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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71화 (271/649)

〈 27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4)

* * *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내 하나가 단신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앞을 수많은 살점 덩어리들이 막아섰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핏물이 터져 나오며 선혈의 궤적을 그렸다.

으깨고, 부수고, 때로는 타넘고.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치우며 나아가는데도 속도가 느려지는 법이 없었다.

일개 검사라기에는 너무나 인상적인 활약이었다.

아무리 익스퍼트에 이른 존재라도 한계는 존재했다.

‘마스터’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아닌 이상, 개인이 군단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체력과 마력에도 끝이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저 사내의 행보만큼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모든 생물은 자기보신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제 몸을 보전하는 법을 잘 알곤 했다.

그래서 개인이 군단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일격들을 피하고 반격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몸 하나 건수하기 위해서는 극심한 정신력의 소모를 동반해야 했다.

그런데 저 사내의 싸움은 어서 한계까지 다다르고 싶다는 식이었다.

제 몸뚱아리 따위는 어떻게 되든 좋다는 듯했다.

긁히고 찢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옷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고, 전신이 피투성이라 어느 곳에 부상을 입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피난 행렬의 실력자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안력을 돋우면 초인적인 시야가 확보된다. 그들은 일제히 사내의 질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 필사적인 사투에 감명을 받은 자도 있었다.

허나 대다수의 심경은 정반대였다.

“이런 미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였다.

레이놀드는 간만에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그만큼이나 그의 눈에 포착된 광경은 제 시력을 의심케 만들었다.

제정신인가.

레이놀드뿐만 아니라, 사내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의문이었다.

전투란 각오나 의지 따위로 승패가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만만한 세상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영웅담을 써내려갔으리라.

결정적인 순간, 정신력의 차이가 삶과 죽음을 가를 때도 있긴 했다. 고수들의 싸움은 본래 종이 한 장 차이로 결과가 달라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사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인간이 아니었다.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괴물이었고, 심지어 적은 하나도 아니었다.

곧 부활한 시체들이 몸을 일으킬 터였다.

그렇다면 살점 덩어리를 포함한 시체의 군단이 조직될 터였다. 결코 단신으로 대적할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이는 자살기도나 다름없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러고 있었다면, 레이놀드는 그 만용이나 비웃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 저 멍청한 사내가 이안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렬을 이끄는 실력자들이 걸음을 멈추니, 어느덧 피난민들도 걸음을 멈춘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저 멀리에서 핏빛이 번져 가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내 대략적인 사정을 눈치 챘다.

워낙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탓이었다.

누군가가 불가능한 업적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를 깨달은 피난민 사이에서, 그 불쌍한 도전자의 정체가 누구일지를 추론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둘째 도련님이 사지를 달리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나마 피난민들은 사내의 신분을 눈치 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그들과 달리,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이들은 곧장 반응을 보였다.

“주인님!”

애절한 부르짖음이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레이놀드의 옆을 수행하던 엘시였다.

그녀는 벌써 눈을 부릅뜬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기라도 할 태세였다.

레이놀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곳도 다르지 않았다.

“이안!”

성녀는 제 팔을 붙잡는 유렌의 손길마저 뿌리치고 걸음을 내딛었다.

유렌 또한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성녀의 낯빛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꼴이,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셀린은 아예 검까지 챙긴 채 땅을 박찰 태세였다.

그들을 말리는 이는 제국의 행정관 아서였다.

“……그만!”

머뭇거리고 있던 여인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칫했다.

그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아서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제정신입니까? 설마 저 싸움에 동참하고 싶다는 건 아니겠죠?”

“아니, 하지만 지금 저곳에서 주인님이……!”

“어차피 곧 돌아올 사람입니다.”

아서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확신은 설득력을 더하는 법이었다.

일행의 시선이 잠시 그를 향했다.

“이안 공자께서도 바보는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저 괴물에게 달려들고 있지만…….”

그러면서 아서는 슬쩍 시선을 어딘가로 옮겼다.

수십 미터가 넘는 거체가 쿵쿵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괴물은 도리어 도전자의 존재가 기꺼운 듯했다.

수백, 수천 개의 얼굴로 이루어진 머리가 단번에 광소를 터트렸다.

아서의 눈동자에 강렬한 공포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흉측스러운 생물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산 자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본능에 새겨진 반응이었다.

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곧 현실을 깨달으시겠죠.”

“아니라면요?”

어느덧 뾰족해진 성녀의 반문이었다.

늘 자애롭던 그녀는 사랑하는 사내가 관련되자마자 돌변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스산한 빛마저 스치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재차 아서에게 물어왔다.

“만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운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던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서는 그렇게 애원하듯 말을 이어갔다.

“도리어 우리는 이안 공자께서 도주할 때 안전할 수 있도록 도주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안 공자를 버리자는 소리가 아니라,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단 말이죠.”

“……이안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툭, 하고 던져진 한 마디였다.

아서의 시선이 그 발화자를 쫓아 움직였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이고 있었다.

셀린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 중 이안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안 오빠는 진심으로 보이는데요… 저러면 아무도 못 말려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물론 아서는 셀린의 말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뜨고 싶었다.

사실 이안이 용혈문자의 소유자만 아니었다면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책상물림의 학자였고, 위대한 포부나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을 지니고 있지도 못했다.

그저 평범한 행정관이었을 따름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침착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하스터 양, 혹시 지금 이안 공자님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십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셀린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일행 중에서는 오직 그녀만이 이안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실력으로 이안을 포착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던 탓이었다.

스스로의 모자람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듯해서, 셀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급격히 우울해진 셀린과는 달리, 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그렇지, 이 거리에서 이안 경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의견을 물어야 한다면… 레이놀드 경.”

레이놀드의 무심한 눈동자가 아서를 향했다.

그는 대마법사에 이른 강자였다.

당연히 이곳에서 가장 자세히 이안의 사투를 목도할 수 있었다.

엘시나 성녀 또한 대략적인 장면밖에 포착할 수 없었으나, 그만큼은 달랐다. 그의 눈에는 이안의 결의에 찬 표정까지 생생히 붙잡히고 있었다.

만일 성녀가 지닌 힘이 신성력이 아니라 마력이었으면 또 몰랐다.

그러나 성녀는 치료나 보조에 특화되어 있을 뿐, 본신의 힘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감각 강화 마법에 의존해 겨우 이안을 포착하고 있었다.

레이놀드는 잠시 고민하듯 시선을 던졌다.

이안은 어느덧 시체 거인과의 거리를 처음의 절반 이하로 좁힌 채였다.

아무리 봐도 도중에 포기할 것 같은 기세는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묘한 느낌이 있긴 했다.

혹시 노리고 있는 것이 있나?

지나칠 정도로 무모한 싸움방식이었고, 그렇다고 목숨을 버릴 만큼 자포자기한 얼굴도 아니었다.

레이놀드는 이 시점에서 깊이 고민했다.

이안의 노림수를 믿어볼 것이냐, 말 것이냐.

전자를 택한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는 것이 맞았다.

반대로 후자를 택한다면 이쯤에서 아서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 옳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안은 반드시 죽는다.

레이놀드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죽음을 두고 볼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온갖 세월의 풍파에 젖어왔었다.

희망이나 각오 따위는 그에게 있어 너무 낡은 화두였다.

그것은 레이놀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과 함께 잊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놀드는 라이넬라 가문의 사람이었다.

라이넬라 백작은 결코 이 시점에서 귀중한 전력을 투사하기를 원하지 않을 터였다.

가주의 뜻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본분이었다.

설령 이를 위해 사소한 거짓을 덧붙이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는 속으로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기로 부딪혀 본 모양입니다. 벌써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이는군요. 소수 정예를 파견해서 도주로를 확보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도주로를 확보해 주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는 논외였다.

영지도 잃고 가문도 암흑교단과 얽혀 있는 사내였다.

그 실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지만, 굳이 자살을 하겠다면 라이넬라 가문이 손해를 감수할 까닭은 없었다.

레이놀드의 진술에 여인들은 조금 누그러지는 기색을 보였다.

아서라면 몰라, 백전노장인 레이놀드는 얼핏 보기에도 믿을 만한 인물로 보였던 덕이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또 다시 반전될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직전까지 천천히 움직이고 있던 시체 거인이 느닷없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그 밑에 깔려 죽는 살점 덩어리가 수십이었으나, 시체 거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단지 달리고 달려서, 이안의 앞에 멈춰섰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주먹이 지반으로 내리꽂힌다.

운석 충돌과 비견할 만한 장면이었다.

일행들의 눈이 단숨에 부릅떠졌다.

“……주인님!”

엘시의 울부짖음과 함께 쿵, 하고 세계가 뒤흔들린다.

사내가 홀로 신화 속의 괴물과 대치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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