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7)
* * *
소녀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되짚어 보면, 이안이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라이넬라’라고 부른 적이 있던가?
델핀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들이 그녀를 ‘라이넬라’라 불렀다.
귀족에게 가문이란 정체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성으로만 호칭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단 한 번도 엘시를 ‘라이넬라’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때때로 호통을 칠 때나 이름에 붙여 성을 부를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엘시의 달아오른 뇌리가 단숨에 냉각되었다.
“……레이놀드 삼촌.”
엘시가 레이놀드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설득이 끝났다 싶어 고개를 돌리려던 레이놀드는, 또 다시 엘시에게 시선을 던져야 했다.
엘시는 생각했다.
이안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존재였다.
유일한 주인님, 유일한 사랑, 그리고 유일하게 그녀를 ‘엘시’로만 봐주는 사람.
레이놀드 또한 그러한 존재가 있었을 터다.
“……이제 잊었어요? 그 사랑했다던 사람.”
레이놀드는 그 물음이 꽤나 의외였던 듯했다.
그는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을 떼었다가, 닫았다가.
그렇게 몇 번이나.
레이놀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가까스로 짜낸 대답은 고작 한 마디에 불과했다.
“……그래.”
하지만 그 내용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서.
“푸흡, 아하하핫……!”
엘시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난데없는 태도 변화에 레이놀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조금 놀랐다는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레이놀드뿐만 아니라 대화를 엿듣고 있던 모두가 그랬다.
그러든 말든 엘시는 이제 배까지 잡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잦아드는 웃음소리의 끝에서, 엘시는 제 특기를 토해냈다.
“아하, 하하… 이 좆같은 꼰대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바로 욕설이었다.
주위의 온도가 몇 도나 내려가는 듯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무례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일단 가문의 웃어른이 아닌가.
얼마나 선을 넘은 망언이었던지, 그 레이놀드조차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을 정도였다.
“……뭐?”
“못 들었어요? ‘꼰대 새끼’라고 했잖아요, 삼촌.”
그러나 엘시는 이제 위축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녀의 음색에는 도리어 으르렁거리는 적의마저 흘러넘치고 있었다.
들끓는 분노의 표현이었다.
참다못한 레이놀드는 처음으로 목청을 높이려 했다.
“엘시, 그게 무슨 무례……!”
“아님 뭔데요?”
엘시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레이놀드는 그 노기등등한 기세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엘시의 목소리가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후회하고 있잖아요, 아직 잊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조카 보고는 그 후회할 짓을 저지르라고?!”
“……엘시.”
그 말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던지, 레이놀드는 숨까지 헐떡이며 답했다.
“어린 시절의 치기에 불과했다. 결국 가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너도 알잖느냐,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지랄하지 마!”
그러나 레이놀드의 설득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엘시는 제 품을 더듬거리며 패를 하나 꺼내 던졌다.
교차하는 두 개의 월계수 나무가 새겨진 금패.
라이넬라 가문의 직계를 상징하는 증표였다.
레이놀드는 넋을 놓고 그 금패를 내려다보았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가문의 증표를 소중히 여겨야 했다.
그것을 땅에 내팽겨친다는 의미를, 엘시가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엘시야! ‘라이넬라’가 아니라, ‘엘시 라이넬라’라고! 어린 시절에 개처럼 얻어맞으며 자랐고, 그 후로도 개처럼 순종했잖아……!”
오랜 시간 농축된 아픔이 끓어오르는 분노로 토해졌다.
그 절절한 감정의 파도에 레이놀드는 입만 뻐금거려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젠 사랑하는 사람도 버리라고?!”
“……엘시.”
가까스로 짜낸 부르짖음이었다.
엄숙한 목소리를 가장하는 레이놀드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슬퍼 보이기도 했고,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했으며, 일견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감정 표현이었다.
그는 나지막히 최후통첩을 날렸다.
“개죽음이다.”
푸흐흐, 하고 엘시는 허망한 웃음을 터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개죽음’이라고?
이 얼마나 웃긴 말인가.
어차피 개로 살다 죽으면, 모든 죽음이 개죽음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투견으로 살다 죽으나, 이안을 구하다 죽으나.
어느 쪽이든 ‘개죽음’이라면야.
엘시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멍!”
양손을 강아지의 앞발처럼 꺾으며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이 조롱의 의미라는 것을 모를 만큼, 레이놀드는 멍청하지 못했다.
엘시를 지켜보던 그의 눈빛이 망연해졌다.
그러든 말든, 엘시는 애교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선언할 뿐이었다.
“엘시는, 이안 주인님을 모시는 충성스러운 애완견이에요! 그러니까…….”
뒤이어 그녀는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죽든 말든, 신경 꺼요. 이게 내가 정한 운명이니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엘시는 곧장 셀린을 쫓아 달음박질을 쳤다.
어차피 그녀는 마법사였다. 멀리서 화력 지원을 하더라도 전력 손실은 없었다.
조금 늦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 폭풍과도 같은 말싸움 끝에 남은 것은, 우두커니 선 레이놀드와 땅에 떨어진 라이넬라 가문의 금패뿐이었다.
다들 침묵 속에서 레이놀드의 눈치를 살폈다.
성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페르쿠스 영지에 집결한 무수한 전력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였다.
여러모로 그의 심기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던 레이놀드는, 몇 분이지나고 나서야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저벅 걸어, 그는 허리를 굽혔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땅바닥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금패가 떨어진 자리.
그는 조심스레 그 금패를 손에 쥐면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어린 시절 형님을 똑 닮았다며, 레이놀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나 그의 말이 옳았다.
가문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라이넬라 백작의 성깔에, 레이놀드의 방랑벽까지.
누가 봐도 엘시는 라이넬라의 적통이 아닌가.
레이놀드는 그렇게 달음박질을 치는 엘시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국의 행정관 아서가 그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다들 미쳤군요…….”
아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낯빛이었다.
어느새 성녀도 유렌을 뿌리치고 전장으로 향한 뒤였다.
“어, 어떻게 저딴 괴물에게 달려들 생각을 할 수 있죠?! 이건 집단광증입니다! 다들 상담이 필요한 상태에요!”
그는 이제 공포와 불안에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보였다.
호위는 아무리 있어도 부족한데, 벌써 주요 전력 중 다수가 이탈하고 말았다.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제 목숨을 최고로 여기는 평범한 소시민, 아서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놀드에게 말을 건넸다.
“우, 우리끼리라도! 우리끼리라도 어서 대피합시다… 피난민들도 남아있고, 시체도 일어날지 모른다고……!”
“안 됩니다.”
일언반구의 반박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음색이었다.
그 느닷없는 선언에 아서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불신을 담아 재차 물어야 했다.
“아, 안 된다고요?”
“네, 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되물어도 레이놀드의 답변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아서로서는 뜬금없이 든든한 아군을 잃은 셈이었다.
결국 아서는 참지 못하고 벌컥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하, 하지만… 하지만 분명 방금 전까지는 개죽음일 뿐이라고……!”
“행정관.”
흔들림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덜덜 떨리는 아서의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레이놀드의 푸른 눈동자가 흘깃 그를 향하자, 아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수많은 실전을 거친 자의 눈이었다.
심약한 학자가 당당히 마주할 만한 눈은 아니었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하는 법이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작은 라이넬라가 제 운명을 정했구려.”
어느덧 존대가 낮아져 있었으나, 아서는 감히 이를 두고 불평을 내뱉지는 못했다.
도리어 레이놀드가 하대를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구도였다.
제국의 행정관이라도 아서는 평민이었고, 레이놀드는 고위 귀족이었으니까.
공대를 갖춰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대신 아서는 애원하듯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을 뿐이었다.
“제발, 레이놀드 님… 이성을 되찾으세요. 저 괴물을 어떻게 이깁니까! 라이넬라 백작께서도 전력을 온존하라고……!”
“그럼 내 조카를 이대로 죽게 두란 말이오?”
싸늘하기 그지없는 음색이었다.
옅은 살기마저 어린 그 반문에, 아서는 심장이 덜컥 멈추는 줄만 알았다.
그는 곧장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도 이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레이놀드는 아서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제야 흥미가 식었다는 듯, 레이놀드는 아서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위에 시립해 있던 마도병단을 소집했다.
“다들 주목, 지금부터 우리는대단위 마법진의 준비에 들어간다…우선은 저 괴물을 묶는 데 중점을 두고, 그 사이에 이안 공자와 엘시를 비롯한 사람들을 구출하도록 하지.”
레이놀드의 지시에 화답하는 마도병단의 목소리는 우렁차기만 했다.
레이놀드 또한 저 괴물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마도병단이 총력을 다한다면 저 괴물을 얼마간 묶어둘 수는 있을 터였다.
그 틈에 레이놀드와 몇몇 실력자가 나서서 이안과 엘시를 구출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려던 레이놀드는, 문득 제 손에 걸린 라이넬라 가문의 금패를 내려다보았다.
"……운명이라."
과연 이안은, 그리고 엘시는 페르쿠스 영지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레이놀드는 저도 모르게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참전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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