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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79화 (279/649)

〈 27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2)

* * *

라이넬라 가문의 단 둘밖에 없는 대마법사, 레이놀드.

아마 저 대규모 마법진의 핵을 이루고 있을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힘겨워 보이는 기색도 없이 말을 건넸다.

엘시는 여전히 얼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아니라면,저대로 이안 공자를 죽게 둘 셈이냐?저 괴물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오직 몇 분뿐이다.”

그 말에 엘시는 얼떨떨해 하면서도,허겁지겁 물약병을 꺼내 들이켰다.

마른 혈맥에 약간의 마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찢겨진 혈관에 강렬한 통증이 일었으나,엘시는 그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엘시의 경계 어린 낯빛을 보고 레이놀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전히 버릇이 없구나.가문의 어른이 도와줬다면 감사의 인사를 남겨야지.”

“나,나는‘라이넬라’가 아니라…….”

“라이넬라다.”

레이놀드의 음색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을 확인하듯이.

“라이넬라니까,그렇게 고집불통이고 성미도 사나운 거다.쯧쯧,나중에 결혼하면 애는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는지…….”

“……주인님!”

그러나 지금의 엘시에게 레이놀드의 타박 따위는 귀에 남지도 못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안에게 뛰어갈 태세였다.

이를 만류하는 것은 레이놀드였다.

“아서라,함부로 접근해 봐야 전력만 유출될 뿐이다.저 괴물을 묶는 마법에 내 대부분의 마력을 투자했으니,몇 분간은 걱정 없을 거다.”

“며,몇 분 후에는요!”

엘시의 다급한 반문에,레이놀드는 다만 어딘가를 눈짓할 뿐이었다.

엘시가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레아놀드는 부연했다.

“엘시,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한계는 이제 막 경험해 본 듯하니,앞으로는 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새하얀 빛의 광채가 몰아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연분홍빛의 눈동자.

레이놀드는 뒷짐을 진 채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저 의식이 완성되면,먼저 출발한 하스터 양과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과 연합해서 바로 들이닥친다.주변을 정리하고 이안 공자만 빼오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후후,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또한 재능이구나.도망치려고 했던 모두가 이곳에 모이다니.”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고 있어서,엘시는 불현듯 불안에 빠졌다.

과연 그런다고 될까?

그 모든 전력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사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영지를 버려야 해.’

사내가 옳았는지,혹은 저 괴물과 대적한 주인님이 옳았는지.

이제 그 결과가 드러날 시간이었다.

**

성녀의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이안이 죽을까 너무나 마음을 졸인 탓이었다.

그녀는 불안이 이토록 강렬하고 무서운 감정인 줄을 이제야 알았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찾아와 대략적인 계획을 전달하고,하늘에서 전뇌의 사슬이 내리꽂히고 나서야 성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렌은 의식을 시작하는 성녀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누님,그래도 조금은 남기죠?”

“임마누엘.”

주의 뜻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즉,조금도 남기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유렌은 곧장 이마에 손바닥을 얹더니,골골 앓는 소리를 냈다.

“어이구야,그 귀한 혈정을 쓰고도 악신의 권속을 잡지 못해?그러고 구한 게 고작 제국의 하급귀족 하나?”

“……악신의 권속을 쓰러트릴 수도 있죠.”

성녀의 희미한 반론에,유렌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짜로 화가 났을 때만 보이는 표정이었다.

“헛소리 마시고,의식 끝나는 대로 바로 이안만 데리고 튑시다…예?”

혈정은 제물로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이를 바치는 의식을 주관하는 이는 성녀였다.

아무리 악신의 권속이라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유렌은 영 회의적인 모습이었다.그 점에 성녀는 조금 불퉁한 심정이 들기는 했으나,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도문을 읊었다.

“주여,당신의 어린 양이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나이다…부디 우리의 죄를 불쌍히 여기시고.”

새하얀 광채가 하나의 원을 그린다.

이는 세계이자 태양,아루스를 상징하는 도형이었다.

“삶과,죽음과,시련이 주님의 뜻 속에서 하나임을 믿나이다.그리하여 감히 당신의 사랑 받는 딸이 간구하나니…….”

원을 중심으로 횡으로 선 하나가 더 그어졌다.

이는 땅과 저울,아루스의 공명정대함을 상징했다.

“하늘에서와 같이,땅에서 주의 은총을 새기소서!”

마지막으로 종으로 선 하나가 그어진다.

아루스의 피조물인 인간과,선과 악을 심판하는 천신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새하얀 십자진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완성된 십자진은 이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빛이 폭풍처럼 몰아쳤고,하늘에서는 빛의 기둥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기적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쿠어어어어어어억!

지금껏 꿈쩍도 하지 않던 시체 거인이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었다.굳건하던 전뇌의 사슬이 툭툭 끊어질 정도였다.

눈보라가 걷히고,하늘에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황금빛 광선에 닿는 것만으로도 삿된 것들은 비명을 내질렀다.그림자에 숨어있던 살점 덩어리나 시체를 제외하면,모든 악신의 권속들이 녹아내렸다.

시체 거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시체 거인은 점점 더 크기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체고가 일할쯤 줄어들더니,어느덧 삼할이나.

그리고 더 지나자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로 시체 거인은 작아졌다.

다시금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도,시체 거인은 무릎을 꿇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를 보고 성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았어!”

이제 이안을 구할 수 있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장해물이 사라진 셀린은 비로소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고,말을 탄 유르디나 가문의 기사들이 전속력으로 땅을 박찼다.

성녀는 그 안도감에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스르르 주저앉은 성녀는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리다가,이내 의이하다는 눈빛을 유렌에게로 보냈다.

본래라면 유렌도 진작 뛰쳐나갔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유렌?”

그러면서 슬쩍 성녀가 돌아본 유렌의 낯빛은,그 어느 때보다 창백해져 있었다.

성녀는 그의 시선을 서서히 쫓아갔다.

그곳에는 흐물거리며 녹아내린 살점 덩어리가 징그럽게 흘러넘치고 있었다.성녀는 처음에 유렌의 불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성녀 또한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꿈틀거리며,녹아내린 살점이 맥동한다.

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움직인다고?아직도?

최소한 한동안은 무력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무한히 재생하는 괴물이라 해도,상극인 천신의 신성력을 퍼부은 참이었다.당연히 한동안은 쓰러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상식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불쑥 살점의 늪에서 커다란 팔이 솟아올랐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르며 거체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내달리던 유르디나 가문의 기사들이 그 기세에 깜짝 놀라 멈칫했을 정도였다.

시체 거인이었다.

그 크기는 절반 이하로 적어져 있었으나,아직도 그 위용은 건재했다.시체 거인이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너저분히 쓰러진 시체들이 움찔거렸다.

성녀의 입에서 불신이 가득 담긴 음성이 새어나왔다.

“말도 안 돼…….”

혈정을 통째로 바쳤다.

죽은 사람만 아니면 누구든 살릴 수 있는 비보였다.

하물며 상대는 저항할 수단조차 없었다.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에 의해 구속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부활했다.

저 괴물은 정녕 불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절망감은 비단 성녀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피난민들도,구출을 준비하던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도.

심지어는 그 용맹한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조차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의 안색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올 때까지는,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안!”

시체 거인은 광분해서 손을 치켜들었다.

크기가 줄어든 탓인지 그 속도는 이전보다 배는 빨라 보였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시체 거인은 주먹을 내질렀다.

쾅,하고 뒤늦게 울리는 파공성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저 일격에 당한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성녀가 비명을 내지르고,엘시가 눈을 부릅떴으며,세리아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셀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을 찰나.

기묘한 침묵이 전장에 감돌았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정적이었다.

의문이 깃든 시선이 하나둘씩 시체 거인을 향했다.

그토록 거대한 주먹으로 내리쳤다면,마땅히 뒤따라야 할 충격파나 소음이 일지 않았다.

그 원인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서서히,시체 거인의 주먹이 밀려나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단순한 중량으로 따지더라도 저 주먹을 들어낼 수 있는 인간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그런데 시체 거인의 완력까지 합쳐진 저 일격을,그대로 받아내?

그런데 그것을 해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사내는,이를 악물어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가 뜻 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결(?).

우어어?

시체 거인은 믿기지 않는 듯,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제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밀리고 있었다.

조금씩이지만,분명히.

시체 거인은 깔보던 인간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바로 괴성을 내지르며,주먹을 회수하더니 또 다른 주먹을 내질렀다.

다시 한 번 새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직전.

사내는 곧장 땅을 박차 쏘아졌다.

주먹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각도였다.그 의중을 단박에 이해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결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파직,하고 시체 거인의 주먹에 균열이 일었다.

아니,주먹뿐만이 아니었다.

손목부터 팔목까지 이어지는 곳곳에 은빛의 실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크에에에에에에에엑!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수백의 시체로 이루어진 시체 거인의 팔이 터져 나갔다.

그 비산하는 육편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도약하고 있었다.

사내는 또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해(?).

드디어 알았다. 이 이치를 깨닫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거쳤던가.

비로소 사내는 시체 거인을 향해 씹어뱉듯 말을 걸었다.

“……딱 고생시킨 만큼만 맞자."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죽어가던 사내가 다시 검을 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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