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87화 (287/649)

〈 287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0)

* * *

누구도 신뢰하지 못하는 이는 외로워진다.

불신이란 일종의 저주였다.

남을 믿지 못하는 만큼 자기과신만이 강해진다.

등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 그러니 삶의 모든 짐을 홀로 지탱해야만 했다.

때로는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꺾일지언정.

그들은 끝내 아무도 신용하지 않으며, 그렇게 서서히 죽어간다.

그것이 델피렘이 낳은 첫 번째 죄악인 ‘오만’이었다.

오만은 ‘자살’이라는 사인을 탄생시켰다.

자신만을 믿었기에 자신을 죽이고 마는 역설이었다.

그러므로 자살은 가장 외로운 죽음이었으나, 세상에는 그보다 비참한 처지에 처한 이들도 간혹 존재했다.

자기 자신마저 신뢰할 수 없는 인간들.

그들의 삶은 차라리 지옥에 가까웠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저함의 확신조차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한때 스스로를 ‘리아 페르쿠스’라고 생각하던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믿지 못했다.

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악몽의 출발선은 언제나 동일했다.

푹, 하고 날붙이가 살갗을 파고드는 감촉이 전해졌다.

소름이 끼칠 만큼 선명한 촉감이었다. 리아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았다.

추레한 죄악의 흔적이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인 괴물의 손.

“아, 아니야…….”

애절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면 흐릿해지는 금빛의 동공이 보였다.

첫사랑과 소녀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자, 장해물을 상징하는 색조였다.

‘혈연’이라니.

이 얼마나 잔혹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리아의 죄는 더더욱 명확해졌다.

제 첫사랑이자 오빠를 찔러 죽인 여자였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거, 거짓말…….”

마냥 부정의 말만을 읊으며, 리아는 얼굴을 오라버니의 품에 파묻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고동과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

불현 듯 칠흑의 어둠 속에서 광명이 비추는 듯했다.

리아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악몽은 시작에 불과했다.

새하얗게 무너져 내리는 시야 사이로, 새로운 풍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페르쿠스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그곳에는 괴로운 안색을 한 여인이 보이고 있었다.

지난 며칠 사이 파리해진 낯빛이었으나, 그 미모는 여전히 빛이 났다.

은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과 진주처럼 영롱한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었다.

세간에서는 ‘성녀’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언제나 자애로운 말을 읊던 그녀의 입은 꾹 다물어져 있었다. 앙다물어진 입술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고집을 부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에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물론 쓸데없는 반항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성녀 또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말없이 시선을 피하던 성녀의 입이 기어코 열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 틈새로 흘러내렸다.

“……최악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완곡한 언어였으나 그 진의는 명백했다.

응접실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국의 행정관 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레이놀드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 내쉬었고, 페르쿠스 자작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페르쿠스 부인에 이르러선 정신이 혼미한 듯했다. 옆에 있던 아론이 그녀를 부축하여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의외로 나머지 일행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탓일지도 몰랐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려 했기에,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만 했다.

그 역할을 자처한 쪽은 레이놀드였다.

“최악의 가능성이라 하시면……?”

성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이내 물기에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레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천신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재차 확인한 현실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곳곳에서 한숨과 탄식이 새어나왔다.

셀린과 세리아는 얼이 빠져 버렸고, 엘시는 울컥한 눈빛으로 성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쪽은 레토와 유렌 정도밖에 없었다.

레토는 늘 그렇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느 쪽이 더 높습니까?”

좌중의 이목이 레토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든 말든, 그는 다소 다급해 보이는 기색으로 되물었을 따름이었다.

“생존, 아니면 사망… 어느 쪽의 확률이 더 높습니까, 냉정하게.”

성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내리깔렸다.

누가 봐도 불길한 조짐이었다.

심약한 페르쿠스 부인은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결국 정적을 견디다 못한 쪽은 성녀였다.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에 희미한 울먹임이 감돌기 시작했다.

“……후, 후자요.”

“대략 몇 할 정도로?”

그렇게 묻는 레토의 눈빛은 조금 사납기까지 했다.

마치 먹잇감을 문 맹수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사내의 눈동자는 어느덧 우묵하게 가라앉은 뒤였다.

아무리 성녀가 대답을 피하더라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온갖 인간군상을 상대해 온 성녀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성녀의 입에서 괴로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아, 아직 치료 초기라… 지켜봐야겠지만, 이대로라면 치, 칠할 이상의 확률로…….”

“……웃기지 마.”

더듬거리며 뱉어지는 물기 섞인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소녀가 하나 있었다.

엘시 라이넬라였다.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그 얇다란 팔에서 어떻게 그만한 힘이 나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목청을 돋우며 외쳤다.

“지, 지금껏 잘만 살려왔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살아 있잖아… 아직 숨 쉬고 있잖아! 너, 천신의 가장 사랑받는 처녀라며!”

한 걸음을 내딛으며 고생을 터트릴 때마다, 성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훌쩍였다.

성녀가 일행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성녀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당당하고 도도하게 그녀와 맞서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려낼 수 있다고, 두고만 보라고.

하지만 성녀는 위로에 불과한 말이라도 그렇게 꾸밀 수 없었다.

생명이란 그토록 귀중한 것이었으므로.

엘시의 뇌리를 증기가 훅, 끼치고 지나갔다.

비틀거리며, 엘시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절절한 감정이 맺혔다.

“살려내…….”

간절한 목소리였다.

목젖에서 이글거리던 희미한 울먹임으로 토해졌다.

“사, 살려내라고… 당신,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

엘시는 그 무렵에서 더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풀썩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렸기 때문이었다.

“뭐든, 뭐든 할 테니까… 응? 우, 우리! 우리 이안 님만 살려 주세요. 나 죽여도 돼! 그러니까, 흐윽, 흑… 제, 제바알…….”

그토록 노기등등하던 소녀의 기세는 단숨에 꺾이고 말았다.

도리어 이제는 발목이라도 붙잡고 애원할 태세였다.

차마 조카의 눈물을 보기 힘들었는지, 레이놀드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 버렸다.

분위기는 더욱 우울해졌다.

그 정적을 깨친 쪽은 성녀였다.

“……나라고.”

울컥, 해서 성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엘시를 노려보았다.

“나라고 구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모, 모든 수를… 최선을 다해봤다고요! 하지만 하필 마신의 권속한테 당한 터라… 그, 그래서 사흘 밤낮을 자지도 않고 기도만 했어요! 그렇게라도 해서 이안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엘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절망 어린 푸른 눈동자가 성녀를 향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초라해 보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분노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던 성녀였다.

그런데 정작 화를 해소할 대상이 저러고 있으니, 성녀도 더 힘을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성녀의 무릎이 힘없이 굽혀졌다.

땅을 짚은 채로, 성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재생했다.

“사, 살아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이 성녀의 숨김없는 진심이었다.

하다못해 이안이 상대한 적이 마신의 권속만 아니었다면, 성녀는 이안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악신의 힘은 신성력의 효력을 무마시킨다.

시체 거인이 지닌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안에게 타격이 누적될 때마다, 그 안에는 악신의 힘이 파고들고 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안의 목숨은 오직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꿇어앉은 자리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주여, 제발.”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그 암울한 풍광에 좌중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워졌다.

톡, 톡, 톡.

그렇게 몇 번이고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고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 소음을 일으키는 장본은 제국의 행정관 아서였다.

그는 불안한 낯빛으로 검지를 움직이다가,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다만 이안 공자의 영웅적인 혈투는 길이길이 남아 기록될 겁니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살벌한 음색이었다.

흠칫, 몸을 떤 아서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그곳에는 은은한 분노로 타오르는 황갈색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셀린 하스터.

그 이름을 떠올린 아서는 실수였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만약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안 공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검공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국은 그에 알맞은 대우를 할 테고… 다만 문제가 하나 남아 있잖습니까?”

셀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껏 보아온 아서는 그다지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직무에 충실했고 성실한 편이었으나, 또 소시민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마주한 소시민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일치했다.

책임 떠넘기기.

“아직 이곳에는 암흑교단이 빚어낸 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안 공자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는 존재가.”

셀린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치게 이안에게 고분고분하던 아서였다. 그는 이안이 지닌 용혈 문자의 내막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용혈 문자의 소유자가 사망하는 사건은 막대한 책임을 동반했다.

설령 그 원인이 전적으로 용혈 문자의 소유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황실이란 그런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희생양을 사로잡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지도 몰랐다.

셀린의 눈동자가 경멸로 물들었다.

“……설마 지금.”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하도 위급한 상황이라 유야무야되긴 했지만…….”

셀린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아서는 절묘한 시점에 본론을 꺼냈다.

그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리아는 그제야 문득 제 존재를 눈치 챘다.

어둡고 구석진 자리, 그곳에서 덜덜 떨면서 성녀의 말을 듣고 있던 제 처량한 모습을.

“……저 괴물에게 책임을 물읍시다. 이안 공자를 칼로 찌른 대가를 치러야죠!”

그 한 마디에,리아는 그만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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