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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72화 (272/649)

〈 27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5)

* * *

핏물이 시야를 가린다.

내달리고 내달린 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눈보라와 시린 바람이 피부를 채찍처럼 치고 지나갔으나, 내 근육은 위축되는 법 없이 맹렬한 검격을 퍼부었다.

살점과 뼛조각이 비산했다.

내 검이 앞을 막아선 살점 덩어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옆에서 달라붙는 녀석에게는 손도끼를 먹여 주었다.

그리고도 다가오는 놈들이 있다면, 나는 검이 웅웅 울릴 때까지 마력을 밀어 넣었다.

오러가 들불처럼 타오른다.

찬란한 은빛이 세계에 직선을 연장시켰다.

그 오러에 닿은 살점 덩어리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양단된 신체 부위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며 불쾌한 꿈틀거림을 반복했다.

나는 그 잔해물을 팍, 하고 짓밟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숨은 한계까지 가빠진 뒤였다.

거칠게 몰아쉬는 공기가 차디찼다.

시야가 흐려졌고, 폐부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온몸이 삐걱대며 휴식을 강권했다.

복부의 상처?

이미 터져서 피로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다만 나는 비로소 국면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점 덩어리들이 내게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대신 쿵쿵거리며 울리는 지축의 흔들림이 거셌다.

나는 무릎을 짚은 채로, 헐떡이며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아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없이 많은 시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이었다.

꿈틀거리는 팔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시체 하나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 받는 영혼이 비명을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엑!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데없이 달려드는 꼴을 보아하니 귀족은 되지 못할 녀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나도 기품 있게 싸우는 법은 몰랐으니까.

이를 악물고, 핏발이 선 눈으로 공간을 도해했다.

기기괴괴한 궤적들이 시야에 새겨졌다. 나는 무수히 많은 실선들을 바라보며 안구의 통증을 감내했다.

조금씩 더 보이고 있었다.

숨결이 가팔라질수록, 몸이 울부짖을수록, 신경 말단 하나하나가 고통을 호소할수록.

점점 더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흐려진다.

더, 조금 더 훔쳐보아야 했다.

나는 전력을 다해 공간의 실선들을 쥐어뜯었다.

탁, 하고 끊어진 현처럼 선들이 제멋대로 튕겨 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쿵, 하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얼핏 저 멀리에서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무사했다.

시체 거인의 주먹은, 비상식적인 궤적을 그리며 내게서 빗나갔다.

아슬아슬한 차이였으나 상관 없었다.

숨만 붙어있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시체 거인의 손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허우적거리는 수백 개의 팔 중 하나를 붙잡고, 그대로 힘을 주어 재도약.

시체 거인의 팔 위에 오른 나는 계속해서 내달렸다.

물론 시체 거인 또한 얌전히 있지는 않았다.

수천 구의 시체로 이루어진 시체 거인의 팔이었다. 수천 개의 손들이 아우성을 내지르며 나를 붙잡으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검으로, 도끼로 팔들을 베어냈다.

그러고도 끝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시체들.

팔들이 뭉쳐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팔로 이루어진 별개의 팔이었다. 마치 나뭇가지가 분화되는 듯했다.

서너 개의 작은 팔이 교차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물망처럼 촘촘한 장애물이었다. 이대로 가면 돌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좌하단으로 검극을 떨어트렸다.

조금 더 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내린다.

하나같이 아픈 기억들뿐이었다.

누군가를 잃고, 빼앗기고, 증오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던 누군가의 일생이었다.

물밀 듯이 밀려드는 것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그날의 아픈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섭고 두려웠다.

사내의 악몽을 하나씩 엿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울고불며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그에게는 도망칠 자리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 또한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길을 부정하기 위해서.

은빛으로 물든 검신이 허공에 열상을 남긴 것은 그때였다.

무려 다섯 줄.

내 앞을 가로막던 시체의 팔들이 남김없이 찢겨나가며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엑!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처럼 재빠른 등반이었다.

나는 어느덧 팔뚝을 타고 올라 어깨를 향하고 있었다.

시체 거인과 처음으로 눈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수천 개의 얼굴이 나를 향하더니, 이내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킥킥킥킥!

노골적인 조소였다.

네 따위가 감히 날 어쩔 수 있겠냐는 듯한 웃음소리.

분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와 저 괴물의 객관적인 격차였으니까.

다만 나는 결의를 다졌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저 조소를 절규로 바꾸어 주겠다고.

어쩌면 저 얼굴 중 하나는 당장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무언가가 내 발목을 턱, 하고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내 발목 어림을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 발목을 붙잡으려던 손들은 모조리 검과 도끼로 베어나가던 참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팔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 발목을 쥐고 있는 손목은,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건틀릿을 쓰고 있어서.

“……이런 씨발.”

나는 급히 검을 들어 이어질 충격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내 앞에서는 시체의 해일이 일고 있었다.

시체 거인이 남은 손으로 나를 쓸어내려 들었던 것이다.

텅, 하고 강렬한 운동량이 나를 허공으로 퉁겨 냈다.

나는 일순 뇌리가 새하얘져 의식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몇 번이나 땅바닥 위를 튕기며 구르고 있었다.

쿨럭, 하고 내 입에서 한 웅큼의 핏물이 토해졌다.

죽을 것만 같았다.

이어질 일격에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이 절로 경련했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차가운 눈보라가 내 피부를 때렸다.

벌써 몸 위에는 눈이 쌓여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이미 여러 번 빈사를 경험한 몸은 진정한 안식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떠올렸다.

불타는 날의 기억을.

소녀가 죽었고, 소년이 죽었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 숨김없는 본심이었다.

어쩌면 사내가 꽁꽁 숨겨두었던 진심일지도 모르고.

나는 비척비척 기어, 가까스로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검에서 은빛 오러가 일렁이자 살점 덩어리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죽은 시체를 처리하고자 다가왔는데, 몸을 일으키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 틈에 나는 주머니에서 물약을 꺼내 쭉 들이켰다.

두근, 하고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며 지친 몸에 강제로 활력을 부여했다.

맹추위에 얼어붙었던 근육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검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아직 한참은 더 놀아야겠지?”

그래, 내가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검과 피의 윤무는 아직 한참 더 이어져야 했다.

퉤, 하고 내가 뱉어낸 핏물이 파문을 일으켰다.

**

“……당장 가야 해요!”

절규에 가까운 요청이었다.

성녀는 그렇게 소리를 높이며, 제 어깨를 붙잡는 유렌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저, 저러다 죽는다고요… 아니, 반드시 죽어요! 지금, 지금 당장 구출해야 한다고오!”

최후에 이르러서는 경어마저 잊어버렸을 만큼 필사적인 애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이안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아직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진작 쓰러져 죽어야 정상이었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저 멀리에서 보기에도 사내에게 가해진 일격은 무시무시했다.

악신의 권속과 단신으로 맞서는 싸움이었다.

당연히 간단할 턱이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안의 정신 이상을 의심했다.

그런데 단순히 미친놈이 저지른 짓치고는, 너무나.

“……처절하군.”

레이놀드의 촌평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은 물론이고, 피난민들조차 행진을 멈추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수백 쌍이 눈동자가 그 사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함부로 무어라 감상을 내뱉는 이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부수어져야 마땅한 몸을 이끌고 끝없이 전투를 속행하는 그 모습.

처음에는 비웃었고, 이후에는 경탄했으며, 이제는 괴기하다 느낄 지경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몇몇 마도병들이 으슬으슬 몸을 떨었다.

그만큼이나 귀기(??) 어린 전투였다.

그 침묵에 빠진 군중들 사이에서, 성녀 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것은 셀린이었다.

그녀는 곧장 이를 악문 채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엘시 또한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솔직히 말해 두려웠다.

저토록 처절한 싸움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전에도 살점 둥지와 격전을 치르긴 했지만, 그조차도 이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투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아프고 괴로울 터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주인님은 저 괴물을 상대로 꺾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엘시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얼핏 이대로 도망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대적할 수 없는 적이었다.

하물며 엘시는 이안처럼 강인하지도 못했다.

그와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운명을 타고난 것만 같았다.

태생이 나약한 인간이었던 엘시는, 이안 같은 강자에게 꼬리나 흔드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에게 애교나 부리고 재롱이나 피우며 귀여움을 받는 삶.

투견보다는 멋진 삶이 아닌가, 라고 자평하려던 그때.

'……사랑해 줄게요.'

어느 날 들었던 음성이 덜컥 엘시의 귓가를 스쳤다.

도망치면?

그제야 되돌아온 정신으로엘시는 사고했다.

내가 도망치면, 주인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으면 영원히 볼 수 없다.

그 사실이 엘시에게 무엇보다 선명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엘시는 난생 처음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무엇인지 깨우쳤다.

구해야만 했다.

엘시의 삶에서 둘도 없을 존재였다.

제 목숨을 바치더라도 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결의를 다지며, 엘시가 발걸음을 돌린 그 순간.

"……엘시."

언제나 그랬듯 추상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 하느냐."

레이놀드였다.

엘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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