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77화 (277/649)

〈 277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0)

* * *

거센 눈보라가 세상을 무채색으로 물들였다.

흩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회색으로 채색했다. 저마다의 색조를 가진 사물들은 새하얀 눈으로 덧칠됐다.

그 흑과 백의 세계 속에서, 사내의 금빛 동공은 마치 도깨비불처럼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가 조화를 이루었다. 무척이나 피로한 낯빛이었으나, 그 타오르는 눈동자는 묘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무수한 사연을 숨긴 이의 모습이었다.

대략 20대 중후반쯤 될까.

외양만 따지자면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특유의 분위기가 그를 퍽 늙어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사내는 무감정하다 못해 조금쯤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만족하나? 멋대로 고집을 피운 결과가, 이따위라서?”

“……아니.”

기묘한 감각이었다.

사내를 마주치자마자 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승부욕이나 열패감.

동정이나 연민.

그리고 분노와 아집.

나는 그 미증유의 소용돌이를 입김으로 토해냈다.

어느덧 내 머리와 어깨 위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고개를 비틀고, 숨결을 토해낼 때마다 퍼석거리며 떨어질 만큼.

눈보라와 함께 대화가 이어졌다.

“아직, 죽지 않았어.”

“말 그대로 ‘아직’일 뿐이지.”

내 고집스러운 말에 사내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 싸늘한 조소마저 조롱하는 기색이 희미했다.

“이대로 가면 넌 죽어… 아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래서 나타나셨나?”

내 질문에 정면을 향하고 있던 금빛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했다.

몇 번을 보아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나는 헐떡이는 대신 이를 악물며 물었다.

“……날 조롱하고, 늘 그랬듯 무대 위로 올라서 ‘짠’ 하고 해결해 주려고?”

“안타깝지만, 불가능해.”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말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거센 눈보라조차 그 거대한 그림자를 숨기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참이나 그 괴물을 응시하고 있다가, 그는 새하얀 입김을 토해냈다.

시간이 정지한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느 누가 멋대로 날 호출한 덕에 말이지… 물론,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악신의 권속을 해치우는 것은 논외야. 내가 간섭할 수 있는 한도를 넘었거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애초에 그의 조력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번에 불려온 이후 ‘불가능’이라도 친절히 통보해 주지 않았던가.

나 또한 그리 양심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하필 그의 조언을 어긴 대가를 치르고 있는 와중이었다. 하필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려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대한 숨을 골랐다.

“그럼 어째서 나타난 거지? 그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남의 기억을 열렬히 훔쳐보는 녀석이 있길래.”

후우, 하고 새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애송아. 미래의 기술을 훔쳐온다는 건 만능이 아니야.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지.”

이제는 내가 침묵할 차례였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내 실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때마다, 그리고 배운 적도 없는 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할 때마다 그랬다.

내 심신은 점점 더 내 통제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격정에 몸을 맡겨 날붙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나도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읊기도 했고.

어느새 하나둘씩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선 저 굳건한 벽조차도 그렇지 않은가.

악신의 권속은 운명처럼 이곳에 섰다.

나의 고향과, 이곳에 남아있는 수많은 영지민들을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서.

더불어 사내의 기억을 훔쳐보기 위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접합해야 했다.

이를 위해 내 몸뚱아리는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였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다시 치료가 가능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의 침묵이 길어졌고, 사내는 이를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그는 마치 지명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양 그렇게 말했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그에게 후퇴는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있다고 해도 수치와 오명을 감내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사명이 있었으니까.

사내는 그것이 괴로운 선택인 줄 알면서도, 내게 재차 권유했다.

“누차 말했지만, 네 힘으로 저 괴물을 쓰러트릴 수는 없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 할 조치는 끝내두었으니, 영지만 포기하면 돼.”

“아직 남은 영지민들이 있잖아.”

내 들끓는 반문에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티끌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미 늦었어. 벌써 수십 명은 죽었을 거다.”

“……남아있는 사람도 많고.”

“그리고 곧 그마저도 죽겠지.”

닳고 닳은 심장을 지닌 사내의 말이었다.

스러질 생명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말을 이어갔다.

“슬픈 이야기지만, 모든 목숨은 동등하지 않아. 누군가의 목숨은 때때로 수백의 목숨보다 더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예를 들어, 네가.”

나는 그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낯빛에서는, 처음으로 흐릿한 감정이라는 것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사내는 재차 힘주어 내게 물어왔다.

망치로 정을 치듯이.

“네가 죽으면, 세상은 누가 구하지?”

정을 맞은 바위처럼, 내 가슴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몇 번이고 재생되었던 사내의 기억을 떠올렸다.

‘세상을 구해라.’

나는 이제야 사내를 조금 이해했다.

그는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다.

아직까지 자세한 사정은 불분명했다.

그 애절한 이별의 순간들마다 흐릿한 잡음이 끼어 있었던 탓이었다.

내가 온전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은 오직 하나, 불타는 숲의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악몽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내는 버리고 싶지 않았고, 그런데도 버려야 했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부닥쳐 얻은 삶의 지혜였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할 뿐이라고.

어느덧 나는 사내의 사고방식을 체화하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다.

“너와 내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짧아. 시간이 정지한 듯 보이지만, 이건 네 무의식 속의 풍경이라 그런 거다. 혹시라도 억지로 움직인다면…….”

그래, 멍청한 짓인데도.

나는 온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려다가, 무너지고.

미끄러지고, 시체 더미 위에 파묻히고, 피 웅덩이에 빠져 혀에서 불쾌한 비린 맛이 느껴졌다.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근육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이 절규하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몸뚱아리가 휴식을 간원했다. 악물은 잇새로 차마 참을 수 없던 신음들이 토막 나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폐부가 찢어진 것인지 기도에서 흐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핏물이 눈꺼풀을 파고들어 시야마저 흐릿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한파와 만나 새하얗게 파도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 건 내가 몸을 일으킨 직후였다.

“……애송아.”

이제는 옅은 짜증마저 섞인 목소리였다.

“말했잖아, 네가 죽으면 세상은 누가…….”

“……그럼 저들은?”

느닷없이 내뱉어진 반문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묘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피 웅덩이에 얼핏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피투성이에, 옷 위로 눈까지 쌓여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눈동자는 아직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 저들은, 누가 구하지?”

전장에는 불탄 시체들이 수두룩했다. 아니, 전장을 벗어나면 더 많을 터였다.

그리고 아직도 살려달라며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사내는 여전히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만 침묵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흐, 하고 웃으며 비로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고작 걸음을 내딛는 것뿐인데도 무척이나 힘에 겨웠다.

그만 무릎이 꺾여 또 다시 넘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그 처량한 꼴을 보며, 사내는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은 답이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나는 비틀거리다 그만 무릎을 땅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시린 통증이 뼈를 타고 올라왔다.

더는 다리에 힘이 남아있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또 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네드랑 그렇게 약속했거든.”

내 대답에 사내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는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에야 픽,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었다.

사내의 질문이 이어졌다.

“고작 어린 시절의 허세 때문에?”

“……그러는 당신은 뭘 구해냈지?”

그에 나는 도발적인 반문을 돌려주었다.

그 한 마디에, 사내의 분위기가 대번에 싸늘해졌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하나씩 버려 가서, 도대체 뭐가 남은 거야? 그러고 나니 세상은 평안하던가?”

“……애송아.”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내겐 등 뒤를 돌아볼 힘조차 없었다.

그저 또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었다.

“후회할 거다, 모든 걸 그러쥘 수는 없어… 몇 번은 운이 좋게 넘어가더라도, 반드시 소중한 것을 잃게 될 날이 올 거야.”

다시 한 번, 또 한 걸음.

“그때도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나? 후회하고, 울고불고 빌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네게 그럴 각오가 있냔 말이다.”

예언과도 같은 경고였다.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사내가 확인한 진리였다.

어쩌면 저 운명을 피해갈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자신은 없지만.

나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핏빛의 발자국이 질척이는 눈발 위로 새겨졌다.

“넌 아직 애송이에 불과해. 결(?)과 해(?)도, 소드 서클의 오의도, 용혈 문자의 비밀도 아직 모르는데……!”

“해야지.”

나는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흘깃 사내를 돌아보는 내 눈동자는, 아직 사내를 온전히 닮지는 못했다.

“……그래야만 한다면.”

사내는 다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고, 또 한 번걸음을 내딛으려던 그때.

그제야 미동조차 없던 사내의 태도에 변화가 일었다.

그는 곧장 저벅저벅 걸어,내 어깨를 쥐었다.

그 무시무시한 악력에 비명을 터트릴 뻔했을 정도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이글거리는 금빛의 불길이.

“좋아…….”

증오와 원독, 그리고 후회와 절망을 연료로 타고 있었다.

“그토록 원한다면 보여주마.”

시야가 새하얘질 만큼 강렬한 광채가 휘몰아쳤다.

뇌리의 둑을 부수고 무수한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잘 봐라. 단 한 번뿐이니까."

그렇게 나의 세계가 침수되기 시작했다.

**

사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을 찰나.

전장에는 벼락과 광풍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체 거인을 향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