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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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죽기 직전의 시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시체 거인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도리어 나는 시체 거인의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끝을 봐야만 했다.
그렇게 고집스러울 만큼 거친 도끼질이 이어졌다.
팍,팍,팍.
도끼질이 이어질 때마다 핏물이 튀며 내 육신을 적셨다.
어느덧 시체 거인의 머리에는 은빛의 균열이 일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균열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균열의 수와 깊이가 점점 더해졌다.
그 끝이 어떨지 모를 시체 거인이 아니었다.
괴물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어,다시 머리를 땅에 처박으려 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또 한 번의 일격을 허용한다면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짓쳐드는 누군가가 없었다면, 시체 거인은 마땅히뜻을 이루었을 터였다.
푸른 머리카락이 푸른 오러와 함께 궤적을 남기며 내달렸다.
여기사는 곧장 시체 거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직후, 그녀의 검이 멈춘 시간 속을 유영했다.
은하수처럼 종으로 그어지는 청색의 궤적.
그 후폭풍은 놀라웠다.
지반이 터져 나가고,음속을 돌파한 검격에 대기가 찢겨나갔다.
마치 천재지변을 검으로 재현한 듯한 일격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기술을 쓸 만한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스승님!”
아이린 루페미온.
리아의 호위를 자처하던 그녀가 결국 전장에 합류한 것이다.
여전히‘스승님’이라는 호칭은 적응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만 그 시점은 실로 적절해서,시체 거인은 또 한 번의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아이린 경의 기습으로 허리춤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시체 거인의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으니,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전력을 다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드디어 콰직,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시체 거인의 머리가 온통 은빛의 빛무리로 물들었다.
크에에에에에에에엑!
여태껏 보였던 반응 중 가장 극적이었다.
시체 거인의 머리가 마구잡이로 경련하더니, 그가내지르는 비명 소리마저 빛으로 토해졌다.
펑,하고 시체 거인의 머리가 폭발할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충격으로 내 몸이 무수한 머리들과 함께 튕겨나갔다.
한동안 땅 위를 나뒹굴던 나는, 헐떡이며 땅에 도끼를 박고 몸을 일으켰다.
제 머리를 잃은 시체 거인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쿵,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쓰러졌을 따름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아이린 경은 신이 나서 내게 달려왔다.
“스,스승님!보셨어요?!스승님께서 전수해 주신 기술,지금껏 연습했던 것보다도 더 완벽하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아이린 경의 섣부른 판단에 불과했다.
이대로 끝날 적이라면 미래의 내가 그토록 경계할 턱이 없었다.
우수수 흩어진 시체들 사이로,더 작은 시체 거인이 나타났다.
마치 몇 겹에 걸친 외투를 벗어버리듯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곧장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씹…아이린 경,피해!”
내 경고를 들은 아이린 경의 시선이 멍하니 뒤를 향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시체 거인은 이미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작아진 만큼이나 그 속도 또한 가속해 있었다.
쿵,하고 정통으로 시체 거인의 주먹을 얻어맞은 아이린 경은 짜부라진 비명을 터트려야 했다.
“끄,꺄아아아악!”
그렇게 파공성을 일으키며 아이린 경은 땅을 몇 번이나 굴러야 했다.
나는 곧장 손도끼 대신 검을 손에 쥐었다.
한때 수십 미터에 이르던 시체 거인의 체고는 이제 수 미터에 불과했다.
여전히 위압감 넘치는 크기였으나, 이전에 비하자면 한결 나았다.
나는 시체 거인을 보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까지 작아지나 보자.”
시체 거인은 대답 대신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진통제까지 복용한 만신창이의 몸은 그 쇄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시체 거인은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발길질을 했다.
콱,하고 복부에 틀어박히기 직전 검이 그 발을 가로막았다.
허나 내 몸이 앞으로 꺾이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시체 거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인은 남은 발로 내 몸을 차올렸다.
텅,하고 내 몸이 통째로 하늘 위로 떠올랐다.
낭패였다.
결(?)로 대다수의 충격을 상쇄했으나,허공에서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땅을 딛고 선 시체 거인이 내놓을 수 있는 수는 무궁무진했다.
더불어 나는 조금 더 끔찍한 사실을 눈치 채야 했다.
부글거리면서,시체 거인의 몸 주변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재생의 전조였다.
언제든 이전의 크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불사신’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적이었다.
그러니까 버리라고 한 것일 테지.
영지도,수백의 목숨도,그리고 내 여동생조차도.
시체 거인은 승리를 확정 짓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세를 잡은 폼이 꽤 무술을 배운 티가 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괴물도 무술을 배운단 말인가?
어쩌면 시체의 기억을 흡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패배', 그 두 글자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수가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내 눈이 이끌리듯 어딘가를 향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고깔모자 하나가 그곳에서 위치하고 있었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엘시 선배!”
그것이 신호였다.
엘시 선배는 유능한 전투 마법사였다.
이 절호의 기회를 승리로 연결 지을 비장의 수를 준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것이 마법사의 역할이니까.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는지, 엘시 선배는 등 뒤에레이놀드 씨까지 두고 있었다.
무언가 수를 꾸미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레이놀드 씨는 말없이 엘시 선배의 등에 손을 얹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소녀의 낭랑한 선언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천뢰의 진!”
웅웅거리며 대기가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질풍이 몰아치며 소용돌이가 일었다. 바람이 원을 그리듯 용솟음쳤다.
그 한복판에 놓인 것은 시체 거인이었다.
우르릉,하고 우레 소리가 세계를 뒤흔든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뇌우를 유지하고 있던 까닭을.
눈속임이었다.
견제에 불과한 전격 마법을 유지함으로써, 시체 거인이 비구름을 경계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준비하고 있던 비수는, 엘시 선배의 손에 의해 드러날 예정이었다.
바로 지금.
수십 줄기의 벼락이 단번에 쏟아져 내린다.
금빛의 빛줄기가 마구잡이로 진의 중앙을 강타했다.
쾅,쾅,쾅,쾅!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며 시체 거인의 괴성을 묻어버렸다.
수십,아니 수백 줄기의 벼락이 일점을 타격하는 광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잔류하는 전하만으로도 일대의 핏물이 메마르고,진을 중심으로 깊고 깊은 구덩이가 패일 지경이었다.
고작해야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사이에 집중된 파괴와 폭력은, 불사신마저 만신창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검 대신 도끼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 알맞았으니까.
추락이 폭음을 동반했다.
쾅,하고 터져 나온 맹렬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시체 거인의 몸은 이미 너절해져 있었다.
아직도 숨겨둔 한 수가 남아 있었는지,그 팔이 단단했다.일전에 내 발목을 붙잡은 바 있던 건틀릿들이 한가득이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손도끼를 쥔 손에 힘을 가하며,나는 낯선 기억의 잔향을 떠올렸다.
나를 터트리는 것이, ‘해(?)’다.
시체 거인의 전신에 은빛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펑,하고 터져 나가는 몸뚱아리.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시체 거인이 남아있었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살점의 재생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을 텐데,더는 빨라질 수 없을 텐데.
점점 더 은빛의 궤적이 그려지는 간격이 줄어들었다.
은빛의 오러가 점점 더 선명한 빛으로 타올랐다.
시간을 가르고 검격이 이어진다.
가속, 그리고 가속.
쾅,쾅,쾅!
작은 시체 거인을 터트리면,더 작은 시체 거인이.
그리고 더 작은 시체 거인을 터트리면,더더욱 작은 시체 거인이 나타났다.
수 미터에 이르던 시체 거인은,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이의 크기까지 작아졌다.
더는 시체가 엉겨 붙은 흉측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렇게 드러난 시체 거인의 핵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초라한 행색으로 보아 고아로 추정되는 아이였다.
워낙 남루한 몰골이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않던 꼬마는, 불현듯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이내 겁을 먹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워,원장 선생님은요?또,또 기절했다고 벌을 주시는 건…….”
악취미였다.
또 고아의 시체를 가지고 연기를 시키다니, 그렇게 욕지거리를 하던 내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 꼬마아이의 가슴팍에 명패가 달려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명패에 쓰인 글자를 바라보았다.
‘미트람.’
꼬마는 내 무릎에 매달려 애원했다.
“자,잘못했어요…어,어제3시간이나 자놓고 일도 못하는 식충이라서 죄송해요.부디,부디 징벌방만큼은…….”
나는 잠시 동안 흐릿한 숨결을 들이쉬고,내쉬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꼬마야.”
맑고 순박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잔혹한 암흑사제 또한 한때는 이러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절절한 감정을 담아, 한 마디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내 잘못이다.”
아니,어쩌면 우리의.
내 영문 모를 소리에 꼬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인 그 찰나.
푹,하고 어느덧 내 손에 들린 검이 꼬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꼬마는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더듬더듬 제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다가.
핏물이 묻어나오는 손을 보며 웃었다.
“……이제야.”
풀썩,하고 안도한 얼굴을 한 꼬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야,쉴 수 있겠어…….”
눈보라가 그치고,해가 떴다.
햇빛이 커튼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태양을 마주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의 종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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