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8)
* * *
어느덧 전장에는 전력들이 속속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진작 뛰쳐나간 셀린은 살점 덩어리와 혈투를 벌이며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폭음이 울릴 때마다 살점과 핏물이 비산했으나, 이안과 달리 그녀의 질주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실력의 격차가 명확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셀린은 여전히 필사적인 낯빛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이 이미 정리한 바 있는 길이었기에, 셀린의 목숨이 위태로울 일은 없어 보였다. 다만 남은 적들이 조금 질척거릴 뿐이었다.
반면 엘시는 그다지 먼 길을 걸어갈 까닭이 없었다.
도리어 마법사는 넓은 시야를 확보할수록 좋았다. 애초에 원거리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것이 마법사의 본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속 영창에 특화된 전투마법사도 다르지 않았다.
여태껏 엘시는 근거리에서 급변하는 전황에 일일이 대응해 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보다 강력하고 광범위한 마법의 시전이 가능했다.
그래봐야 저 ‘시체 거인’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엘시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주머니에 담긴 물약병을 만지작거렸다.
불가능해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럴 각오로 시작한 싸움이었으니까.
그리고 엘시보다 먼저 뛰쳐나갔으나,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바로 성녀였다.
물론 이는 순전히 그녀를 끈질기게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던 탓이었다.
성녀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이후, 그녀를 몇 번이고 가로막고 붙잡는 사내가 있었다.
성녀의 호위기사 유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렌 따위 무시하고 떠나고 싶었으나, 성녀는 사제였고 유렌은 검사였다. 신체능력에서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성녀는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유렌, 당장 안 비켜요?! 이러다 이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도 죽고 나도 죽는…….”
“누님… 제발 이제 그만 좀 하세요.”
그러나 유렌은 끝까지 성녀의 앞을 틀어막았다.
절대로 성녀를 보낼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야 당연했다.
그는 호위기사였고, 성녀의 안위를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전장으로 성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신성력도 다소 떨어진 위치에서도 전달이 가능하긴 했다.
전투 보조를 위해 굳이 대상과 근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치료는 아니었다.
치료는 부상의 상세한 위치와 상태까지 고려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이었다. 이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성녀가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는 쪽은 이안의 목숨이었다.
사랑하는 사내가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후방에서 멀뚱멀뚱 서 있을 만큼 성녀는 인내심이 많지 못했다.
도리어 그녀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유렌, 명령이야. 지금 당장 비키지 않으면 후일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
“네네, 회부하시고요… 누님, 저라고 이안을 구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유렌은 그렇게 말하며 답답하다는 눈빛을 했다.
그러든 말든 성녀가 흘깃거리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더욱 애절한 어조로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는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가 다르잖아요. 다른 사람들이야 죽으면 그만이라지만, 누님이 죽으면요?"
그제야 성녀는 움찔하며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
불만이 가득한 연분홍빛 눈동자가 유렌을 쏘아보았다.
유렌은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 도도하고 만사에 쌀쌀맞던 누님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니.
경의를 표해야 할지 분노를 표해야 할지 헷갈렸다.
다만 유렌은 그의 임무에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성녀의 죽음이 불러올 정치적 여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당연히 천신교의 신도들도 많은 혼란을 겪어야 할 테고요…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쳐야 할까요.”
“……그래서?”
“누님만큼은 이러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렌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
성녀조차 살짝 눈을 흘길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유렌은 드디어 성녀와 말이 통하는 기미가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체 없이 유려한 말솜씨를 이어갔다.
“누님, 공과 사를 구분하세요… 원래 누님이 잘하던 일이었잖아요. 손익을 계산해서 정무적 판단을 내린 것.”
성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이 저 멀리에 선 시체 거인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첫사랑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성녀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혹여 성녀가 당장이라도 그를 뿌리치고 도망칠까 봐, 유렌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먼 옛날의 이야기까지 소환해야 했다.
“약속했잖아요, 우리 같은 고아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로… 누님, 저는 아직도 그 약속을 믿고 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유렌.”
성녀의 나지막한 한 마디였다.
유렌은 그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직감했다.
아, 이건 안 되겠구나.
“저 괴물의 정체가 뭐지?”
“……악신의 권속이죠.”
“그런데 천신교의 성녀와 그 호위기사는 꽁무니를 빼고, 정작 천신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내가 저 괴물과 맞서 싸워?”
유렌은 무어라 반박이라도 해보려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더는 성녀의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성녀는 괴로운 낯빛을 한 유렌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순명(??)하렴.”
그것이 천신이 내린 사명이니까.
결국 유렌은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며 읊조렸다.
“……임마누엘.”
“내가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너도 전력을 다해.”
성녀는 그러면서 다급히 걸음을 내딛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녀는 뇌의 혈관이 헝클어지는 듯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안을 구할 수 있을까.
지금껏 밥 먹듯이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몸이었다.
신물이 남아있긴 해도, 당장 패색이 짙은 전투를 뒤집을 수단은 생각나지 않았다.
유렌이 마지막으로 성녀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성녀가 이제 살기마저 어린 눈빛으로 유렌을 째려보려던 찰나.
“……그렇게 이안을 구하고 싶습니까?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렇게 묻는 유렌의 목소리는 진중하기 그지없어서.
성녀는 잠시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자 유렌은 재차 성녀에게 물었다.
“누님,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이안을 살리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해요. 누님에게 그런 각오가 있냐고요.”
“……있어.”
망설임조차 없이 내뱉어진 대답이었다.
유렌은 잠자코 성녀를 노려보았으나,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마침내 그는 혀를 쯧, 하고 차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성녀가 받아든 그 물건은, 핏빛의 구슬이었다.
그 정체를 깨달은 성녀가 경악성을 토해냈다.
“혈정(血?)?! 유렌,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그걸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까? 지금도 당장 써버릴 생각 만만이잖아요.”
유렌의 툴툴거림에 성녀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히죽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당연하지.”
시체 거인을 막아설 수 없다고?
혈정쯤 되는 제물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천신의 가장 사랑받는 처녀이자, 최고의 사제 중 하나였으니까.
이안을 구할 수 있다.
그 안도감에 성녀는 탈진해서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성녀의 모습을 보며 유렌이 툴툴거리는 줄도 모른 채.
“아, 진짜 안 되는데… 이러다간 또 다시 정치적 입지가 위태…….”
쿵, 하고 지반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흔들리는 땅을 딛고, 성녀의 황망한 시선이 전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충격파에 날아가 땅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성녀는 곧장 제정신을 되찾았다.
“……이안!”
그리고 허겁지겁 내달리는 성녀를 보면서, 유렌은 혀를 차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처럼 굴더니.
늦은 첫사랑이 무섭다는 소리가 있던데,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유렌이 땅을 박찼고, 성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던 살점 덩어리 둘의 몸에 무수한 실선이 새겨졌다.
그리고 폭발하듯 터져 나가는 살점과 핏물.
마치 빛이 번뜩이는 듯한 쾌검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사내가 전장에 핏빛 궤적을 새기기 시작했다.
**
그러나 모든 이들이 상황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시체 거인의 뒤편에서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작은 산에 필적하는 거체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탓이었다.
그래서 유르니다 가문의 사병들은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짧은 행렬이라면 몰라, 일천에 이르는 병사를 이끄는 행군이었다.
빠른 속도로 행군을 하더라도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세리아나 알렉스 같은 지휘관이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세리아나 알렉스 중 하나가 먼저 뛰쳐나가 전황을 파악했다면, 세리아가 이토록 경악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전장의 중심을 목도하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리아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 으, 아… 이, 이안 선배가…….”
전장을 가리키는 세리아의 검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반면 알렉스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었다.
“과연 또라이 공자십니다. 저 또한 젊은 시절에는 저토록 불가능한 싸움조차 피하지 않았던…….”
“이안 선배가 죽기 직전이잖아요!”
물론 알렉스의 너털웃음은 세리아를 조금도 안심시켜 주지 못했다.
세리아는 만신창이가 된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제 손톱을 깨물었다.
그러나 세리아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하늘에서도 묘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시체 거인이 한 차례 비명을 내질렀다.
괴물의 전신에 퍼져 있는 입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며 괴성을 토해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흉측한 광경이었으나, 그것이 불러온 결과는 더욱 참혹했다.
비틀거리며 찢겨진 시체들이 몸을 일으킨다.
제 몸뚱아리를 찾지 못한 신체 부위는 펄떡거리며 애처로운 자아표현을 반복했다. 개중 대부분은 살점 덩어리가 달려들어 먹어치웠지만 말이다.
일정 크기 이상으로 커진 살점 덩어리는 비명과 함께 반반으로 갈라졌다.
살점 덩어리가 증식하고, 한때 이웃이었던 시체들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시체 거인은 그 울부짖음이 교향곡이라도 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수백, 아니 수천이 넘는 적들에게 둘러 쌓인 전장의 핵.
그곳에서 사내 하나가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사그라지지 않는 전의를 증명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이대로 졸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투의 열기는 비로소 절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