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4)
* * *
쿵, 하는 충격파와 함께 핏물에 젖은 눈이 비산했다.
나는 검을 지반에 박아 들이치는 칼바람을 버텨냈다. 몸뚱아리는 여전히 엉망진창이라, 숨을 헐떡일 때마다 비릿한 피맛이 났다.
내 몸에는 어느덧 실종되었던 활력이 돌고 있었다. 다만 이는 일시적인 각성에 불과했다.
아주 짧은 시간 마력의 효율이 극도로 좋아진 덕이었다. 만일 남아있는 마력이 전부 다 말라버린다면, 내 목숨도 그대로 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체 거인’이 많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주위에 남은 온기로 미루어 보아, 성녀가 무언가를 했으리라 짐작해 볼 뿐이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무리 그래도 본신의 힘을 온존하고 있는 시체 거인은 강적이었다. 결(?)과 해(?)를 조금이나마 깨우쳤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약화된 뒤라서, 만신창이인 몸으로도 전투 속행이 가능했다.
기회였다.
이대로 시체 거인을 쓰러트려야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느덧 내 옆으로 헐떡이며 달려온 여인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그녀의 이름은 셀린이었다.
천만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다짜고짜 내 팔을 쥐었다.
“다, 다행이다아… 이제 가자, 오빠!”
“……어디를?”
나는 여전히 시체 거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반문했다.
내게 일격을 허용한 시체 거인은 보다 신중해져 있었다.
슬금슬금 걸으며, 나와 거리를 재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나를 적수로 인정한 듯했다.
참 싸가지 없는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심 긴장을 풀지 못했다.
몸집이 작아진 탓에 그 힘은 약해졌으나, 그 대신 속도를 얻은 듯했다.
주먹이 내질러지는 시차가 지극히 짧아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재생력.
예전에 비하자면 현저히 느리지만, 시체 거인은 여전히 재생 중이었다.
내가 흩어놓은 팔 또한 어느덧 형체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저 회복력을 웃도는 속도로 시체 거인을 박살내지 않는다면, 승리는 요원했다.
뇌우가 하늘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벼락이 번쩍거리며 전장에 내리꽂혔다. 폭음으로 귓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시체 거인은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유효타까지는 아니라도 방해는 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지원하고 있을 터였다.
이처럼 유심히 전황을 살피는 나와 달리, 셀린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릴 뿐이었다.
“당연히 피난 행렬로 복귀해야지! 지금 오빠를 포함해서 핵심 전력이 전부 이탈해서 대기 중이잖아! 호위 병력 없이 피난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먼저 가라고 해.”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땅을 박찼다.
내가 전장을 내달리자 시체 거인은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양상을 보였다. 나의 도약과 동시에 시체 거인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결과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어떠한 광경이 겹쳤다.
불타오르는 대수림이었다.
타는 잔해 사이로, 사내가 저벅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뺨을 쓰다듬으며 여인이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 낯설다고 느낄 만큼 성숙한 외모의 미녀였다.
그녀가 말했다.
“……첫째야.”
“죄, 죄송… 죄송합니다. 스승님.”
더듬거리면서, 사내는 여인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니, 사내가 아니라 나인가.
울고 울어 붉어진 눈시울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제가, 너무 늦어서… 사, 사매도. 스승님도…….”
“못난 대제자로구나, 사내놈이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숲 곳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아니, 숲이라고 해야 할까.
두 강자가 부딪힌 여파로 주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무도, 풀도, 그 무엇도 없이 불길만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저 너머에 신음을 흘리며 쓰러진 또 한 명의 여인이 보였다.
얼핏 보면 스승을 똑 닮은 얼굴이었다.
스승은 흡혈귀를 ‘언니’라고 불렀다.
비유가 아니라, 혈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차마 대수림을 떠나지 못했다.
“됐다, 어차피 내가 풀어야 할 매듭이었어… 그나마 죽기 전에 여한은 남기고 가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네게 물려줄 원한 하나는 청산하고 가서.”
“제, 제가 약해서…….”
스승의 연녹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제가 약해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서.”
후우, 하고 스승은 기나긴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하더냐?”
나는 울음을 삼키느라 답을 하지 못했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가슴 안을 맴돌았다.
“가진 것 없는 하급 귀족이라, 가진 바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네.”
가까스로 짜낸 대답이었다.
사매를 잃었고, 스승도 잃기 직전이었다.
어찌 한이 없겠는가.
진흙이 물을 토해내듯 나는 울음을 털어냈다.
스승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많이 분할 테지.”
나는 직감했다.
이것이 스승의 마지막 수업이리라고.
“잔인하고 지독한 세상이다.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없는 자는 끝없이 잃어버리기만 하지… 그 탓에 델피렘이 태어났다.”
스승은 그러면서 내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함께 지낸 세월이 벌써 몇 년이었다.
그 뜻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져, 파이프 담배를 꺼내 스승의 입에 물렸다.
그리고 마른 연초를 담아, 불길을 한 번.
후우, 하고 스승의 입에서 연기가 뱉어졌다.
“가진 자들은 델피렘을 이길 수 없어. 나도, 제국의 황제도, 성국의 성녀도…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델피렘의 편에 설 테지.”
유언치고는 느닷없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스승이 남기는 마지막 말이었다.
제자로서 가슴에 새길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해라.”
나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다.
단지 말없이 스승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부딪히고, 무너지고, 쓰러지고… 그러다 보면 답이 보이겠지. 너를 처음 볼 때부터 느꼈다, ‘운명적 직감’을.”
스승이 늘 쓰던 말이었다.
‘운명적 직감’이라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참 죽을 때까지도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소중한 이를 둘이나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슴이 아리지 않다면 이상했다.
갑작스레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꿈틀거리며, 쓰러져 있던 여인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흡혈귀’였다.
“아직, 아직이야…….”
헐떡이며 내뱉은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혈향이 풍겼다.
얼핏 보기에는 한 떨기 꽃과 같은 자태였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여자는 위험했다.
반쯤 초점이 풀린 눈동자였으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짙은 살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여인의 몸에서는 끝없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통상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혈사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정도의 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흡혈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아, 무려 수백 년만이다… 그런데 우리의 해후가 이렇게 짧을 수는 없어, 그렇지?”
스승은 떨떠름한 낯빛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참, 제자와 이별의 인사를 나눌 시간도 주지 않는구나…….”
또 다시 자리를 피해야 하나, 하고 내가 망설이던 그때.
스승이 말했다.
“……잘 봐라.”
내뿜어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스승의 검지가 움직였다.
그 인도를 따라 허공에 마력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오감을 초월한 감각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곳에 무언가 있다고.
응집된 마력의 밀도가 점점 더 높아질수록, 대기는 웅웅 떨며 울음을 토해냈다.
“단 한 번뿐이니까.”
시야가 일변한 것은 그때였다.
어느덧 나는 대수림을 벗어나, 시체 거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체 거인의 주먹을.
검광이 폭사되며 거인의 주먹에 실선을 마구잡이로 그어댔다.
그리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핏물과, 쏟아져 내리는 시체들.
직전까지 시체 거인의 주먹을 이루고 있던 잔해들이었다.
미처 내게 닫기도 전에 이루어진 반격이었으나, 시체 거인은 생김새와 달리 멍청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주먹이 내게 연달아 날아들었다.
반격을 꾀할 시간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검을 들어 마력을 응집시켰다.
기억 속의 사내는 이를 ‘결(?)’이라 불렀다.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흐름 사이에서 오롯이 서는 것.
순환하는 것은 단지 대기뿐만이 아니었다.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힘이나 마력 또한 제각각의 흐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 흐름을 읽을 수만 있다면, 거센 물결과 여린 물결도 구분이 가능했다.
결이란 그 여린 물결을 가르는 기술이었다.
마치 돌멩이를 하나 두어 물길을 가르듯이.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가 아직 흐름에 관해 통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쿵, 하고 매서운 충격파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내가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체 거인은 땅을 딛고 있었고, 나는 디딤돌조차 없는 신세였다. 결국 충돌을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나간 쪽은 나였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면 될 것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