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66화 (266/649)

〈 26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9)

* * *

아버지의 고백에 좌중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리아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미트람의 실험체들이 발작하는 동시에 보인 이상행동이었다. 일행들도 내심으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는 그보다 치명적인 정보가 내재되어 있었다.

‘암흑교단과 거래를 했다.’

사유를 막론하고,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 황실도 성국도 용납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암흑교단이었다.

남부 열왕국은 그나마 덜 적대적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흑교단이 대륙의 공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가장 먼저 낯이 굳은 인물은 성녀였다.

엘시 선배는 마른침을 삼키며 나와 레이놀드 씨 사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떨리는 동공이 그 불안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성녀는 곤혹스러운 듯 이마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페르쿠스 자작님… 스스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고 계신가요?”

“그래서 끝까지 숨기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푹 떨구며 구슬픈 목소리를 토해냈다.

“처음에는 암흑교단의 농간인 줄도 몰랐죠. 하지만 ‘리아’를 돌려받는 그날, 그들은 정체를 밝히며 저를 회유했습니다.”

“……그때도 대가를 제시했겠군요.”

“진짜 제 딸과 세상을 주겠다더군요.”

딸이라면 몰라 ‘세상’을 대가로 제시하다니.

미친 소리였다.

그때부터 암흑교단은 이 세상을 지배할 자신이 있었던 듯했다.

미트람의 말에 따르면, 암흑교단이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대가라고 했으니.

도대체 암흑교단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조차 짐작하기 힘들었다.

성녀는 계속해서 자세한 내막을 캐물었다.

“암흑교단이 그렇게 좋은 조건만 제시했을 리가 없어요. 그 대신 무얼 달라고 했죠?”

“영지민들의 목숨.”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녀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제 낯가죽을 자꾸만 훑어내렸다.

“그제야 제가 바라고 있던 것이 얼마나 미친 생각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운명이란 거슬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요. 이미 저지른 죄가 있으니, 차라리 암흑교단과 협력할까 싶은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겠지.”

레이놀드 씨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드물게도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놈들이 영지를 개판으로 만들 까닭이 없으니 말입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놀드 님.”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서가 침음을 삼켰다.

그는 초조한 듯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피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페르쿠스 자작께서는 사기를 당하신 거군요. 진짜 딸을 돌려받을 줄 알았는데, 가짜를 받았다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습니다… 암흑교단 측은 딸을 돌려준다고 했지, ‘진짜’ 딸을 돌려준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궤변만 늘어놓더군요.”

“그렇다면 제국 황실에 보고했어야 할 문제 아닙니까?”

아서가 툭, 하고 내던진 질문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는지 아버지의 고개가 푹 꺾이고 말았다.

아서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랬다면 이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암흑교단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제국 황실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조사만 거쳤다면 페르쿠스 가문의 책임도 한층 덜 수 있었을 텐데…….”

“……그럼 그 불쌍한 아이는요?”

대답은 의외의 인물로부터 흘러나왔다.

내 누나라 소개해도 어색하지 않은 동안의 미부인이었다.

페르쿠스 부인, 이라고 불리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꽤 감정이 복받치는 듯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탄생한 아이에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짜 딸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제국 황실에 신고하는 순간, 암흑교단이 만들어낸 괴물 취급을 받을 게 뻔했어요. 그런데 어, 어떻게 그 불쌍한 아이를……,”

“그리고실제로 괴물이었죠.”

아서의 냉정한 반론이었다.

무례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그 발언에 어머니의 눈이 슬프게 뜨였다.

연이은 사건에 지친 탓인지, 아서는 더 이상 제 본심을 숨기지를 못했다.

“아닙니까? 그 탓에 이안 공자께서는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만일 그때 성녀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달려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는 반론 대신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여태껏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은 아이였고, 암흑사제도 죽은 마당에 도리어 떨어트리기가 무서웠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린 경이 종일 붙어있었으니, 눈이 닿는 곳에 두어야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수습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건…….”

무어라 반론을 하려던 아서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아버지의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난데없이 아이린 경을 단숨에 제압할 만한 괴한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조차도 아직 얼떨떨하다고 느끼는 사건이었다.

아이린 경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고, 아서는 결국 한숨만 푹 내쉬었다.

“……하여간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권한이 있는 분과 재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국 측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러면서 아서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라면 내 뜻이 아서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 가족들이 처벌을 받는다는 소리도 아니고, 시간만 있다면 따로 황실 측과 교섭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당장 맞이해야 할 적이 너무나 강대했다.

가타부타 말을 나눌 바에는 피난 행렬부터 챙기는 편이 최선이었다.

성녀 또한 나와 비슷한 판단을 내린 듯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성녀는,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암흑교단과 거래하고, 그 내용을 숨긴 죄는 큽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은 죄로 태어난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의도 자체는 높이 살 만하군요.”

“그렇다면?”

“제국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추후 협의기관을 통해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아서는 그제야 한 건 해결했다는 듯 짝, 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지친 눈빛으로 사안을 정리했다.

“자,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요… 이만 다들 일어납시다. 다행스럽게도 폭주한 실험체는 많지 않아서, 라이넬라 가문과 유르디나 가문의 협력으로 작은 피해로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다행이었다.

페르쿠스 영지를 지키는 위병이라고 해봐야 얼마 없었다. 구석진 장소까지 가면 마을사람들이 자경단 노릇을 하고 있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마침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과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이 있었던 덕에, 폭주하는 실험체들을 단기간에 제압한 모양이었다.

아서는 그 사실에 또 하나의 의의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 예상보다 혼란이 덜하다는 뜻입니다. 당장 채비만 한다면 피난을 떠날 수 있으리라 사료되는군요.”

아서는 한시라도 바삐 이곳을 뜨고 싶어 보였다.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장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행도 내심 공감하고 있던 부분이었는지, 좌중에 앉은 이들 중 반대를 표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다들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하나의 질문이 송곳처럼 소란을 파고들었다.

“……그럼 리아는요?”

셀린의 질문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굳어서, 대답을 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제국의 행정관 아서였다.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셀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리아는 어떻게 되는데요?”

“하스터 양…….”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깃든 목소리에 아서는 한숨만을 내뱉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가짜에 불과해요. 심지어 언제든 돌변해서 몇 년을 가족 같이 지낸 사람도 찌를 수 있는 괴물이죠. 그런 위험한 존재를 왜 제국이 용인해 주어야 합니까?”

“하, 하지만 그동안 진짜 사람처럼 대했는데…….”

“사람처럼 대한다고 괴물이 사람이 됩니까? 그럼, 개를 사람처럼 대해도 사람이 되겠군요. 하하… 우리 집 포치가 좋아하겠는데요.”

조금도 재미있지 않는 농담을 던지며, 아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쓰디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입니다. 페르쿠스 자작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운명을 거스르려 해봐야 잘못된 결과만을 낳을 뿐이죠.”

셀린은 울컥해서 몸을 일으켰다.

본래부터 성질머리가 더럽기로 유명한 셀린이었다.

지금껏 특유의 사회성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셀린은 우리 중에서 엘시 선배 다음 가는 다혈질이었다.

그대로 두면 셀린은 무어라 소리를 내지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셀린이 목청을 높이기도 전에, 아서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우선 두 사람을 중재해 보려던 내 발걸음이 자연히 멎었다.

셀린은 표독스럽게 아서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움찔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다만 그는 마지막으로 조언을 건넸을 뿐이었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바로 오늘처럼.”

아니, 경고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렇게 몸을 돌려 터벅터벅 응접실을 나섰다.

레이놀드 씨도 슬쩍 나와 일행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몸을 일으켜 아서의 뒤를 따랐다.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입술을 짓씹고 있을 따름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셀린뿐이었다.

쿵, 하고 탁자를 발로 차버린 셀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 앙다물어진 잇새로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납득 못해.”

셀린은 거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떠났다.

그녀는 나를 스쳐지나가며 슬쩍 눈짓을 했다.

대화 좀 하자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몇 년이나 여동생으로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비록 혈연은 없더라도 내 마음속의 여동생은 언제나 리아 하나뿐이었다.

리아를 구해야 했다.

다만 그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리아를 풀어주는 일쯤이야 어렵지도 않았다. 당장 용혈문자를 보여주며 아서를 윽박지른다면 그녀는 곧장 자유의 몸이 될 터였다.

추후에 제국 황실 측에서 내 의중을 물어보러 오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내가 주목하고 있던 문제점은, 리아가 또 다시 신체의 제어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아가 위험요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리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이내 결심을 굳히고 발걸음을 돌렸다.

셀린과 대화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내 발목을 붙잡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이안.”

아버지였다.

내가 흘깃 뒤를 돌아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사죄했다.

“미안하다.”

운명을 부정하려 했고, 그래서 더욱 기구한 운명에 빠져버린 사내의 말로였다.

나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유독 해가 뜨지 않던 새벽녘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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