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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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이 밝아오는데도 찬바람이 매서웠다.
어느덧 눈보라가 일고 있었다.
저택에서 출발한 피난 행렬은 단숨에 인원을 불려갔다. 미리 대피할 경로를 짜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영지의 수많은 피난민들이 행렬에 참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도망치듯 정든 고향을 떠나가야 하는 신세였다. 페르쿠스 자작을 포함해서, 낯빛이 우울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특히 리아의 양손과 양발에 구속구를 채울 무렵에는, 셀린이 목청을 높였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죄인처럼……!”
“아니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물론 아서는 그렇게 냉정한 어조를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암흑교단의 실험체들은 여전히 폭주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라면, 저 괴물을 상대해 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아서는 흘깃 눈짓을 주었다.
그 너머에, 쿵쿵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시체 거인이 위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훔쳐듣던 이들의 낯에 공포의 감정이 스쳤다.
저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셀린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으나,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혹여 이안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해 주었으면 또 몰랐다.
그러나 이안은 냉철한 선택을 내렸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결정이 옳았다고 말할 터였다.
누구라도, 저 악신의 권속을 본다면.
아서는 분이 복받치는 셀린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소한 그 정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구속을 풀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음울한 행진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인물은 있었다.
고깔모자를 쓴 사랑스러운 소녀, 엘시는 바락바락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삼촌, 얼른 마도병단을 파견해야……!”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이냐.”
엘시에 맞서는 레이놀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그는 슬그머니 푸른 눈동자를 엘시에게 향했다.
“이안 공자는 너보다, 그리고 우리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보다도 강하다. 애초에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야.”
“마을 사람들은요?!”
“이안 공자가 못 지키면 우리도 지키지 못해… 이미 이안 공자가 외곽까지 훑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자 엘시는 더욱 답답해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얼핏 보기엔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엘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진짜 씹… 그런데 주인님이 안 돌아오잖아요?! 노친네가 벌써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나…….”
“말조심해라, 엘시.”
그토록 무례한 언동에도 레이놀드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이미 익숙하다는 태도였다.
도리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질렸다는 눈빛을 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레이놀드가 ‘말조심’하라는 발언 또한 의외였다.
“약혼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주인님’이라니, 그러고도 네가 라이넬라더냐.”
“그, 그건… 하여튼, 약혼자가 될 수도 있는 상대인데!”
“……제발 조금만 더 참거라.”
짜증마저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엘시는 여전히 사나운 눈빛을 지우지는 않았으나,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 레이놀드를 노려보았다.
레이놀드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가문의 명이라고 하면 고분고분하던 꼬맹이였는데, 어느덧 대마법사인 레이놀드와 대거리를 할 만큼 컸다.
그 점이 참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결국 고위 귀족의 삶이란 가문의 뜻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또한 거쳐 갔던 방황기였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엘시 또한 깨달을 수밖에 없으리라.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누구도 그 구속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레이놀드는 안타깝다는 듯 옅은 탄식을 흘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네 뜻대로 전부 이루어질 것 아니냐. 약혼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도 계속 다닐 테고, 무엇보다 이미 이안 공자의 벗들이 그를 찾아 출발했는데.”
“……조금만이에요.”
아직도 기가 죽지 않은 목소리였다.
레이놀드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혼자서라도 갈 테니까.”
“피난 행렬은 길고, 호위 인력은 하나하나가 중하다. 그리고 이안 공자가 위험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
레이놀드는 슬쩍 저 멀리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체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 신화 속의 괴물을 응시하는 엘시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살점 둥지를 비롯한 흉물들을 보아 온 엘시였으나, 시체 거인은 그중에서도 논외에 속할 만큼 흉측하고 강인한 적이었다.
“설마 저 괴물에게 대적하려 들진 않을 테고…….”
스스로 읊조린 말이었으나, 레이놀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엘시도 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저 괴물은 맞서기조차 두려운 강적이었으니까.
본래부터 강자를 두려워하고, 또 그래서 제 자아를 누군가에게 의탁해 왔던 엘시였다.
시체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져야 하는지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인한 주인님이더라도, 저 괴물에 대적할 수는 없으리라.
엘시는 상상만 해도 두렵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레이놀드는 엘시로부터 반론이 돌아오지 않아 꽤 흡족한 기색이었다.
그러던 레이놀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그려진 주머니였다.
이를 받아든 엘시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너도 라이넬라의 마법사니까, 급속 회복 물약 정도는 가지고 있거라. 피난 도중에 어떤 적을 마주할지 모르니.”
급속 회복 물약.
말 그대로 마력을 급속도로 충전시키는 약물이었다.
검사들이 힐링 포션을 으레 한 병씩 챙기듯, 마법사들도 급속 회복 물약을 챙겨가곤 했다.
정작 방대한 마력량을 타고난 엘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엘시는 슬쩍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래도 라이넬라 가문의 직계혈족이라고, 꽤 많은 양이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부피가 작은 것으로 보아 공간 확장 주머니로 보였다.
그렇게 물약을 받아들면서도 엘시는 여전히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흘깃흘깃 마을 쪽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아직 미련이 남은 듯했다.
레이놀드는 그 모습을 보며 쯧, 하고 한 번 혀를 찼다.
“엘시, 그 성질머리로 결혼하고 아이는 잘 기를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안 공자도 너를 두고 그렇게 말을…….”
“……주인님이요? 저한테 뭐라 말했어요?”
그러자 단번에 귀를 쫑긋이며 관심을 기울이는 엘시였다.
레이놀드는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여관에 이안 공자가 찾아왔었다. 그때 약혼할 의사를 물어봤었는데…….”
그때였다.
쿠궁, 하고 천둥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축이 거칠게 흔들렸다.
몇몇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였을 정도였다.
당황한 모두의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시체 거인이었다.
지금껏 얌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시체 거인이,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거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변을 감지한 레이놀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동자에서 푸른 전하가 튀기더니, 이내 그는 유심히 어딘가를 훑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놀드는 시체 거인이 흥분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얼이 빠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안 공자?”
그 이름을 들은 엘시의 눈이 다급하게 레이놀드를 뒤따랐다.
그곳에서는, 사내 하나가 시가지를 질주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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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넘치는 기억이 주위의 풍경과 동화된다.
불타오르는 숲의 한복판이었다.
대수림은 사시사철 습도가 높아 공기가 끈적거릴 정도였다. 그러한 장소에서 자연적으로 이만한 화재가 발생할 리는 없었다.
인위적인 불이었다.
주위에는 새카맣게 탄 시체들이 몇몇 보이고 있었다.
한때 대수림에 머물던 이들이었다.
대마녀의 수련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간 제자들.
그들이 칼을 거꾸로 잡았다.
흡혈귀를 대수림에서 탈출시키는 대신, 암흑교단에게 대가를 약속받은 것이다.
과연 암흑교단은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듯했다.
아무리 여러 명이더라도 사매는 대마법사였다. 어중이떠중이 여럿이 모였다고 해도 궁지에 몰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결과는 정반대였다.
배신감에 치를 떨 새도 없이,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여인의 몸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그녀의 몸이 흘러내린 궤적을 증언했다. 그 풍광을 본내 눈과 목은 어느새 습기로 먹먹해져 있었다.
의식이 부유하는 듯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나와 현실이 분리된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피부가 지글거리며 익고 있었어도 이를 눈치 채지는 못했으리라.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깔모자를 쓴 소녀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내 가슴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뭘 또, 쿨럭! 울고 그래, 임마… 마음 아프게.”
사내의 첫 번째 이별이자, 최후의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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