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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89화 (289/649)

〈 28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2)

* * *

리아의 가출은 역사가 깊었다.

첫 가출은 리아가 저택에 온 지 2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서서히 내게 마음을 열고 있던 그때, 리아는 처음으로 내게 혼이 나 버렸다.

까닭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나치게 내게 달라붙는 것을 염려했던 기억이 났다. 시도 때도 없이 내 품에 안기거나, 뺨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배시시 웃거나.

고작해야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저지른 짓이 아닌가.

내심으로는 여동생의 귀여운 애교로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었으나, 페르쿠스 가문은 귀족이었다.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남매지간이라 해도 남녀는 유별했다.

리아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날은 몇 시간이고 리아를 찾아 헤매야 했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가족들과 사용인들이 꽤 애를 먹었다.

나중에는 영지민들까지 나서 리아를 찾았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리아에게도 최소한의 사리분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귀족이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온갖 범죄에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특히 어린 여자를 노리는 범죄자들 중에는 상식이 결여된 인간도 많았다. 그 탓에 리아는 아무도 모를 만한 장소를 제 임시거처로 삼았다.

그 위치는 언제나 달라졌다.

다만 리아가 어디로 피신하더라도 공통점은 존재했다.

바로 나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라는 점이었다.

무슨 기준으로 피신처를 고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몇 번이고 리아를 찾아나서다 보니, 나는 대략적으로 리아가 어디를 갈지 짐작이 갔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리아가 가출하더라도 말리지 않았다.

설령 내가 없더라도 며칠이 지나면 리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도리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편이, 리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기운을 차리는 데 유리한 면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번잡한 소음 속을 벗어날 권리는 있었으니까.

그래서 가족들은 암묵적으로 리아의 가출을 허락해 주었을 터였다.

나의 중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했지만, 리아의 고통은 그중에서도 가장 컸다.

암흑교단에 조종당해 나를 칼로 찌른 전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리아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의 의사가 아니었고,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만일 ‘가면의 괴한’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리아가 나를 찌를 일은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후회와 죄책감은 바위 속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파고든다.

심장이 쪼개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일으킬 때까지.

나는 이를 오늘에야 절절히 실감했다.

나와 가족들의 예상과 달리, 리아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 보였다.

며칠 굶은 탓인지 리아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러지 않아도 병약해 보이는 외모인데, 그보다 야위어 이제는 가냘프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툭 꺾으면 꺾일 듯한 연약함.

그야말로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

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던 리아는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제 얼굴을 가렸다. 굴을 파고드는 햇빛을 애써 가리려는 듯.

혹은 나를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오, 오지 마.”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다.

리아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그렇게 애원했다.

“제발 오지 마… 나, 나는 오빠 보고 싶지 않아.”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울먹임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이 애처로웠다.

제 모습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리아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또, 마음에도 없는 말 한다.”

“……진짜야.”

리아는 울먹이면서도 일부러 차가운 음색을 꾸몄다.

그래봐야 오빠인 내 눈과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리아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리아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나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다, 끝내는 굴까지 파고 들어간 그녀였다.

그야말로 어찌할 도리 없이 오빠를 사랑하는 여동생이었다.

나는 잠시 이 거짓말쟁이를 어떻게 혼내 줄까 고민했다.

그 사이에 리아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오빠가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

“나, 나는 오빠 따위 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가족도 아니잖아! 나도 알아, 이제… 난 그냥 대체품에 불과한 거…….”

‘대체품’이라니.

나는 그 끔찍한 낱말에 할 말이 없어 리아를 바라보았다.

교차된 팔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리아의 눈동자에서 물기가 비쳤다.

그 이슬은 곧 빗방울이 되어 내리리라.

리아가 얼마나 괴로울지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평생을 믿고 있던 모든 신념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느낌일 터였다.

그래서 리아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제 본심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어코 소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외쳤다.

“그러니 나 좀 그만 괴롭히고 나가……!”

“싫어.”

내 단호한 어조에 리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고집을 꺾는 건 늘 오빠의 몫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굴의 높이가 조금 낮아, 나는 허리를 굽힌 채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리아는 움찔 몸을 떨며 두려움에 젖은 눈빛을 했다.

질질 엉덩이를 뒤로 끄는 폼이, 내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만류했다.

“나, 나는 오빠 따위 보고 싶지 않…….”

“보고 싶었잖아.”

나는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향기를 떠올렸다.

한여름은 눅눅한 습기로 향긋한 냄새를 억누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향기 또한 존재하는 법이었다.

세피아 꽃의 향이 그랬다.

봄부터 여름까지 핀 이 꽃의 향기는 은은하면서도 질겨서,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때때로 나는 어떠한 추억에 잠기곤 했다.

리아한테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기사가 되어서 지켜주기로.

리아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그날의 추억 때문일 터다.

찾아주길 원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곳을 택했을 리가 없었다.

이처럼 소녀의 본심이란 한여름의 꽃향기와 같았다.

“그러니까 보러 온 거야… 예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거, 거짓말…….”

리아는 흐느끼면서, 또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바둥거리며 제 몸을 뒤로 미는 다리의 몸부림이 애잔했다.

“그건, 여동생이랑 했던 약속이잖아.”

“그래서 찾으러 왔잖아, 여동생.”

“……아니야!”

발작적인 외침이었다.

리아는 들불처럼 타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복잡했다.

분노, 증오, 자책, 불안, 그리고 절망.

마치 아픔의 원석들을 녹여 금빛 주괴로 만들어낸 듯했다.

“나, 나는 오빠의 여동생이 아니야! 그냥, 그냥…….”

푹, 하고 고꾸라지듯 소녀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는 두 팔로 제 머리를 누르며,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괴물이잖아.”

흐느끼는 소리가 처량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리아는 그제야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무, 무섭다고오… 내가 또, 오빠를 찌를까 봐… 내가 아니게 될까 봐, 그러다 오빠를 죽일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오빠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르고…….”

결국 리아의 걱정은 그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 친여동생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기뻐했던 그녀였다.

느닷없이 내 여동생이 아니라고 자책할 까닭은 없었다.

도리어 리아의 걱정거리는 다른 부분에 있었다.

또 다시 나를 찌를까 봐.

그러다 내가 죽거나, 혹은 리아를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것은 리아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를 제 손으로 해치는 심정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또 한 걸음을 내딛으며, 여동생의 이름을.

“……리아.”

“기대하게 하지 마!”

절규였다.

십수 년의 세월을 농축한 울부짖음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느덧 리아의 눈동자에선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오, 오빠는 항상 그래… 친절하고, 상냥하고, 그래서 멋대로 기대하게 만들잖아! 차라리, 차라리 몰랐으면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토해지는 절절한 음색은 나조차 모르던 비밀을 가리키고 있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던 내 눈이 의아하다는 듯 리아를 향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리아는 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내, 내가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데…….”

번민과 고뇌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또 멋대로 밀어낼 거잖아…….”

그리고 또 한 걸음.

“또 혼자 멀리 가 버려서, 나 외롭게 둘 거잖아……!”

그리고 비로소 지척.

“오빠는, 오빠는 이제 일개 시골 귀족 가문의 차남이 아니야… 나보다 더 예쁘고 대단한 사람들 옆에서, 어차피 그렇게 버려질 거라면……!”

나는 말없이 리아를 끌어안았다.

싫다느니, 보고 싶지 않다느니 하던 것과는 달리 반항은 없었다.

스르르 녹아내리듯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넌 내 여동생이야.”

그것이 내 숨김없는 진실이었다.

리아는 여전히 멍하니, 불신을 담아.

“……나, 가짜인데?”

내게 그렇게 물었고,나는 리아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도 있었다.

리아는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존재였다.

영원히‘진짜’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가짜,얼마나 잔혹한 삶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나는 그간 숨겨 두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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