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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85화 (285/649)

〈 285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8)

* * *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하나 있었다.

응급처치가 끝나 죽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비록 목에서는 다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비틀비틀 일으켰다.

유렌은 다급히 검을 꺼내들며 외쳤다.

“이안,도망쳐!어차피 이 녀석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어!”

그 말대로였다.

시체들은 곧장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쇄도하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탓에 원거리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손도끼를 들고 시체 하나의 골통을 박살내 버렸다.

팍,하고 핏물이 튀며 부패한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는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달음박질을 쳤다.

때때로 달려드는 시체들은 검과 도끼로 처리했다.

이마저도 성녀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봐야 나는 중환자에 불과했다.

결국 나는 밀려드는 시체를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던져야 했다.

팍,하고 내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히는 시체들의 손톱.

나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손도끼를 던졌다.

펑,펑,하고 시원스레 시체 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되돌아온 손도끼를 들고,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시체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불쾌한 소리가 괴물들의 목을 긁고 흘러나왔다.

나는 흐,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글렀다.

시체들이 땅을 박차고,나는 그들과 한참이나 뒹굴어야 했다.

은빛의 궤적이 그려질 때마다 시체들이 동강 났다.

조각난 시체들은 꿈틀거리며 제 몸이 재생하기를 기다렸다.나는 또 다시 달려드는 시체 하나의 골통을 손도끼로 으깼다.

그리고 손도끼를 내던져 두 구의 시체를 처리하는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끝이 없었다.

종래에는 체력이 바닥나,나는 고작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시체들은 아직 수십이나 남아있었다.

버티다 보면 지원이 오리라 생각했는데,지체되는 시간이 길었다.그 점이 못내 의문이었으나 나는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눈앞이었다.

마지막까지도 시체 거인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검 손잡이를 꾸욱 쥐었을 찰나.

내달린 시체 하나가 충차처럼 몸을 내던졌다.

검을 휘둘러도 동강난 시체가 내 몸을 강타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내가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또 다른 시체들이 달려들어 나를 덮쳐 들었다.

푹,하고 내 위에 올라탄 시체의 가슴팍을 검이 관통했다.

나는 급히 시체를 치워냈으나,남은 시체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기민했다.

결국 나는 시체들을 차내며 급히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만신창이인 몸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수십의 시체들이 핏빛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다가온다.

저들만,저들만 없애 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내 고향에서 악신의 흔적을 모조리 치워버릴 수 있을 텐데.

그 안타까움과,혼미해져 가는 정신이 일치를 이루지 않던 그때.

내 신경이 단번에 곤두섰다.

묘한 감각이었다.

눈앞에서 수십 구의 시체가 나를 노리고 있는데,도리어 나는 시선을 등 뒤로 향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니,착각이 아니었다.

정지한 시공간을 뚫고 참격이 내달렸다.

새하얗게,단절.

자욱하던 안개가 모조리 걷혀 버렸다.

그 너머에서 드러난 광경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내 등 뒤로도 접근하는 시체들이 못해도 수십이었다.시체 거인의 몸을 이루고 있던 시체들은 그토록 바글바글했다.

그런데 그 수백에 이르는 시체들이 미동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들의 몸에는 순백의 궤적이 새겨져 있었다.

일직선으로 세계를 절단하는 그 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운동량을 잃은 시체들 사이로,저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검은 정복을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칼 한 자루가 들려있었는데,그것이 작금의 기적을 연출해 냈다는 것은 명확해 보였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사내는 가죽 장갑을 고쳐 끼면서,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그리고 막혀 있던 시간의 흐름이 재생했다.

폭죽처럼 핏물과 살점이 비산한다.

그럼에도 그 사이를 걷는 중년의 옷에는 아무런 오물도 묻지 않았다.

솟구치는 핏물과 살점들이 중년을 환영하는 팡파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윽고 그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름 전력으로 달려왔는데,조금 늦었군.”

그와 함께 사내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남은 파괴의 흔적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사투를 증언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흡족한 듯한, 그리고 묘한 투쟁심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인상 깊은 활약이었네,이안 페르쿠스…내 명예를 걸고, 반드시 사례하지.”

후두둑 핏물이 쏟아져 내리며 안개가 흩어졌다.

절단된 시체들에게서는 재생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나는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중년의 정체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가만히 사고했을 따름이었다.

혹시 말로만 듣던 마스터가 실존한다면,저 자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 필요했다.

그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로.

**

짧은 꿈이었다.

혼곤한 잠에 빠진 사이, 몽롱한 정신이 부상했다.

나는 어느덧 낯선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빛도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광원이 존재하지 않는데, 사물의 구별은 뚜렷했다. 도리어 주위를 둘러싼 수없이 많은 균열 사이로 여러 장면이 재생되고 있을 정도였다.

자세히 살펴봐도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결같았다.

울음, 비명, 혹은 후회와 원독으로 가득 찬 소음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낯익은 뒷모습이었다.

사내는 내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였다.

다만 말없이 어떠한 균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간을 둘러싼 무수한 틈새 중에서도, 단연 거대한 균열이었다.

그곳에서는 유독 아무런 광경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이.

사내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결(?)과 해(?)는 제대로 터득했나?”

다짜고짜 던져진 본론이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마저 생략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퉁명스러운 반응을 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야말로 사내다운 언행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략적으로는?”

“결과 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는 없어.”

그러면서 사내는 빙글, 하고 의자를 돌려 내게 시선을 향했다.

이 텅 빈 공간에서 어떻게 의자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에 대해 물어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상대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굳이 의문 하나하나를 해소해줄 만큼 상냥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사내는 늘 그렇듯 피로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 기억을 들춰봐도 마찬가지야… 심오한 기술일수록 그에 걸맞은 이치를 품고 있지. 이제부터는 편법도 통하지 않아.”

‘심오한 기술’이라.

나는 일전에 사내가 꺼냈던 말들을 떠올렸다.

‘소드 서클의 오의’나 ‘용혈 문자의 비밀’이라고 했었지.

솔직히 호기심이 일기는 했으나, 나는 또 다시 의문을 참아냈다.

까닭은 방금 전과 동일했다.

어차피 말해주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결과 해’를 완전히 익힌 뒤에야 사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사내의 고집을 꺾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다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기로 했다.

“……여긴 어디야?”

“시공의 틈새.”

사내의 대답은 짧고 담백했다.

물론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한 길이는 아니었다.

내가 여전히 의아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자, 사내는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네 세계의 외부인이야. 당연히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한계가 있지… 그렇다고 내 세계로 함부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이렇게 어정쩡한 곳에서 지내고 있는 거다.”

“그럼 나는 왜 이곳에 온 건데?”

“당연히, 내 기억을 너무 훔쳐본 탓이지.”

사내의 음색에는 은은한 책망의 감정이 어려 있었다.

“말했잖아, 애송아… 나는 외부인에 불과해. 네가 나와 가까워질수록, 너도 그곳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어. 종래에는 네가 이곳으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르지.”

“……나 이제 못 돌아가는 건가?”

“아니.”

이어지는 내 의문에 답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묘한 확신이 있어서 더욱 설득력을 주는 어조였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쩌다 한 번씩 흘러들어오는 정도겠지… 그리고 체류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서 그는 눈짓으로 내 하체를 가리켰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어느덧 내 하체는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사라지기 직전의 신기루처럼.

사내는 후, 하고 깊은 숨을 내뱉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보자, 애송아.”

어떻게 이곳에 찾아올 수 있냐고, 내가 또 다시 질문을 던지기 직전.

맹렬한 두통이 송곳처럼 뇌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내 육체는 이미 연기처럼 흩어진 뒤였다.

그리고 시야가 반전하고,

세계가 빙빙 돌고,

종래에는 모든 의식이 어둠에 잠긴 직후.

헐떡이면서, 나는 눈을 떴다.

얼떨떨한 내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침실이었다.

페르쿠스 저택 내에 존재하는, 나의 침실.

그제야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돌아왔구나.

페르쿠스 저택이 멀쩡한 것을 보면, 영지 또한 파멸을 피해갔을 터였다.

오랜 시간 누워있었던 탓인지 전신에 힘이 없었다.

근육이 빠진 후유증이었다.

아무래도 몸 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나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면서도, 더듬더듬 상체를 일으켰다.

갈증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냉수로 목을 축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수통이 보이지 않아 난감함을 느끼고 있을 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머리에 얹힌 커다란 고깔모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슬픈 낯빛을 한 채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쟁반이었다. 그 위에는 물수건을 비롯해 병간호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 올려져 있었다.

엘시 선배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녀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평상시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엘시 선배."

쨍그랑, 하고 엘시 선배가 들고 있던 쟁반이 떨어졌다.

그리고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음을 꾹꾹 눌러담는 듯하다가, 이내 버틸 수 없었는지 내 품에 몸을 던졌다.

폭, 하고 안기는 소녀의 체향이 달콤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시 선배를 끌어안았다.

"다, 다들… 흐윽, 주, 주,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 죽는 줄 알고, 흐어어엉……."

펑펑 울음을 터트리는 엘시 선배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일순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내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털어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지금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문제였다.

한동안은 엘시 선배를 달래주어야 할 듯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집으로 되돌아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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