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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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기억은 아직 파편처럼 내 뇌리를 떠돌고 있었다.
결과 해의 대략적인 사용법은 터득했으나,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자세한 이치는 알 수 없었다.
끝까지 결정적인 장면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대마녀가 보여준 결과 해의 마지막 시연.
그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탄력 있는 공처럼 튕겨 나간 내 몸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다.
의외의 인물이 받아주지 않았다면,나는 또 다시 피를 토하며 피로한 눈을 한 사내를 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탁,하고 나를 받아내는 폼이 꽤 안정적이었다.
성인 남성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하물며 내 몸은 근육질이었고,가속까지 붙어 그 운동량은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소녀는 단지 두어 걸음 물러나며 모든 충격을 흘려냈다.
회색 머리카락이 언뜻 내 시야를 스쳤다.
나는 흐,하고 뜻 모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리아.”
“이안 선배,괜찮으세요?!”
세리아도 셀린 못지않게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잠깐 세리아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유르디나의 사병을 보고 짐작하긴 했으나,두 눈으로 보니 더욱 반가운 마음이었다.
이로써 전위는 모두 모인 셈이었다.
홀로 싸우는 것보다야 몇 배는 나왔다.
화들짝 놀란 셀린까지 내게 달려오자,나는 두 여인에게 부탁을 건넸다.
“세리아,네가 우측 다리를 맡아.셀린,너는 좌측을 맡고…아무래도 땅을 딛고 있으니까 허공에서 상대하기 힘들어.”
“미,미,미쳤어?!”
물론 그 지시를 순순히 따를 셀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울컥해서 나를 타박했다.
“지,지금 이안 오빠가 어떤 꼴인 줄 알아?!당장 쓰러져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차라리 이곳은 우리 둘이 맡을 테니까…….”
“너희만으로는 안 돼.”
담백한 진실이었다.
두 사람의 가세가 도움이 되긴 하겠으나,시체 거인의 회복력을 상회하는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했다.
일격으로 시체 거인의 팔을 분쇄할 수 있는 기술은 오직‘해(?)’뿐이었다.
결이 흐름 속에서 버티기 위한 기술이라면,해는 흐름을 흩어놓는 기술이었다.
빗대자면 흐르는 물길에 더 많은 물길을 뚫어놓는 것과 비슷했다.
이를 응용하면 시체 거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구성물들도 흩어버릴 수 있었다.
연결 또한 힘의 작용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해를 쓸 수 있는 것은 일행 중에서 내가 유일했다.
결국 내 지시에 돌아오는 반론은 없었다.
단지 세리아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을 따름이었다.
“……신호는요?”
“내가 도약하는 즉시.”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셀린은 내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말해봐야 통하지 않으리란 점을 깨달은 탓이었다.
과연 셀린이다 싶었다.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 눈이 다시금 적을 향했다.
시체 거인은 그 짧은 시간 내에 벌써 사라진 팔을 수복한 뒤였다.
괴물의 흉측한 울음소리가 고막을 거칠게 흔들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너무 듣다 보니 이제 지겹기까지 한 울음소리였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나는 세리아한테 물었다.
“세리아,혹시 진통제 가지고 있어?”
“아…네,넷!하,하나 정도 응급처치용으로…….”
그러면서 세리아가 주섬주섬 진통제로 추정되는 물약을 꺼내자,나는 남김없이 이를 들이켜 버렸다.
세리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물론 내게도 사정은 있었다.
통각이 줄어들자,점점 더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럴수록 사내의 기억을 더욱 잘 엿볼 수 있었다.
어차피 몸은 이미 한계였다.
더 몰아붙이고 싶어도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약물의 힘을 빌리는 편이 더 나았다.
또 다시 뇌우가 몰아치며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유지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엘시 선배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의아하기는 했으나,시체 거인을 견제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오랜만이었다.
성녀가 시체 거인을 약화시켰다.
셀린과 세리아는 지금 내 옆에 서 있었고,엘시 선배는 후방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괜히 델핀 선배의 빈자리가 쓸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몸에도 한계가 존재하는 이상,기회는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합류한 동료들이 무척이나 듬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시체 거인 또한 묘한 긴장감을 감지했는지,유심히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또 다시 낯선 풍경들이 스며든다.
그래,지금.
나는 미친 듯이 내달려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느닷없는 도움닫기였으나,시체 거인의 반응속도는 빨랐다.
시체 거인이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그에 맞서,내 검에서 타오른 은빛의 오러가 세상을 절단했다.
은빛의 직선이 시체 거인의 주먹을 파고들었다.그리고 이내 팍,하고 핏물을 터트리며 흩어지는 시체들.
우수수 떨어지는 육신 사이로 또 하나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나를 이미 한 번 쓰러트린 바 있던 연격이었다. 이대로라면 나의 두 번째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제 내겐 조력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검푸른 섬광이 시체 거인의 오른다리 위를 매섭게 내달렸다.
쏟아지는 세리아의 검격은 마치 폭우와 같았다.
발목을 베고,한 차례 도약.그리고 세리아는 무수한 시체들을 사뿐사뿐 밟아 적의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검상을 새겼다.
깔끔한 검격들이 하나하나 시체 거인의 핵심 관절을 절단했다.
더는 시체 거인의 무게를 견딜 수 없도록.
오른 무릎이 폭삭 주저앉자,시체 거인은 단숨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키에에에에에엑!
나를 노리고 날아들던 주먹도 자연스레 허공을 스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나는 그 주먹 위에 내려앉아,거인의 팔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길이 시야를 태우고 지나갔다.
낯선 사내의 기억이 또 다시 시야를 침범했다.
스승이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결(?)이란 흐름에 맞서 너를 세우는 것이다.흔들리지 않고 심상을 관철해야 한다면,너 또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그랬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적과 맞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환각과 환청을 떨쳐내며 질주를 계속했다.
어느덧 팔뚝을 넘어,어깨 위로.
시체 거인은 그 사이에 반쯤 수복된 팔로 나를 노렸다.
물론 내게 통할 리가 없는 수작이었다.
검극이 내질러지며 일직선을 그렸다.
쿡,하고 칼끝이 닿았을 뿐인데도 시체 거인의 손바닥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뒤늦게 손가락으로 나를 움켜쥐려 했으나,이미 늦은 뒤였다.
거인의 손을 이루던 시체들이 흩어지며 우수수 땅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결국 시체 거인에게 남은 팔이라곤 이제 하나뿐이었다.
괴물은 마지막 팔을 써서라도 나를 쳐내려고 했다.
단지 그때는 이미 셀린이 좌측 무릎에 도달한 뒤였을 뿐이었다.
쾅,하고 작은 폭음이 귓전을 스쳤다.
셀린의 장기는 대량의 마력을 단번에 쏟아붓는 데 있었다.
실력은 세리아에 비해 부족할지 몰라도,전력을 다한 일격의 위력은 세리아에 필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수렵제의 상품인‘용의 정혈’을 섭취한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시체 거인의 왼발목이 일시에 박살났다.
또 하나의 지지대를 잃은 시체 거인의 몸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급격히 하강했다.나는 시체 거인의 균형이 다시 흔들리는 사이,자세를 다듬어 검을 내찔렀다.
거인의 손바닥과 검이 마주친다.
그 부피로 보나,질량으로 보나 거인의 손바닥 쪽이 압도적인 우위였다.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정반대였다.
거인의 손바닥이 쩌적,하고 갈라지며 은색 빛무리가 새어나왔다.
그 직후 벌어진 일은 뻔했다.
펑,하고 폭발하듯 시체 거인의 남은 손이 폭발해 버렸다.
육편과 골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시간이 둔중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더더욱 깊숙한 기억을 들추고 있었다.
또 다시 낯선 풍경이었다.
“……그리고 해(?)는 말이다.”
스승은 그렇게 말하며 검지를 서서히 아래로 내리그었다.
“터트리는 것이다.”
무엇을,이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응집되었던 마력이 그 장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툭, 하고 스승의 검지가 땅바닥을 가리킨 그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찢겨나갔다.
시간이나 공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공의 열상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공허.
지극히 짧은 찰나,나는 세상의 빈자리를 목격했다.
이윽고 여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속에 울려 퍼졌다.
“너 자신을.”
그 또한 심상이리라고,스승은 말했다.
세계는 또 다시 일변한다.
허억,하고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핏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숨을 고를 틈은 없었다.
나는 곧장 시체 거인의 머리를 타고 올라갔다.
키에에에에에엑!
몇몇 낯짝이 불쾌한 비명을 내질렀으나,도끼를 몇 번 휘두르자 잠잠해졌다.
정확해지는 잠잠해지도록 주둥이를 으깬 것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내가 어찌저찌 시체 거인의 이마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시체 거인이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더니,그대로 제 머리를 땅에 박아버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막대한 충격이 골수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울컥 차오르는 핏물을 그대로 토해버렸다.
마지막에 결을 쓰긴 했으나,시간이 부족해 완벽하지 못했다.
짓눌린 내장이 파열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느닷없는 반격에 당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측면에서 나를 지원하던 세리아와 셀린 또한 그 여파에 땅 위를 나뒹굴어야 했다.
도를 넘은 통증에 내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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