내가 앞장을 서고, 아이린 경이 주춤주춘 따라붙는 구도가 연출되었다.

저택의 로비에는 불길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 암울한 공기는 응접실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응접실에는 모두가 모여 있었다.

페르쿠스 일가는 물론이고, 내 동료부터 레이놀드 씨와 제국의 행정관 아서까지.

리아와 세리아를 제외한 전원이라 봐도 무방했다.

내가 휘청거리며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좌중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성녀에 이르러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이안! 아직 상처가……."

"괜찮습니다."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성녀를 제지했다.

성녀가 그렇게 나오리란 사실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대신 나는 줄곧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보다 리아는?"

성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물러났다.

내 고집은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확실히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니 좋은 점도 있었다.

쓸데없이 대거리를 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대답은 셀린으로부터 나왔다.

"……기절했어."

내 눈이 셀린을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개와 고양이처럼 다투던 둘이었지만, 벌써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여러모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짓씹는 그 모습에서 셀린의 복잡한 심경이 전해져 왔다.

“리아도 깜짝 놀랐나 봐. 넋을 놓고 중얼거리고만 있더라고… 그런데 도대체 왜?”

셀린은 끝에서야 의문을 하나 던졌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는 난데없이 칼에 찔리지 않나, 심지어 그 범인인 여동생은 이제 정신적으로 망가져 혼절해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으니 의혹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 아버지인 페르쿠스 자작을 향했다.

내 눈동자가 그들을 향하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과 아론 형은 우울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왜 리아가 그런 짓을 저지른 거죠? 그건 마치…….”

“미트람의 실험체.”

차마 뱉을 수 없었던 셀린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레이놀드 씨였다.

그는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페르쿠스 자작님, 이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암흑교단은 대륙의 공적입니다. 이와 연관된 사실이라면 무엇이든 밝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레이놀드 씨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단지 담백한 사실만을 전해 의사를 표현했을 뿐이었다.

마치 압박을 넣는 모양새라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나 또한 페르쿠스 가문의 비밀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나는 일부러 입을 다물고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아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암흑교단이고 나발이고 용혈문자의 소유자인 내 뜻이 제일 중할 터였다.

결국 누구도 편 들어 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가 서서히 입술을 뗐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군요.”

고뇌와 아픔으로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최근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은 아버지의 심신을 피폐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딸이 아들을 찔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대로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아직도 버티고 있는 까닭은, 그의 손에 영지의 운명이 쥐여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 무렵에는 어떤 병이 유행했습니다. 신성력으로도 마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죠.”

“……‘고갈증’이군요.”

관련된 지식이 가장 많을 터인 성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버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고갈증’, 나 또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든 생명은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 난다.

그 크기가 작든 크든 간에, 마력을 가지지 못한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생명활동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던 탓이었다.

마수가 태어나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깊었다.

마력은 마력을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력 또한 마력을 지닌 존재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밀도가 과해지면, 마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법칙에도 예외가 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바로 ‘고갈증’이라는 특이한 질병을 타고 난 사람들이었다.

‘고갈증’이란 체내의 마력이 자연적으로 말라버리는 병이었다. 대개는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력이 없는 생명은 살아갈 수 없으니까.

기적적으로 치유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고갈증’은 본질적으로 불치병에 속했다.

마력으로도 신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본래의 리아 또한 이러한 병을 앓고 있었던 듯했다.

“네, 머리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절대 제 힘만으로는 딸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황실의 아이리스 황녀께서도 목숨을 빼앗기실 뻔했던 병 아닙니까? 그러나 도무지 가슴이 말을 듣지 않더군요.”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딸을 앞둔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후로 아버지가 커다란 실의에 빠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낱말에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했을 터였다.

그 시절을 회고하는 어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론 형 또한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힘겨운 음색을 토해냈다.

“……그때 들었던 겁니다.”

“무엇을요?”

“죽은 사람마저 되살리는 비술을 가진 자가 있다는 소문을.”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서가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그렇게 수상쩍은 소문을 어떻게……!”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듯이.

단지 발악처럼, 운명이라는 강대한 적에게 덤벼보고 싶었다고.

아버지는 슬픈 눈빛을 한 채 증언했다.

“수소문을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소문을 듣고 먼저 접촉해 오더군요.”

“무엇을 요구했죠?”

성녀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흐, 하고 슬픈 웃음을 토해냈다.

“딸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고갈증을 타고난 이들에게는 기묘한 성질이 있는 모양이라고… 그때 당시 딸은 죽기 직전이었죠.”

이후의 이야기는 뻔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딸을 넘겼고, ‘딸’을 받았죠.”

묘한 소리였다.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나와 달리, 좌중은 여전한 의문을 담은 채 아버지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차 확인사살을 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리아’라고 부르는 저 아이는, 제 딸이 아닙니다. 제 딸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태어난 복제인간이죠… 네, 페르쿠스 가문은 암흑교단과 거래했던 겁니다.”

그것이 여태 숨기고 있던 페르쿠스 가문의 비밀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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