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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78화 (278/649)

〈 278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1)

* * *

전장에 폭풍과 벼락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주된 원인은 엘시였다.

그녀는 벌써 몇 병이나 마력의 물약을 비우면서, 온 전력을 투사하고 있었다.

시체 거인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이안은 누가 봐도 중태였다.

이안을 구하러 달려온 이들이라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멀리서 넋을 놓고 있던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뇌리를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알렉스 경, 당장 전장에 진입합시다!”

소심하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유창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세리아의 지시에 마땅히 따라야 할 호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유르디나 가문의 기사들은 멀뚱멀뚱 세리아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던 세리아의 미간이 좁혀졌을 찰나.

노기사 알렉스가 가신들을 대표해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냐고?

세리아는 그 질문에 울컥해서 소리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거짓이겠어요?! 지, 지금 저곳에서 이안 선배가…….”

“아가씨.”

그러나 그에 답하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조.

그래서 세리아는 더욱 의아하다는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의 낯에서는 항명하는 가신 특유의 결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묵묵히 상관의 명을 수행하는 군인의 자세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되물었을 뿐이었다.

“……병사들의 이름은 다 외우셨습니까?”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한시가 급한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세리아는 아직 가신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북부는 오로지 따를 가치가 있는 자만을 따른다.

그렇기에 알렉스가 감히 세리아와 선문답을 계속하더라도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만일 유르디나 가문의 운명을 건 일전이었으면 모르되, 유르디나의 사병들에게 있어 이곳은 그저 타지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여유가 없는 쪽은 오직 세리아뿐이었다.

그녀는 화가 벌컥 났지만, 최대한 타이르듯 말을 이어가야 했다.

“모자람이 있다면 나중에 마땅히 시간을 내어 고언을 듣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이안 선배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으니…….”

“샘은 가족이 여동생 하나뿐입니다.”

알렉스의 그 말에 세리아의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샘’이란 흔해빠진 이름이었다. 일천의 병사들 중 그러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몇 명이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굳이 그 소속까지 따로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가지고 있는 ‘샘’은 그가 유일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여동생은 절름발이죠. 그래서 샘은 어린 시절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더군요… 가문의 사병이 된 것도 안정적인 수입 때문이랍니다.”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알렉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알렉스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샘’이라는 병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 보였다.

알렉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핸슨하고는 이야기를 나눠보셨습니까? 그 친구는 집에 노모와 임신한 아내만을 남기고 왔다더군요. 그가 죽으면 그 둘을 누가 부양할지 걱정이랍니다.”

“아이나는 조금 특이한 친구죠. 침엽수림의 사냥꾼 출신인데, 엘프한테 남동생을 잃고 복수를 위해 지원했답니다. 그녀가 아니면 누가 복수를 해주겠냐면서요.”

“렉스는 무려 팔남매의 장남이라더군요. 아무리 벌어도 부족해서 결국 병사로 지원했답니다. 그가 없으면 또 그중 몇 명은 쫄쫄 굶어야 할지도 모르죠.”

그 태연자약한 설명 하나하나가 세리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세리아도 북부의 전통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북부인들은 전우를 소중히 여긴다.

새로 부임한 지휘관이 병사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오랜 관례였다.

하지만 이토록 상세한 사연까지 알고 있는 기사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알렉스가 특히 유별난 지휘관일 터다.

불행한 사실은, 지금 세리아를 시험하고 있는 이 또한 알렉스라는 점이었다.

그에게서 인정을 얻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이에 따라 세리아가 내리는 명령의 무게는 천차만별이 되리라.

“이안 공자만큼이나, 이곳에 선 병사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북부의 지휘관이라면 마땅히 그 무게를 이해해야 하죠.”

북부의 강병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기로 유명하다.

이는 북부 특유의 ‘의리’ 문화가 영향을 미친 덕이었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일방일 수 없었다.

병사들이 지휘관을 믿고 신뢰하는 만큼, 지휘관 또한 병사들의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전장만을 고른다.

얼핏 보기에도 조급해 보이는 세리아가 통과할 만한 시험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유르디나는 사자의 가문이었고, 시험은 언제나 가장 피하고 싶을 때 찾아오는 법이었으니까.

세리아 또한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얼마간 입술을 짓씹으며, 세리아는 생각했다.

어쩌라고?

샘이든, 핸슨이든, 아이나든 그깟 인간들이 몇 명이나 죽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저곳에 이안 선배가 있는데!

이안 선배에 비하자면 스스로의 목숨조차 하잘 것 없다고 느끼는 세리아였다.

애초에 알렉스의 설득이 먹힐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세리아는 생각했다.

이안 선배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렇게 고민에 빠질 찰나, 세리아의 두뇌는 곧바로 해답을 도출해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말 위에 타고 있던 알렉스는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안장을 박차고 날아든 세리아의 폼멜에 정타를 허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팍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알렉스의 몸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충격량이 상상 이상이었는지, 알렉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쿨럭였다.

그러한 알렉스의 목 위로, 서늘한 예기가 다가섰다.

“……알렉스 경, 나도 북부인이에요.”

칼날보다도 싸늘한 음색이었다.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어느덧 음영이 지워져 있었다.

“유르디나의 정당한 후계자인 언니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고, 그 지시에는 유사시 이안 선배를 지원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기사들의 시선이 세리아를 향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사태를 관망하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부릅뜨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알렉스 경, 삶을 원합니까? 혹은, 알렉스 경이 호명한 병사 중 삶을 원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도망치세요.”

침묵이 감돌았다.

북부인들은 그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였다.

“아니라면, 승리를 원합니까?”

“……아가씨.”

쿨럭거리면서, 알렉스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건틀릿으로 세리아의 칼날을 꽉 쥐기도 했다.

세리아가 오러만 일으킨다면 그 손가락을 절단할 수 있겠으나, 다행스럽게도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승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요?”

단 한 마디였다.

지긋이 알렉스를 응시하며 뱉어진 반문에, 알렉스는 가슴을 팍팍 내리치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혈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명예를 얻기에는 아주 멋진 전장이라는 뜻이죠… 훌륭합니다, 아가씨. 유르디나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논리보다는 힘, 연민보다는 명예!”

알렉스는 그러면서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연이어 발검했고, 병사들은 발을 구르며 화답했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쿵쿵거리는 소음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왕년에 ‘유르디나의 또라이’로 불렸던 솜씨를 보여드리죠.”

노기사의 들끓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북부인들이란…….

그래도 이안 선배를 지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작 그 누구보다 북부다웠던 제 모습은 까맣게 잊어 버린 채.

일천에 달하는 사병들이 물밀 듯이 전장에 들이닥쳤다.

이안을 노리던 시체들과 살점 덩어리들이 피를 내뿜으며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이안이 의식을 되찾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

폭풍과 전하가 마구잡이로 내리친다.

이안의 주위로 다가서던 살점 덩어리나 시체들은 이미 모조리 타버린 지 오래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이 들이닥친 이후, 추가적인 증원은 없었다.

판세는 압도적으로 이안에게 유리했다.

저 ‘시체 거인’만 없다면.

시체 거인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벼락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덧 머리 부분의 수복을 끝마친 괴물은 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안은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였다.

엘시는 미친 듯이 물약을 마시고, 마법을 시전하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혈도가 미친 듯이 맥동했다.

혈관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고, 눈의 혈관은 이미 터져 나간 지 오래였다.

아프다.

마력을 인도하는 팔 곳곳의 혈관이 찢어져 피멍이 들었다. 실시간으로 늘어가는 피멍들은 탄생의 순간마다 엘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몇 번은 신음을 참지 못해 영창이 중단되었을 정도였다.

살면서 이보다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엘시는 어느덧 몽롱해진 정신으로 자문했다.

먼 옛날에 사냥개와 홀로 싸웠을 때?

그때도 아프긴 했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이토록 자진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폐부는 거칠게 쥐어짜이고.

눈은 메마른 지 오래라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찌르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데, 울면서 도망치고 싶은데.

엘시는 버텼다.

가문을 떠나 난생 처음으로 제 운명을 택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운명에 순응해 주어야 했다.

그 끝이 비록 개죽음이더라도.

하지만 시체 거인은 엘시를 비웃듯 주먹을 높이 치켜 올렸다.

저것을 내리찍으면, 이안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웃었다.

“……빛의 심판!”

콰르릉, 하고 우레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본래 벼락이 내리꽂힌 후 벽력이 치는 것이 옳겠으나, 그 천둥소리는 고작해야 이어질 마법의 전조에 불과했다.

파직거리며 잔벼락이 치자 시체 거인의 고개가 저절로 들려졌다.

그의 머리 위로 전하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콰지직, 하고 대기를 찢는 감전음과 함께 전하의 창이 내리꽂혔다.

그 위력은 지금껏 사용했던 대군 마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체 거인은 잠시 부르르 몸을 떨며 경련했다.

그래봤자 시체 거인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는 없었다.

다만 엘시가 바랐던 것은, 시체 거인의 이목을 조금이라도 붙잡을 기회였다.

시체 거인의 고개가 서서히 엘시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미 엘시는 옴짝달싹할 힘도 없었다.

땅바닥에 엎어진 채로, 엘시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흉물스러운 새끼… 눈 안 깔아?”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땅을 짚었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기 위해서.

“야, 이 겁쟁이 새끼야! 이 엘시 님을 놔두고 누굴 먼저 건드리려고 그래? 내가,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주인님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엘시는 헐떡이며 애원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어느덧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소망은 악신의 권속에게 닿지 못했다.

괴물은 잠시 엘시를 노려보다가,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그녀보다는 단 한 번이나마 유효타를 먹인 이안을 위협적인 적으로 여긴 듯했다.

엘시는 당황해서 눈을 부릅떴다.

“야, 야… 야, 뭐해!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사람 있어, 야 이 개새끼야!”

시체 거인은 다시금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살덩어리를 이안에게로 향하려던 찰나.

느닷없이 하늘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강력한 대마법의 전조였다.

시체 거인이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의 각 꼭짓점으로부터 빛의 사슬이 쏘아져 내렸다.

벼락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속성 마법.

그것이 마치 오랏줄처럼 시체 거인을 구속했다. 시체 거인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빛의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오오오오오오­!

분노에 가득 찬 울부짖음이 전장을 쟁쟁히 울렸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엘시는 멍해지고 말았다.

저 마법진,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단수의 마법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은 아니었다.

오직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마도병단만이 이룰 수 있는 대마법이었다.

넋을 놓은 엘시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은, 물약병이 땅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약병이 하나 데구르르 굴러 엘시의 바로 옆에 정지했다.

그 병에는 두 그루의 월계수가 교차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엘시의 눈동자가 멍하니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다.

“……마셔라.”

레이놀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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