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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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매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사매를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오직 사매만이 줄 수 있는, 심장을 간질이는 충족감이었다.
비로소 품이 가득 찬 듯한 안도감.
그러나 지금 내 품속은,소녀의 잦아드는 숨결로 멍들고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도시에서 볼 일이 남아있어 사매를 조금 일찍 보냈는데,그 사이에 습격이 있을 줄은 몰랐다.하물며 매복한 채 나를 노리려던 배신자들을 사매가 처리했을 줄도.
아직도 거처의 중심부에서는 웅웅거리며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여파만으로 나무들이 뿌리채 뽑히고 질풍이 마구잡이로 내달렸다.
오랜 주박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갈던 흡혈귀와, 대륙의 마스터 중 하나인내 스승의 싸움이었다.
나 따위는 근처에 있어봐야 짐덩어리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제자로서는 불민한 생각이겠으나,나는 웃기게도 그 사실에 다소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매와 이별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더듬거리며,내 입에서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울음기로 촉촉이 젖은 목소리였다.
“미,미안해.미안해,사매…내,내가 너무 늦어서…….”
죽음을 앞두고도 사매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늘 그렇듯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오늘따라 그 소리마저 흐릿하게 느껴져서,내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울지 마,새끼야.”
평소와 같이 당당한 말투였다.
도리어 나를 달래려는 듯,사매는 내 몸에 팔을 감아오기까지 했다.
달콤한 음색이 내 귓가를 적셨다.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네 덕에,나는 나로 있을 수 있었어…‘라이넬라’가 아니라,네 사매이자 연인으로.난생 처음으로 행복했었어.”
“사매,제발…….”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별을 상정하는 것 같아,나는 그녀에게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매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는 듯.
“너와 처음으로 해본 것이 너무 많아.”
나는 목이 메였다.
“사랑도,입맞춤도,그리고 데이트도…누군가와 웃고 떠들면서,미래를 꿈꾸고.온 세상에 단 둘만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어.”
가슴에 열상이 새겨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고마워,사형.”
그토록 불러주지 않던 호칭을 들어도,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드,드디어 지켜냈다…….”
안도했다는 듯,구슬픈 울먹임을 토해냈다.
“……내,소중한 사람.”
먼 옛날,남동생을 무력하게 잃은 여인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이라도 되는 양,그녀는 최후의 심경을 내게 전했다.
툭,하고 내 품을 더듬던 소녀의 손이 떨어져 내린다.
“안 돼…….”
함께했던 추억들이 오감을 파고들었다.
달콤한 첫 입맞춤.
눈웃음을 지으며 앞섬을 슬쩍 열어보이던 장난스러운 모습.
마주칠 때마다 나던 향기로운 체향.
입술에 남은 쌉싸름한 화장품의 맛과,품에서부터 전해지던 온기.
헐떡이면서,나는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안 돼,안 돼,안 돼……!내,내가 잘못했어,사매…내가,내가 너무 늦었지…아,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울어도.
“사,사매라는 말이 싫어?그럼 바라던 대로 선배님이라 불러줄 테니까…단 둘이 가고 싶다던 곳도,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잖아…그러니까……”
흐느껴도.
“제발,제발…….”
빌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죽지 마.”
그것이야말로,죽음의 본질이었다.
느닷없이 흐리던 시야가 탁 트였다.
내 숨결이 어느덧 거칠어져 있었다.
일순 혼란이 찾아왔으나,내 품에 안긴 것은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다.
여동생을 지키고자 기사를 꿈꾸던.
나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나의 장난꾸러기 벗 네드.
내 눈시울은 붉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스승님,마,말씀대로…쿨럭!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더니…….”
“그래,그래.”
나는 단지 망가진 자동인형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네드는 자랑스럽게 제가 한 일을 떠벌렸다.
“여,여동생…여동생을 덮치던 나쁜 놈을,쓰러트릴 수 있었어요…….”
“그래,그래.훌륭했어.아주,많이…….”
나는 울컥해서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네드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나는 네드에게 말했다.
“……아주 많이, 컸구나. 어느새.이렇게 여동생도 지키고.”
“스승님…….”
네드는 내 칭찬을 듣고 나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애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아직 메이가 저 뒤에 있어요.”
“내가 지켜주마.”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들끓는 감정을 정련해 토해낸 달구어진 약조였다.
네드를 끌어안은 내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재차 맹세했다.
“반드시,지켜주마… 네 여동생만큼은, 기필코”
우리는 오빠니까.
여동생을 지키기로 맹세했으니까.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당연한 사실들.
네드의 유언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는 가빠지는 폐부에서 또 다른 언어들을 짜냈다.
“메이 말고도,많은데…건넛마을의 루디랑,이웃집의 찰스도 지켜 주기로,허억,했었는데…….”
“전부 다.”
나는 각오를 다지듯 이를 악물며 약조를 내뱉었다.
일렁이는 불길을 반사하며,피 웅덩이가 내 모습을 비추었다.
내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전부 다,내가 지켜주마…네 여동생뿐만이 아니라,모두를.”
“……진짜에요?아무도 버리지 않고?”
쉽사리 믿기 힘들다는 듯 던져진 반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네드에게 건네곤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럼,물론이지…알고 있잖니,네드.자고로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주고받았던 문답을 재현하며,네드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잠에 빠지듯 네드의 숨결이 옅어졌다.
“이안 도련님이,제가 아는 최고의 기사라서…….”
툭,하고 소년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나는 얼마쯤인가 소년을 더 끌어안고 있었다.
그 숨소리의 잔향마저 내 귓가에서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그러고 나서야 나는 조심스레 소년의 몸을 땅바닥에 눕혔다.
내 몸이 비틀거리며 일으켜졌다.
내가 어리석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지금껏 너무 미래에서 온 정보만 믿고 행동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그러다 보면 또 지나가 있을 것이라고.
그 합리적인 선택을 택하고 택해,도망친 말로가 이 꼴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머저리 같은 새끼,어째서 몰랐을까.
버리고 버려서 남는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를 악문 채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이 진자운동을 반복했다.살점 덩어리의 시체로부터 뽑아낸 손도끼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고개 숙인 채 걸음을 내딛던 나를,누군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이안.”
내 시선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제일 신뢰하는 참모,레토가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대략적인 사정은 이미 파악이 끝난 듯했다.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하겠는데…너 혼자서는 무리야.”
늘 그렇듯 그는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았다.
“미래에서 온 너도 여러 가지 계산을 거친 결과야.저 괴물을 당장 우리 전력으로 물리칠 수는 없어.물론 희생은 마음 아프지만,감수할 수밖에 없는…….”
“……레토.”
그러나 나는 실로 오랜만에,레토에게 들끓는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이미 내 눈가를 훑은 뒤였다.
말라붙은 눈동자에는 불그스름한 기운만이 얼핏 어려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토해내는 말들에는 절절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감정이었다.
나인지,적인지,혹은 이처럼 가파른 자리로 나를 밀어낸 운명인지.
다만 나는 이것이 후회로 남지 않을 선택이기를 바랐다.
“그 인간이라면 그랬겠지.”
그것을 마지막으로,나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나는 아니야.”
레토가 말릴 틈도 없이,땅을 박찬 내 몸이 고속으로 쏘아졌다.
날름거리며 세계를 핥는 불꽃조차도 나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공간이 압축되고 거센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저 멀리에서 시체 거인이 보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은 흉측스러운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이토록 높고도 두꺼운 벽이다.
감히 네가 운명에 저항할 수 있겠느냐고, 내게 묻는 듯한 위압감이었다.
문득 나는 언젠가 보았던 문장을 떠올렸다.
‘버릴 것은 버려라.’
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기를 찢는 파공성 사이로 흐, 하는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지랄하고 있네.”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아도,네드도,메이도,그 무엇도.
그것이 내가 선택한 운명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