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9)
* * *
전장은 고요했다.
온갖 색감들이 거무죽죽한 핏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때때로 시체 거인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구를 때면 지축이 뒤흔들렸다.
사실 조용하지는 않을 터였다.
살점 덩어리들은 여전히 흉측스러운 입을 주기적으로 벌렸다. 시체 거인 또한 얌전히 있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날붙이가 살점을 헤칠 때마다 들리던 구슬픈 절삭음조차도 없었다.
단지 귀가 멀어버렸을 뿐이었다.
삐 하는 이명만이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지도 꽤 한참이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엠마가 준 물약을 먹어도 몸뚱아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엠마의 신신당부를 어기고 또 한 병을 마셨는데도 그랬다.
울컥, 하고 핏물을 뱉어내자마자 또 하나의 살점 덩어리가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눕혀 채찍처럼 날아든 팔을 피해냈다.
그리고 찌르듯 내뻗어지는 또 하나의 팔을 붙잡고, 곧장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메치기.
쿵, 하고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이나 도끼로 벨 때는 일일이 박살내 주어야 했는데, 이처럼 성국의 유술을 사용하니 간편했다.
본래라면 저토록 무거운 괴물을 들기도 힘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헐떡이며 숨을 고를 때마다 파편처럼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바늘처럼 뇌리를 찌르는 감정의 홍수들이 사고를 달구었다.
죽이고 싶다.
난데없이 불쑥 솟구친 욕구였다.
모든 것들이 밉고 싫었다. 적의를 표하는 이들이면 모조리 죽이고 싶었다.
들끓는 살의가 어느 사내가 지나온 삶의 길을 증언했다.
죽이고 싶었는데, 죽이지 못하고.
죽여야 했는데 죽이지 않았다.
잔혹한 후회가 심장을 너절하게 베고 지나갔다.
그에게 버림이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러지 않으면 더 소중한 것을 버리고 후회해야 했다.
살기로 물든 숨소리가 보다 거칠어졌다.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그때였다.
시체 거인이 나를 짓밟으려 들고 있었다.
지금껏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나는 곧장 몸을 날려 피해냈다.
공간을 굴절시키고 싶었으나 마력이 없어 여의치 못했다.
땅으로 던져진 내 몸은, 이내 막대한 충격파로 또 한 번 붕 떠올랐다.
그리고 데구르르 굴러 핏물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죽겠네.”
문득 떠오른 감상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다.
여태껏 수많은 사선을 넘었으나 이만한 전투는 처음이었다.
점점 더 기술은 날카로워지고, 마력은 기묘한 활기를 띠며 나를 부채질했다.
전신에 마력이 메말라 가고 있는데 아직도 오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편안해질 것이다.
세계 멸망이고 뭐고 죽고 난 다음에 벌어지면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렇게 소시민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의아하게도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신음을 흘리며 땅에 검을 박았다.
바람이 찼다.
핏물에 젖은 눈발은 밟을 때마다 철벅이며 끔찍한 감촉을 전달했다. 그래서 나는 눈보라에게 고마웠다.
그러한 감촉이라도 없었다면, 살아있다는 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체온이 떨어질 때마다 감각이 하나씩 흐려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느껴지던 피비린내마저 이제 희미했다.
어느덧 내게로 살점 덩어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을 더듬거리며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이제 잔챙이들을 상대할 체력은 없었다.
팍, 하고 빛살처럼 쏘아진 손도끼가 기괴한 궤적을 그렸다.
첫 번째 희생양은 내 정면으로 달려들던 살점 덩어리였다.
인중을 파고든 도끼날은 은빛의 오러로 물들어 있었다.
살점 덩어리를 양단한 손도끼가 좌로, 그리고 우로 한 번씩 틀어박히며 도합 세 마리의 살점 덩어리를 쓰러트렸다.
정중동의 묘리.
이제는 궤적을 두 번이나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을 채색하는 것은 음울한 색조였다.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내 정신을 뒤흔들었다.
우는 사내의 그림이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게 된 사내의 모습이.
나는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살점 덩어리 하나가 달려든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팍,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오며 살점 덩어리가 고꾸라졌다.
그러고도 한 마리가 남아있어, 나는 휘청이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굳어버린 근육을 강제로 일깨우자 맹렬한 통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고, 또 한 번 횡으로 그어지는 검격.
살점 덩어리가 쓰러지며 남은 것은 시체 거인뿐이었다.
시체 거인은 무척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굽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개미를 관찰하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나를 오시하는 그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핏물을 뱉어내며 웃었다.
“……그렇게 대가리 박고 있어라.”
그래야 모가지 따기가 편하니까.
나는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며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시체 거인은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손바닥으로 나를 찍어 누르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몸을 던지고, 튕겨내듯 몸을 일으켜 시체 거인의 손바닥을 피해냈다.
쿵, 쿵, 연달아 두 번의 충격파가 내 주변을 휩쓸었다.
나는 그 충격파를 거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몸을 밀치는 힘에 그대로 올라타, 시체 거인의 발 위로 섰다.
암벽등반이 시작됐다.
콱, 하고 손도끼를 내리찍고, 검을 지렛대 삼아 나는 시체 거인의 무릎까지 올라섰다.
무수한 다리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를 팍팍 차댔다.
그럴 때마다 핏물이 줄줄 흐르고 팔이 바들바들 떨리긴 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등반을 계속했다.
시체 거인이 귀찮다는 듯 손으로 나를 쳐낼 때까지는 그랬다.
나는 또 다시 튕겨나가 맥없이 땅 위를 굴러야 했다.
이제는 의식을 잠시 잃는 일조차 없었다.
애초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려져 있던 탓이었다.
나는 흐려진 눈으로 흐릿한 호흡을 반복했다.
뱉어진 숨결이 새하얀 김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근원적인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야 이유라면 많았지만, 점차 흐려지는 정신으로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무심코 눈을 감으려던 찰나.
“……이안 페르쿠스.”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번쩍 나를 일깨웠다.
“세상을 구해라.”
헐떡이며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쩌렁쩌렁 이명을 깨고 귓전을 울렸다.
쓰러지고, 도망치고 싶어도 절대로 그럴 수 없었던 저주와도 같은 약조.
그랬구나, 하고 나는 흐, 하고 웃으며 검을 지반에 처박았다.
나도 약속을 하나 했었다.
나의 어린 벗에게 모두를 지키겠노라고, 모두가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무너져 내릴 수는 없었다.
내 눈동자에 새파란 광증이 서렸다.
시체 거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한 차례 웃음을 터트리더니, 지금껏 들어본 울음소리 중 가장 커다란 절규를 터트렸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러자 시체들이 일어섰다.
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위에서 죽고 쓰러져야 했던 피난민들을 전부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아는 얼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나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붉어진 눈동자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지만.
그야말로 악취미였다.
새로 나타난 적들을 말없이 응시하며,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그때.
“……빛이여, 범람하라!”
얼핏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단숨에 땅바닥이 새하얗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막 일어선 시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엑!
감전된 시체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정신이 멍했던 터라 자세한 사정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이것이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내달려 시체 거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시체를 일으킨 시체 거인의 몸은 이전과 달리 잠잠하기만 했다.
시체 거인은 설마 빈틈을 노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서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껏 당하기만 했던 나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검과 손도끼를 교차해 가며 거체를 등반했다. 이윽고 나는 시체 거인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수백 개의 얼굴로 이루어진 시체 거인의 머리를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도끼로 일단 그 흉측스러운 낯을 으깼다.
키엑, 키엑, 키에에에엑!
머리를 하나둘씩 으깨기 시작하자 시체 거인은 처음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악착같이 매달려 손도끼를 휘둘렀다.
핏물과 살점, 그리고 박살난 두개골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죽어라.
나는 기원이라도 하듯 그렇게 빌면서, 악에 받쳐 손도끼를 휘둘렀다.
제발, 그만 죽어라.
이만하면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버텨 이곳까지 올라섰다.
한파는 이미 뼈의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통각이 느껴졌다. 얼음 조각이 관절 부위에 낀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근육은 납덩이처럼 굳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핏물이 울컥울컥 토해지고, 폐부도 비명을 내지른 지 한참이었다.
낯선 사내의 기억 때문에 정신력도 이제 한계였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포기하지 못하고, 손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케엑, 켁, 케겍, 키에에에에에에엑!
무자비한 도끼질에 어느덧 시체 거인의 머리가 꽤 파여 있었다.
비틀거리며 몸부림치던 시체 거인은, 제 손으로 제 머리를 통째로 긁어냈다.
그 무지막지한 악력에 머리의 삼분지일이 으깨지며 시체가 떨어져 내렸다.
나 또한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다.
내 몸도 우수수 떨어지는 시체들과 함께 튕겨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철퍽, 하고 내 몸이 먼저 떨어진 시체들과 충돌했다.
그리고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시체들이 내게 충격을 가했다.
팍, 팍, 팍.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숨이 막혔다. 어느덧 시야까지 틀어막힌 채였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이 뻔했다.
나는 전력을 다해 검을 위로 그어냈다.
다섯 줄의 은빛 실선이 솟구치며, 시체의 산이 폭발했다.
다소 무리했던 터라. 나는 희미해진 시야로 시체 거인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보였다.
꿈틀거리며 어느덧 수복을 끝마쳐 가는 시체 거인의 얼굴이.
괴물은 내게 일격이라도 허용한 것이 무척 화가 나는지, 쿵쿵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나는 비틀거리다 다시 엎어져야만 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그 분노에 가득 찬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흐, 하고 웃음이 터트리고 말았다.
아직도 부족했나?
조금만, 조금만 더 보면 답이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미세한 경계선을 마지막까지 넘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 기억만큼은 열람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처럼.
죽어야 정상이었다.
엠마의 물약으로 억지로 목숨줄을 연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몸은 이제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였다.
눈보라가 점점 더 거세졌다.
이제는 태양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검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내 몸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핏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며 뚝뚝 떨어졌다.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다가, 결국 무릎을 꺾었다.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제 정녕 끝이란 말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옆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다가오는데도 그랬다.
얼핏 보기에도 살점 덩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누가, 내가 그러한 의문을 품었을 무렵.
흩날리던 눈발이 정지했다.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시간이 일순 정지해 버린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벅거리며 이어지는 발소리.
내 눈이 서서히 그 발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마치 유령처럼, 사내 하나가 멈춘 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모습을 한 사내였다.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일순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사내는 극도로 피로한 눈빛을 한 채로,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았다.
그가 말했다.
“……머저리 같은 짓을 하셨군.”
씹어뱉듯이, 나무라는 투로.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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