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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84화 (284/649)

〈 28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7)

* * *

전투의 흥분이 가시자 후폭풍이 찾아왔다.

무릎이 풀썩 꺾이며 지반에 틀어박혔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프다는 느낌마저 희미했다.

아직 진통제가 돌고 있는 덕인지, 혹은 도를 넘은 통증에 뇌가 익숙해졌는지도 몰랐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더는 손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웠다.

일순 시야가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나는 어느덧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몸뚱아리는 그제야 평온을 얻었다는 양 이완을 시작했다.

내게 다가오는 몇몇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이안 선배!”

“이안 오빠!”

셀린과 세리아였다.

본래 시체 거인의 지반 박치기에 날아갔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상은 경미한 모양인지,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는 괴로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헐레벌떡 다가오느라 숨결이 조금 거칠어져 있을 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는 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일행들까지 이처럼 끔찍한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가라앉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이대로 의식의 끈을 놓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헐떡이면서, 나는 셀린과 세리아에게 물었다.

“……성녀님은?”

“지, 지금! 이제 곧 오실 거예요! 어, 어떡해…….”

세리아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셀린은 상상 이상으로 내 상태가 심각해 보이자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핏물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소꿉친구를 보면 나라도 그럴 터였다.

하물며 나는 눈의 초점마저 맞지 않은 지 오래였다.

멍하니 흐려진 내 눈동자를 보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었다.

내 심신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셀린은 곳곳이 찢긴 내 팔을 더듬거리다가,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 이안 오빠… 주, 죽는 건 아니지? 정신 차려야 돼… 조, 조금만 있으면…….”

“걱… 쿨럭! 거, 걱정하지 마.”

나는 셀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다만 도중에 핏물을 토해 버린 것이 흠이었다.

울컥 뱉어진 핏물을 본 셀린의 낯빛이 더더욱 새하얘졌다.

조금도 내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 내가 들고 달릴까? 그럼 성녀님이랑 조금 더 일찍 합류할 수 있잖아!”

“아서라, 조금이라도 더 충격 받으면… 쿨럭! 지, 진짜 죽는다.”

진심이었다.

지금의 나는 사소한 충격 하나만으로도 죽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연약한 생물체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셀린과 세리아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성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숨조차 쉬지 않고 달려온 성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룰 마주한 연분홍빛 눈동자가 망연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내 부상 부위를 살폈다.

“주여…….”

탄식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를 기점으로 여인의 손이 새하얀 광채로 물들었다.

이내 순도 높은 신성력이 체내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제야 거칠던 호흡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따스한 온기에 나는 지친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완치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성녀가 달려왔으니 죽음은 면할 수 있을 터였다.

죽은 이만 아니라면 누구든 살려낼 수 있다던 이가 아닌가.

부작용이나 장애가 염려되기는 하지만, 당장은 성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눈을 감으려 했다.

누군가의 초조한 음성이 나를 채찍질하지 않았다면.

“……응급처치가 끝났으면 어서 이곳을 떠야 해.”

나의 기나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스르륵 감기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떠졌다.

나는 죽겠다는 눈빛으로 목소리의 진원지를 쫓았다.

그곳에는 옥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중성적인 미남, 유렌이 서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초조한 낯빛이었다.

“누님, 아직이에요? 서둘러야…….”

“시체 거인은 이안 선배께서 쓰러트리셨어요.”

유렌의 눈동자가 슬쩍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세리아가 다소 차가운 어조로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보다시피 이안 선배의 몸 상태가 위중한데, 괜히 시간에 쫓기다가…….”

“……쓰러트려? 뭘?”

세리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유렌이 때에 맞지 않는 농담이라도 던졌다는 태도였다.

“시체 거인을…….”

“아니야.”

하지만 세리아가 재차 내뱉은 말도 유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도리어 유렌은 마른세수를 하며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야, 못 쓰러트려… 그런 종류의 괴물이 아니라고.”

나는 그 말에 일순 넋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쓰러트리지 못했다고?

무심코 솟아난 의문이 내 목에서 새어나왔다.

“……핵까지 파괴했는데?”

유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어라 설명을 하려는 듯 팔짱을 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말이지…….”

유렌의 친절한 설명이 끊긴 것은 그 직후였다.

전장에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 불길한 조짐에 세리아와 셀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나는 곧장 세리아에게 부탁했다.

“……아이린 경 데리고, 당장 도망쳐. 어서!”

그 시체 거인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았던 아이린 경이었다.

한동안 운신이 불가능할 터였다.

세리아는 얼떨떨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어딘가를 향했다.

성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누님, 빨리 하셔야 합니다… 이제 곧 일어날 거라고요!”

셀린 또한 심상찮은 분위기에 빳빳이 긴장해 있었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 일어나다니요……?”

“핵을 잃었으면, 새로운 핵을 찾아야지.”

흐, 하고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새끼.

나는 미래의 ‘나’를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쓰러트릴 수 없는가.

왜 도망쳐야만 하는가.

그 대답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비척거리며 시체들이 몸을 일으킨다.

시체 거인의 몸을 이루고 있던 시체들이었다.

무한히 재생하는 시체 거인의 육신은 수백에서 수천 구의 시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시체 거인으로부터 떨어지는 즉시 녹아내렸으나, 아직까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시체 또한 존재했다.

그것들이 다시 핏기 없는 다리로 지상에 섰다.

유렌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런 씨발.”

얼핏 보기에도 우리만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숫자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과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있긴 했으나, 유렌이 어서 도망치자고 하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성녀는 그제야 응급처치를 끝마친 듯했다.

“……됐다! 유렌, 이안을 업을 수 있겠어?”

“당장 출발합시다.”

유렌은 군말 없이 나를 등에 들쳐메더니,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셀린은 성녀를 업고 달리게 되었다.

얼이 빠져 있던 내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막아야지, 지금 대피하지 못한 영지민들이 있는데……!”

“그래도 네가 박살낸 덕에 시간을 번 거야. 적어도 한동안은 이 주변에서만 시체들이 배회할 테니까… 큰일 했다.”

유렌은 나를 달래듯이 말하며 질주를 계속했다.

공간이 압축되며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조갈증이 이는 듯했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을 더한다면……!”

“소용없어, 저 녀석들도 재생하니까.”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대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못하고 주위를 훑었다.

어떻게든 수가 없나.

시체 거인이 이토록 약해진 상태는 드물 터였다. 악신의 권속이 부활하면, 또 다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최소한 오늘 이상의 전력이 투입되어야 하리라.

그러던 찰나, 징그러운 울부짖음이 귓가를 스쳤다.

키에에에에엑!

“꺼져!”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달려든 시체였다.

사족보행을 하는 시체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빨랐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시체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붙었다.

하지만 유렌은 익숙하다는 듯 시체에게 발길질을 먹였을 뿐이었다.

시체는 또 다시 괴성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굴렀고, 유렌은 다시 한 번 땅을 박찼다.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시체들은 기묘할 만큼 나와 유렌을 노리고 달라붙었다.

최소한 칠할 이상이 나와 유렌을 쫓고 있는 양상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쟤네 왜 저래?!”

“네가 시체 거인을 쓰러트렸으니까, 그 기억이 남아있는 거야!”

다시 말해 복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죽은 시체들 주제에,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차마 조소를 터트릴 수는 없었다.

달려드는 시체들의 기세가 워낙 살벌했던 탓이었다.

나를 업고 있던 유렌은 손조차 쓸 수 없었다. 당연히 대응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 결과, 유렌은 결국 땅바닥에 엎어진 시체에게 발목을 물리고 말았다.

유렌은 이를 악물며 버티려 했으나, 그 짧은 틈새에 시체의 팔이 유렌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유렌이 엎어졌고, 나는 또 다시 땅을 굴렀다.

난데없는 도주극을 벌여야 할 판이었다.

적을 쓰러트리고도 말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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