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6)
* * *
엘시는 레이놀드가 무서웠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대개의 귀족 가문이 그렇듯이, 라이넬라 가문 또한 가주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무소불위의 위치에 있는 라이넬라 백작은 늘 경외와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이는 엘시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를 괴롭히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면서도, 엘시는 감히 라이넬라 백작에게 반기를 들 생각은 품지 못했다.
라이넬라 가문의 가솔들이 엘시를 향한 따돌림을 방관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라이넬라 백작의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엘시는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피해자인 엘시조차 라이넬라 백작에게 감히 반항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어느 누가 라이넬라 백작의 철학에 간섭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보답받을 수 없는 기대였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지금 뭐하는 게냐.”
그 유일한 예외가 바로 레이놀드 삼촌이었다.
가문의 단 둘밖에 없는 대마법사이자, 라이넬라 백작의 신임을 듬뿍 받는 친동생.
라이넬라 백작의 뜻에 반할 수 있는 이는 가문에서 오직 그뿐이었다.
레이놀드는 엘시와 루핀을 괴롭히는 형제자매를 볼 때마다 엄히 꾸중하곤 했다.
“너희가 하는 짓이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 짓인지 아느냐? 약하다고 괴롭혀도 된다면, 나도 너희를 얼마든지 괴롭혀도 되겠구나.”
“그, 그게 아니라요. 삼촌…….”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그가 가해자를 봐주는 법은 없었다.
엘시와 루핀을 괴롭힐 때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형제자매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이 죽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렇게 레이놀드를 보며, 엘시는 마법사의 꿈을 키웠다.
지금은 자그맣고 나약한 꼬맹이에 불과한 그녀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삼촌처럼 위대한 마법사가 되리라.
그러면 그녀를 비웃고 괴롭히던 사람들도 태도를 싹 바꾸어야 할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엘시에게는 남다른 재능과 독기가 있었다. 그 덕택에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꿈을 이루었다.
보다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다시는 반항할 수 없도록 상대를 짓밟아버리는 악마가 되어버렸으나, 엘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도리어 레이놀드에게 혼나는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시, 그만하거라.”
엘시가 한창 형제자매를 향한 복수에 열을 올릴 때 들은 꾸중이었다.
물론 그녀는 레이놀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당한 것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행동동기에 어긋난 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너도 라이넬라고, 그 아이들도 라이넬라가 아니더냐.”
그렇다면 그들은 라이넬라라고 봐준 적이 있단 말인가?
불쑥 그러한 분노가 솟구쳤으나, 엘시는 차마 레이놀드에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엘시는 아직 나약했고 둥지가 필요했다.
언제나 강하고 듬직했던 레이놀드는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를 등에 업을 수 있다면 라이넬라의 이름 따위 얼마든지 짊어져 주겠다고, 한때 엘시는 생각했었다.
그때의 결심이 설마 이러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지금 레이놀드는 그 무엇보다 높고 두터운 벽이 되어 엘시의 앞에 섰다.
엘시는 그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유년기부터 새겨진 공포였다.
“엘시, 다시 말하지만 가문의 뜻은 확고하다.”
또 다시 그놈의 가문.
처음에는 몸을 굳혔던 엘시였으나, 그녀는 이미 조급해질 대로 조급해진 뒤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인님을 구하러 가야 할 판이었다.
지금처럼 레이놀드와 다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결국 엘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가문의 웃어른을 상대로 쓸 만한 말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 답하는 레이놀드의 음색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짧고 담백한 말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논리로만 동작하는 자동인형 같았다.
“보다시피 가망이 없는 싸움이 아니냐… 가봐야 개죽음이 될 뿐이다. 난 내 조카가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대로 죽게 놔두라고요?!”
절절한 감정이 담긴 반문이었다.
엘시는 목청을 돋우며, 손가락으로 전장의 한복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직도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안이 위치하고 있었다.
당장 쓰러져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 핏빛 풍경을 눈에 담은 엘시의 목소리가 더더욱 높여졌다.
“삼촌은 몰라요, 주인님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왜 모르겠느냐.”
단 한 마디였다.
엘시의 말을 끊고 들어온, 흔해빠진 공감의 말.
허나 엘시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놀드의 낯이 퍽 쓸쓸해 보였던 탓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엘시조차도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지…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가문의 반대에 부딪혔고, 자괴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어라 반박이라도 해보려다가.
엘시는 그만 입술을 꾹 닫고 말았다.
난데없이 드러난 삼촌의 불행한 과거였다.
언제나 듬직하고 강인해 보이던 레이놀드였다. 아직도 그날의 상처를 품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과거를 털어놓는 그는 무척이나 슬프고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문을 떠났지, 자유를 찾아서…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가문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감정은 휘발적이고 핏줄은 영원히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래서 운명이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던 엘시에게, 레이놀드는 재차 단언했다.
그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 보거라. 저 괴물을.”
수십 미터에 이르는 체고를 지닌 거체였다.
그것이 발을 구르고 주먹질을 할 때마다 웅웅거리며 소음이 일었다. 지축이 뒤흔들리고 세계가 여진에 시달린다.
엘시의 눈에서 공포가 되살아났다.
“네가 간다고 해서 전황이 변하겠느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엘시는 5서클에 이른 우수한 마법사였지만, 아직 홀로 전장의 판도를 뒤집을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러려면 최소 6서클에 이르는 대마법사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도, 저 괴물은 6서클의 대마법마저 감당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엘시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다.
이대로 이안을 잃을 수는 없다는 듯, 엘시는 절박한 심정을 담아 애원했다.
“그, 그럼 마도병단을 이끌고 가면…….”
“그것 보거라.”
물론 레이놀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카의 간청에도 그는 차가운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또 다시 가문의 힘에 기대려 들지 않느냐, 엘시… 그게 바로 너다.”
잔인할 만치 담백한 진실이었다.
엘시는 멍하니 시선을 내리까는 수밖에 없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가문에만 기대는 왈가닥이 아니라, 이안과 함께하고 사랑에 빠지면서 한층 성장했다고 우쭐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했다.
지금도 엘시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홀로 가봐야 이안을 구출하거나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개죽음’.
레이놀드의 말대로 그저 개죽음에 불과했다.
엘시는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동안 이안과 쌓은 소중한 추억이 많았다.
수렵제에서 싸가지 없는 델핀을 누르고 우승한 기억.
고아원에서 이안에게 목숨을 구원받고, 그의 품에 안겨 전장을 누빈 기억.
이안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차여 루핀에게 화풀이를 했던 기억.
그리고 다음날 다시 이안이 그녀를 구해주었던 기억, 뒤뜰에서 사랑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
그 후로도 기억, 기억, 기억…….
이안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덧 이처럼 많이 쌓여 있던가.
그 수많은 추억들이 엘시의 가슴 위로 돌탑처럼 쌓여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엘시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뱉었다.
“……주인님은.”
레이놀드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감정의 파문이 일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엘시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인님은, 뭐라고 했는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놀드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결국 엘시는 짜증을 담아 외쳤다.
“주인님이 뭐라고 했다면서요! 약혼 제안했을 때, 뭐라고 말했냐고!”
레이놀드는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이를 전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레이놀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뜻은 어떠냐고 자꾸 묻더구나. 그래서 약혼은 당사자의 의견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말했는데, 뭐 어쨌단 말인가.
물기 어린 엘시의 눈빛이 짜증을 담아 쏘아졌다.
결국 레이놀드는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공자가 그러더구나. 네가 워낙 제멋대로라,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흐, 하고 엘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토해냈다.
워낙 제멋대로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이넬라의 이름을 등에 업은 이후로는 늘 가문의 힘을 빌어 패악질을 부려 온 엘시였다.
그 흔적이 이안의 뇌리에 남아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엘시는 ‘라이넬라’니까.
가문에서 길러낸 가장 우수한 투견에 불과했다.
이안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고, 엘시가 힘없이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엘시 선배.’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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