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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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의 조우는 운명적이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가 지닌 기억이란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리아는 낯선 저택에 와 있었다.
그 이전의 추억은 모조리 지워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백지로 만든 것 마냥.
지식은 존재했다.
언어나 수리, 사회 상식 따위는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다만 이를 어떻게 습득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리아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스스로의 이름도, 신분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꼬리표는 공허하기만 해서,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실감하지 못했다.
‘리아 페르쿠스’, 라.
호칭은 포장지에 불과했다. 그 껍데기 안에 알맹을 채워넣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리아는 ‘가족’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녀를 볼 때마다 괴로운 낯빛을 했다.
또는 연민과 동정을 담아 그녀를 안아주었을 뿐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리아도 그들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유독 특이한 사람은 하나 있었다.
“리아, 식사는 했니?”
소년은 늘 불쑥 튀어나와 그렇게 친근하게 묻곤 했다.
소심했던 리아는 감히 ‘오라버니’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 네, 네…….”
“그래, 잘했어. 아직 저택이 익숙하지 않지? 한동안은 내가 영지 이곳저곳을 안내해 줄게.”
소년의 첫 인상은, 희미한 땀 냄새였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검을 휘둘렀다. 먼 영지에서 찾아왔다는 검술 고수들이 그를 직접 훈련시켰다.
흙투성이가 되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대련을 하다가 얻어맞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셀린’이라고 하는 소꿉친구도 왈가닥이라, 함께 놀다 다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만일 리아였다면 벌써 여러 번 눈물을 터트렸으리라.
하지만 소년은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도리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리아를 보고 쓴웃음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소년은 늘 리아를 달래 주었다.
“……괜찮아, 리아.”
그 이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그랬다.
그는 단 한 번도 리아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때때로 생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일도 없었다.
도리어 불안에 떠는 리아를 위해 부끄러운 배역을 자처했을 정도였다.
‘기사’와 ‘공주’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좋았다.
그 모든 것이.
소년을 만날 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기분 좋았다.
소년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칭찬을 받고, 때로는 투닥거리며 지내는 일상이 행복했다.
리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의 여동생일 수 있어서, 그리고 소년이 그녀의 오라버니라서.
천신께 몇 번이나 감사의 기도를 올렸는데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리아는 제 가슴의 고동이, 설레이는 기쁨이, 소년의 품에서 느끼던 짙은 행복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기는 단순했다.
소년이 가진 감정이, 리아가 지닌 감정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새 리아를 밀어내고 있었다.
“리아, 아무리 그래도 남매 사이에 이러는 건…….”
그날 리아의 뇌리에는 강렬한 의문이 틀어박히고 말았다.
왜?
소년도 리아를 사랑했고, 리아도 소년을 사랑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도 일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리아는 소년과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언제나 함께하고 싶었고, 그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리아는 소년의 여동생이었던 탓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 것만 같던 그동안의 삶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랬다. 리아가 지닌 감정은 남매애 따위가 아니었다.
이를 깨우친 리아는 미칠 듯한 번뇌에 시달렸다.
왜, 어째서, 어떻게.
잔인하고 비열했다.
어차피 밀어내려 했다면, 처음부터 밀어냈어야 했다.
애정에 목마른 꼬맹이가 착각하고 멋대로 꿈을 꾸지 못하게끔 했어야 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덜덜 떠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를 며칠.
리아는 소년에 대한 감정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수년간 물을 주고 키워온 첫사랑의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소년이 품은 감정은 소녀와 명백히 달랐고, 이를 빌미로 소년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나쁜 짓이었다.
리아는 여전히 소년을 사랑했으므로, 차라리 그라도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안 됐다.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심장을 조각으로 쪼개, 소년을 향한 애정만을 골라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심장의 몇 할을 버려야 할까.
칠할? 아니, 팔할?
혹은 구할일지도 몰랐다.
소녀가 마음속에 품은 유일한 가족이자 사랑이었다.
그 상존할 수 없는 두 지위가 끝없이 리아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시간은 많은 것을 치유한다.
여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이 따끔거리기도 했으나, 리아는 차츰 그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녀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 맺어질 수는 없더라도 함께 살 수는 있어.
연인이나 부부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언젠가 소년과 단 둘이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리아가 남긴 모든 발자취에는 소년의 색채가 묻어 있었다.
상단을 만들어 독립을 꿈꾸던 것도.
상단에서 얻은 수익으로 아카데미의 수업료를 지불한 것도.
전부 다 이안을 위해 한 행동에 불과했다.
그렇게 만든 부채로 언젠가 이안의 미래를 사리라.
그 야심만만한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초되고 말았다.
연달아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소년의 활약상에, 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그러나 진정으로 말도 안 되는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다.
푹, 하고 날붙이가 살갗을 파고드는 감촉.
리아는 멍청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사랑하는, 오빠의 피.
“아니야…….”
거짓말이다.
이딴 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도리질을 치며, 눈앞의 진실을 부정하려던 그때.
푹, 하고 다시 한 번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가를 찌르는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푹,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황망해진 리아의 눈동자가 소년을 향했다.
소년은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울컥 올라온 핏물만을 주르륵 흘릴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그는 풀썩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치 시체처럼.
소녀는 절규했다.
“거지, 거짓… 거짓말. 내, 내가 얼마나 오빠를, 응? 오빠를 사랑하는데, 내가? 내가 왜?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악!”
리아가 눈을 뜬 것은 그 직후였다.
지독한 악몽에 리아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리아는 떨리는 눈빛으로,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다.
꿈이어야 했다.
이보다 잔인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를 제 손으로 찌를 수 있단 말인가.
끔찍한 죄였고, 그 질척한 죄책감 사이로 어떠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괴물을 바라보는 듯하던 황금빛 시선들.
그것이, 리아와 이안 사이에 이어진 유일한 끈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진정 괴물이라는 증거인 것만 같았다.
괴물이 어떻게 기사의 옆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사의 옆자리는 공주의 몫이었다.
괴물은 기사에게 토벌당해야 할 존재였다.
“미,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아, 아니! 자, 잘못… 흐끅, 자, 잘못했어요… 미, 미워하지 마. 버리지 마아…….”
그렇게 리아는 어딘지 모를 구석에 처박혀 한참을 울기만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문득 어떠한 생각이 스칠 무렵이었다.
오빠는 어떻게 됐지?
그제야 눈물로 흐리던 리아의 시야가 맑아졌다.
오래된 목재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이었으나, 리아는 알았다.
그녀 또한 상인이었으니까.
이곳은 마차의 안이었다.
심지어 리아의 양손과 양발에는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말 그대로 괴물이라도 취급하는 듯한 대우.
하지만 리아는 지금 그마저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아득바득 바닥을 기어 쿵, 하고 마차의 문에 온몸을 던졌다.
“문 열어! 당장 안 열어?! 오, 오빠는 어떻게 된 거야! 살아는 있어?”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어차피 만난다고 해도, 리아는 그를 피하고 숨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 안위만큼은 알고 싶었다.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더욱 조급해진 리아는 몇 차례나 몸을 날려 문을 두드렸다.
그 간절함이 극에 달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느닷없이 마차의 빗장이 으깨져 리아가 바깥 공기를 들이마실 때까지 그랬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이었으나, 리아는 이조차 깨닫지 못했다.
단지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따름이었다.
리아가 탈출했는데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아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곧장 사람들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담기는 광경이 리아가 그토록 원하던 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둥과 벼락이 내리친다.
뇌우와 함께 빛이 번쩍일 때마다, 수없이 많은 시체로 이루어진 거체가 울부짖었다. 까마득히 많은 군대가 시체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주위의 눈보라가 걷힐 지경이었다.
몇몇 이들이 검에 오러를 두른 채 거인과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오빠.”
검과 주먹이 오고갈 때마다, 어김없이 거인의 팔이 터져 나갔다.
거인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우오오오오오!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머리가 아파올 정도였다.
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단 둘만의 소박한 행복을 누릴 소년은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커버린 뒤였다.
그 실감이 리아의 가슴을 서늘하게 난도질했다.
소녀는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오는지도 모른 채.
전투는 이제 막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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