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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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은 아서의 말을 듣자마자 울컥해서 몸을 일으켰다.
“이 아저씨가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이미 정신적 한계에 몰려 있던 셀린이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그녀가 아서의 멱살을 잡았고,그 둘을 말리려고 사람들이 일어서며 응접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성과 울음이 울적한 화음을 이루었다.
그 너머에서,리아는 덜덜 몸을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니야…내,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데…사랑해서,너무 사랑해서 힘들었단 말이야…그,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파르르 경련하는 손을 내려다보는 리아의 눈동자에,
“내가…….”
피로 젖은 새하얀 손이 비쳤다.
사랑하는 오빠의 피였다.
“내,내,내가…….”
리아는 애써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엉덩이를 뒤로 질질 끌었다.발버둥을 치며 멀어지려고 해도 이곳은 이미 구석이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땅바닥에 남은 핏빛의 손자국이 그녀의 죄를 증언했다.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리아는 눈을 감은 채 엎어졌다.
그녀의 목에서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니야.”
주위의 소리가 먹먹해지며 리아는 칠흑 속에 홀로 남았다.
훌쩍이는 소리만이 남은 공허한 공간.
“아니야,아니야,아니야…….”
소녀는,그곳에서 한참이나 몸부림을 치다가.
“아니야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헐떡이며 눈을 떴다.
어둡고 눅눅한 곳이었다.
리아는 아직도 떨림이 잦아들지 않은 제 몸을 팔로 끌어안았다.
따닥,딱 하고 이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퍼트렸다.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또르르 흘러내렸다.
리아는 울었다.
“아,아니야…그,그럴 생각은 아니었어.흑,흐윽…미안해,미안해 오빠.나,나는…….”
모든 것을 부정당했다.
리아는‘페르쿠스’가 아니었다.
아니,도리어 스스로가 인간인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 깊이 사모하는 오빠를 제 손으로 찔렀다.
과연 어떤 인간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리아는 망가진 정신으로 사고했다.
그럴수록 결론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제국의 행정관이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돋우던 그 말.
“……나는,괴물인가 봐.”
리아는 실종되어 있었다.
누구도 모를 곳에 머문 지,벌써 며칠.
리아는 가뜩이나 야윈 몸으로 헛구역질을 했다.
괴물 주제에 배가 고픈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서.
소녀는 스스로를 말려죽이고 있었다.
**
리아의 실종 소식을 들은 나는 곧장 외출할 채비를 했다.
당연히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안,안 돼요!아직 당신 몸은 정상이 아니라니까요!보다시피 오랜 혼수상태로 대다수의 근육도 퇴화…꺄아아아악!”
나는 성녀의 말이 길어지자,말없이 주머니에서 물약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엠마가 준 근력 증강제였다.
마력을 써도 서 있기가 힘들었는데,약효가 도니 과연 거동할 만은 했다.
물론 성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미쳤어!미쳤어,미쳤어,미쳤어…그,그 무리를 하고도 또 약을……!”
“더 만류하면 한 병 더 마십니다.”
그러자 성녀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더는 나를 제지하지 못했다.
다만 이슬이 맺힌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쏘아볼 뿐이었다.
“……어차피,내 마음 따위는 상관없죠?”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인 채로,성녀는 그렇게 씹어뱉듯 말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 어린 감정의 농도가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 두면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기세였다.
내 눈동자가 말없이 성녀를 응시했다.
“매번,매번,매번…나 혼자만 마음 졸이고,불안해하고,외로워하고…그,그래도 당신은 신경도 쓰지 않잖아요!내가 그렇게 만만해요?!나,나 이래봬도 좋다는 남자가 줄을 서는…….”
“성녀님.”
성녀는 내 진중한 어조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을 내딛자,그녀의 몸이 절로 움찔 떨렸다.
그 흔들리는 연분홍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레토가 알려준 적이 있었다.
여자가 화를 내면 달래주는 법이 있다고 했는데.
이내 그 해답을 찾아낸 내 입이 부드럽게 열렸다.
“……예쁘네요.”
성녀의 호흡이 멎었다.
열렸다,닫혔다.
한동안 개폐 운동을 반복하던 그녀의 입술이,곧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소리를 내뱉었다.
“무,뭐,뭐라고요?”
“예쁘다고요.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그러자 성녀의 기세가 단숨에 일변했다.
이슬까지 맺혀 있던 연분홍빛 눈동자가 슬쩍 나를 피하더니,성녀는 낯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검지가 괜히 제 옆머리를 돌돌 말았다.
“……그,그래요?무,뭐.다,당연한 이야기긴 한데.”
“네,예쁘네요.”
태연한 체를 하던 성녀가 다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요,요즘 마음고생이 심해서 조금 초췌하긴 한데…….”
“그래도 예뻐요.늘 그랬듯이.”
연달아 던져진 내 칭찬에 성녀의 낯이 한결 밝아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히죽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는 못했다.
성녀는 새침한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팔짱을 껴 제 가슴을 받치는 폼이 꽤 의기양양했다.
“그,그래도 시력에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네요?하기야,또 미색으로는 제가 아카데미에서 일절…….”
“그럼,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우쭐해진 성녀를 두고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1층으로 내려가면 호시탐탐 내 품을 노리는 엘시 선배에게 노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혹은 꼭 한두 걸음 뒤에서 날 따라오는 세리아가 붙거나,내가 무어라도 하려 치면 호들갑을 떠는 셀린을 만날지도 몰랐고.
그럴 바에야 다소의 충격을 감내하는 편이 나았다.
성녀는 내 과감한 탈출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이,이안!지금 어딜…꺄아아아아아악!내,내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녀는 내가 추락하는 꼴을 보자마자 또 다시 비명을 토해냈다.
쿵,하고 충격파가 몸 안을 뒤흔드니 뼛속까지 아려왔다.
몸이 정상이었으면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고작2층에서 떨어지며 마력까지 썼는데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나는 크으,하고 옅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녀에게 손을 흔들어 멀쩡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성녀는 울먹거리면서도 결국 나를 놓아주었다.
또 물약을 마시겠다는 협박이 유효했던 듯했다.
스스로 주장하기로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데,내가 볼 때는 어딜 봐도 만만한 여자였다.
그래서 또 귀여운 맛이 있었지만.
나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비명 소리를 듣고 누가 오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십중팔구는 나를 막으려 들 테니까.
뒤뜰을 넘어 뒷산을 향하는 내 등 뒤로 묘한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이제는 익숙한 기척이었다.
우뚝 걸음을 멈춘 내 입에서,누군가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네리스 선배.”
“네,이안 님.”
그림자가 탁 내려앉으며 여인의 형상이 드러났다.
갈색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었다.
제국 첩보부 요원인 네리스 선배였다.
감히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완연한 복종의 태도였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나는,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마침 그녀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던 참이었다.
제국의 검공은 제국 첩보부 소속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검공을 데려왔을지는 명백했다.
“지난번에는, 신세를 졌습니다.”
네리스 선배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하다가,나와 눈이 마주친 뒤에야 화들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을 따름이었다.
“아,아닙니다!단지 이안 님의 명을 따랐을 뿐인데…….”
“그래서 고마워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재차 말했다.
“……의심하지 않고 믿어줘서.”
네리스 선배는 연이은 상찬에 낯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존재하는 하는 모양이었다.
인간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네리스 선배를 일별하고,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의 일이었다.
“여동생 분을 찾으십니까?”
갑작스레 던져진 물음에,내 눈동자가 흘깃 네리스 선배를 향했다.
네리스 선배는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혹시 몰라 미리 행방을 추적해 두었습니다.말씀만 하신다면 곧바로 안내…….”
“괜찮아요.”
나는 감사의 뜻으로 눈웃음을 지으며,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아서.”
오빠니까 여동생의 동선쯤은 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뒷산을 오를 수 있었다.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된 탓인지 벌써부터 숨이 거칠었다.
이래서야,어디 가서 익스퍼트라고 으스댈 수도 없었다.
아카데미의 검술학부 재학생이라면,이보다 높고 험준한 산도 웃으면서 뛰어다닐 수 있어야 했다.
벌써부터 데렉 교수님의 쩌렁쩌렁한 타박이 귀에 울리는 듯했다.
‘의지,의지!’
처음 들었을 때는 참 끔찍했던 말이었는데,이제는 조금 이해가 갔다.
그래,의지다.
나는 벌써부터 무거워지는 다리를 이끌고 산을 올랐다.
중턱을 넘어서,정상으로 오르는 길목.
나는 그쯤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옆으로 새어나갔다.
그리고 걷고 걷다 보면 동네 꼬맹이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나온다.
세피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
그 한가운데에,느닷없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내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여간 오는 곳도,하는 짓도 뻔했다.
나는 슬쩍 구덩이의 깊이를 어림짐작했다.
예상보다 깊었다.
리아가 생각 이상으로 상심했다는 뜻이었다.구덩이에서 굴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리아는 무척이나 마음을 다친 듯했다.
그래서 나는 훌쩍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 후에는 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마른 나뭇잎들을 치워,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웅크린 소녀가 있었다.
이러고 보니 들짐승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던 그녀는,이내 서서히 눈을 떴다.
황금빛 눈동자과 황금빛 눈동자가 마주친다.
그리고 침묵.
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안녕,리아.”
그새 야위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에게.
“식사는 했니?”
언젠가 던졌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리아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한여름의 남매 상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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