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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86화 (286/649)

〈 28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79)

* * *

내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으로 저택이 떠들썩해졌다.

그 탓에 나는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여인들과의 재회가 유독 극적이었다.

우선 내 품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엘시 선배는 물론이고, 성녀 또한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무너져 내렸을 정도였다.

늘 당당하고 도도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처럼 연약한 반응을 보이니,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셀린과 세리아도 격한 반응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를 본 셀린은 비틀비틀 걸어오다가, 내 가슴팍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내 품을 파고들어 소리없는 흐느낌을 토해냈다.

나는 한동안 셀린의 등을 토닥여줘야 했다.

엘시 선배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리아는 내게 차마 다가오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세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쓰러진 채로 눈물만을 보였다.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재회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껏 중상을 입은 적은 여럿 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아직 목숨줄이 붙어 있는 쪽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수렵제와 고아원, 귀향제까지 어느 하나 간단한 시련이 없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고,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었던 전투들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병상 신세를 진 적도 허다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직후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럴 때마다 내 지인들이 거센 반응을 보이곤 했으나, 오늘 목격한 여인들의 모습은 조금 궤가 달라 보였다.

중상을 입고 쾌차한 사람을 마주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의 직감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어떻게 살았냐?"

레토의 인사말이었다.

한 달 만에 눈을 뜬 친구에게 던진 말치고는 가관이었다.

물론 화는 나지 않았다.

레토는 원래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여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던 참이었다. 까닭조차 알지 못하고 우는 여인을 달래는 일은 고역에 가까웠다.

차라리 레토처럼 담백한 반응이 더 대응하기 편했다.

나는 잠깐 턱을 쥔 채 생각에 잠겼다가, 혹시나 싶어 질문을 던졌다.

"……나 죽을 뻔했어?"

"그럼 살 줄 알았냐?"

퉁명스러운 반문이었다.

동시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지적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내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와, 나 진짜 죽을 뻔했구나.”

“그 덕에 지난 한 달은 지옥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레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낯빛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레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의 몸이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넌 모를 거다, 소중한 것을 잃기 직전의 여자가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나는 그 심연의 일부를 맛본 거야.”

“……그렇게 심했다고?”

“말도 마라.”

그렇게 말하는 레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생각해도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었던 듯했다.

레토는 씹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에 구출한 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어. 당장 신물부터 시작해서 제물로 쓸 만한 것은 싸그리 긁어모았는데, 그러고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신물이야 더 가져오면 되잖아?”

내 뻔뻔스러운 반응에 레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나를 타박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이 시건방져 보이긴 해도,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나라고 아무런 보험도 없이 몸을 막 굴리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단 용혈 문자의 소유자였고, 황가의 피를 이은 황녀에게 구명지은을 베푼 전적도 있었다.

하물며 내 부상은 악신의 권속을 상대하다 얻은 것이었다.

스스로 말하기에는 낯부끄럽지만, 그날의 전투는 영웅적인 분투에 속했다. 당연히 제국이든 성국이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불해야 할 터였다.

다시 말해 신물 하나나 둘 정도는 받아낼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내 담당사제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성녀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최고의 의료 인력이었고, 신물만 주어진다면 어떠한 부상자라도 치료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목숨만 붙어있으면 된다.

그러한 일념으로 나는 싸워왔던 것이다.

하지만 비전문가의 신념은 때때로 끔찍한 결과를 도출하는 법이었다.

“치료에도 때가 있는 거야… 네 부상이 처음이었으면 모르겠는데, 그간 너무 무리했어. 어디서 신물을 빼오기도 전에 상태가 악화하더라고.”

그럴 수가 있나.

내 머릿속에 남은 중상의 기준은 엠마였다.

당시의 엠마는 창자를 쏟았음에도 한참이나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솜씨 좋은 사제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목숨은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어떠한 부상이더라도 제물만 있으면 다 되는구나.

성녀가 지나치게 유능한 치료요원이었던 탓에 빚어진 오해이기도 했다. 여태껏 성녀가 귀가 따갑도록 내게 경고를 해도, 결국 나는 번번이 눈을 떠왔으니까.

하지만 이는 내 일방적인 생각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의식을 되찾은 나를 본 성녀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 당차던 여인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더니, 울먹이며 두 손을 모았다.

‘주여, 주여 감사합니다. 우, 우리 이안을 살려 주셔서… 흐윽, 흑…….’

맹세코 성녀가 그처럼 흐느끼는 모습은 처음으로 보았다.

고작해야 눈물 맺힌 눈으로 내게 투정하던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폐를 끼친 듯했다.

결국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여야 했다.

“그, 미안했다. 괜한 걱정을 끼쳐서…….”

“또 한 번 그러면 너는 내 손에 죽는 거야.”

물론 레토는 코웃음을 치며 타박을 덧붙였을 뿐이었다.

“다음에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과해라… 특히 여자들하고는 오붓한 시간을 지내는 편이 좋을 거야.”

“……왜?”

“그냥 하라면 해, 새끼야.”

이제는 의문에 답조차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레토의 조언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레토는 절대 내게 손해가 갈 조언을 하지 않았으니까.

또 성녀나 엘시 선배가 신경 쓰이기도 했다.

셀린과 세리아는 본래부터 여동생 같은 느낌이라, 울음을 터트릴 때도 그다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단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을 뿐.

그러나 성녀와 엘시 선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내게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성녀야 말할 것도 없고, 엘시 선배도 일단은 ‘선배’이지 않은가.

둘의 눈물을 보니 괜히 속이 쓰렸다.

오랜 시간을 써서 달래줘야 할 터였다.

그러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먼저 내게 다가올 테지만 말이다.

특히 엘시 선배는 내 품에서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서, 성녀가 성국의 유술로 제압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의 의문을 정리한 내 입에서 또 다른 의문이 흘러나왔다.

“레토, 내가 쓰러진 직후에…….”

“일이 어떻게 됐냐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토는 곧장 내 말을 낚아챘다.

그는 내게 준비해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우선 페르쿠스 일가에 대한 처분은 유예되었다.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제국과 성국의 협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사기를 당했다는 점이 참작되었다.

더불어 의식이 끊기기 직전에 보았던 검사의 정체도 들을 수 있었다.

제국의 검공.

황실의 큰 어른이자 제국의 유일한 마스터가 친히 나선 것이다.

하기야 그만한 검객이 아니라면 그날의 기적을 재현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듣기로 그는 페르쿠스 일가가 선처를 받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가 마지막에 말했던 ‘사례’가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워낙에 바쁜 몸이라 먼저 떠나갔다고 했다.

다만 반드시 나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혹여 내가 의식을 차리면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설적인 검수와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듯했다.

기별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제국 황실의 눈은 어디에나 있었고, 저택에는 여전히 네리스 선배가 머무르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의식을 차린 직후 그 또한 나의 안부를 알게 되었으리라.

레이놀드 경 또한 내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는 떠나가기 전에 누차 부모님과 면담을 나누었다고 했다.

“자작께서 허가만 해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약혼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그 노골적인 제안에 아버지가 무척 곤혹을 치러야 했다고 들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도 내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또라이 공자님께 전해 주십시오. 전설적인 전투에 함께해서 영광이었고, 혹 북부에 정착하고 싶다면 환영이라고.”

일천의 사병을 이끌던 노기사, 알렉스 경의 말이었다.

그 까탈스러운 북부인들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당신은 북부에 어울리는 전사’라는 뜻이었으니.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갔다.

다만 그중에도 풀리지 않은 의문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럼 가면 쓴 괴한은?”

레토는 내 질문에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잊고 있던 문제를 마주한 반응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른다고?”

“그래, 흔적도 없어. 그 이후로 행적을 드러낸 적도 없고.”

나는 찝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저택에 위험요소를 하나 남기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의혹을 해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조사를 해보기로 하고, 나는 제일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리아는 어떻게 됐어?”

툭, 하고.

유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레토의 혀가 정지했다.

그의 입술이 조용히 꾹 닫혔다.

불길한 침묵이 나와 레토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는 갑작스레 불안을 느꼈다.

“……레토? 리아는 어떻게 됐냐니까?”

“리, 아… 그래, 리아말이지…….”

그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능글맞은 그가 이토록 나를 어려워하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내 입에서 재차 재촉의 말이 흘러나오려던 찰나.

“뭐라고 해야 할까…….”

레토는 한동안 표현을 고르듯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허탈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망가졌어.”

내가 알기로, 사람에게 쓸 만한 표현은 아니었다.

**

리아는 생각했다.

나는 괴물이고, 오빠를 죽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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