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90화 (290/649)

〈 29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3)

* * *

“리아,나도 마찬가지야…네가 저택에 오기 전까지,내게는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 없었어.”

그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내 기억은 언제나 여동생이 떠난 저택으로부터 출발했다.

수리에 밝고 영특한 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으나,정작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유대를 나눈 적은 없었다.

다만 남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차마 내 기억이 시작되기도 전부터,수학을 깨치고 있었다면 천재의 범주에 속하던 아이였을 터다.

그렇게 마냥‘여동생’이란 인물을 멀게만 생각하던 어느 날,리아가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여동생이란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구나.

“그러니까 나한테‘여동생’은 네가 유일해…적어도 나한테는 네가 진짜야.누가 뭐래도.”

그것이 나와 리아의 올바른 관계일 터였다.

내게 있어 여동생은 리아뿐이었고,리아 또한‘진짜’로 남을 수 있는 상대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매가 서로에게 유일했다.

그러니까 더욱 소중한 관계였다.

“……그,그래도.”

울먹이면서,리아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귀여웠다.늘 그랬지만.

“나는,오빠를 찔렀는데?”

“남매잖아.”

쓴웃음을 지으며,나는 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남매끼리는 원래 그럴 때도 있는 거야.”

“……뭐야,그게.”

리아는 내 어이없는 변명에 흐릿한 말소리를 토해냈다.

조금쯤 풀어진 음색이었다.

겨울 들녘에 봄날이 찾아오듯 희미한 웃음기마저 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리아를 달래기 위해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여체의 감촉이 특유의 안도감을 선사해 주었다.

조심스레 나는 여동생에게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아니.”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밤하늘의 달을 보는 듯했다.

나는 그 연약한 안색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아직 부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걸까.

“나,아직도 무서워.”

“……그래,그래.”

리아를 토닥이면서,나는 동조의 말만을 읊었다.

“불안해,또 내가 오빠한테 몹쓸 짓을 저지를까 봐…….”

“그래,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몇 번이고 나는 위로를 반복했다.

리아는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 내게 물었다.

“……내가 오빠를 믿어도 될까?”

“그럼,당연하지.”

여동생이 오빠를 믿지 않으면 어떡하냐고,그렇게 되물으려던 찰나.

리아는 새초롬한 눈빛을 하며 내게 말했다.

“맹세해 줘.”

나는 잠시 리아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의문을 담아 리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동생의 볼에는 희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오,오빠는 기사잖아.내가 괴물이 아니라면,공주한테 하듯 맹세해줘.”

무슨 소리일까.

나는 필사적으로 사고회로를 회전시켰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동화 속의 장면들이 하나둘씩 스쳐지나갔다.

리아가 유독 좋아하던 동화들에는 대개 로맨스가 삽입되어 있었다.

기사와 공주의 애절한 사랑,그러다 보니 맹세를 나누는 방식도 남달랐다.

입맞춤.

그 무렵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이내 헛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리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우리 둘은 남매지간이 아닌가.

비록 혈연은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리아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흔히 하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리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헐떡이면서,멍하니 내 소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굶주림 탓인지 리아의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음식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는 구구절절한 진심까지 토해내지 않았던가.

나는 리아를 얼른 저택으로 데려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다소 조급한 음색이 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까닭이었다.

“리아,약속하자.나는…….”

“……아니야.”

그러나 내 말이 채 뱉어지기도 전에,리아는 그렇게 나를 만류했다.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리아의 고개가 살짝 내저어졌다.

“그건,공주가 아니라 여동생한테 하는 맹세잖아.”

“그럼 뭘 어떻게 하자는…….”

그때였다.

훅,하고 달콤한 체향이 내 코끝을 스친 것은.

그동안 씻지도 못했을 텐데,피부에서 이러한 향을 풍긴다니 놀라웠다.여자의 몸은 이토록 신비한 것인가.

리아의 입술이 내 새끼손가락에 맞닿았다.

말캉한 감촉이 느껴진다 싶더니,리아는 그대로 앞으로.

피할 틈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어느덧 리아와 내 입술이 맞닿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입맞춤은 아니었다.

단지 리아가 내 새끼손가락에 쪽,하고 입을 맞췄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 둘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달큰한 숨결이 뒤섞이고,눈을 뜨면 간절한 감정이 일렁이는 두 눈동자가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거리.

리아는 입맞춤에 그치지 않고,살짝 혀를 내밀어 내 새끼손가락을 핥았다.

할짝,할짝.

마치 새끼고양이처럼,리아는 그렇게 혀끝으로 내 손가락을 핥아 올렸다.

혀끝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찌르르,하고 묘한 전류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생에 처음으로 겪는 자극에 나는 그저 넋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마지막으로 쪽,하고 내 새끼손가락에 입을 맞춘 리아의 낯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제야 눈을 뜬 리아의 눈가가 요염한 호선을 그렸다.

소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나 오빠의 여동생이라서 좋은데…….”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서글픈 표정이었다.

“……어쩔 때는,너무 싫어.”

달뜬 숨결과 흘러내린 애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혹시 리아가 내게 품은 감정이,나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고.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

리아의 가출은 늘 그렇듯 시시하게 끝나 버렸다.

직후 혼절한 리아를 업고,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뒷산을 내려와야 했다.

조금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네리스 선배라도 데려왔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아직 내 몸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고,결정적으로 한 달 이상 병상 신세를 지느라 근육까지 모조리 퇴화한 뒤였다.

아무리 약물에 마력까지 쓰더라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가뜩이나 가녀린 리아가 며칠이나 굶어 더욱 야위었단 점이었다.

만일 리아가 좀 더 무거웠으면 나도 한두 번은 고꾸라졌을지도 몰랐다.

특히 리아의 흉부나 둔부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본래 인체란 굶으면 지방부터 태우기 마련인데,참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리아를 무사히 인계하자 부모님은 내 어깨를 말없이 두드렸다.

부모님의 마음 또한 복잡할 터였다.

어찌 보면 멍청한 짓이었다.

가짜에 불과한 소녀를 거두고,그 탓에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나 어머니는 딱히 후회가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그것이‘책임’이라고 했다.

다만 시골 영지에 불과한 터라 설마 가문의 비밀이 드러날 줄은 몰랐고,그러다 보니 괜히 내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셨을 뿐.

나는 부모님을 칭송하지도,비난하지도 않았다.

단지 두 분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심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리아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리아를 침실에 눕힌 직후에도 여러 가지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침대에 누워,성녀의 한심하다는 눈빛이나 받던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

“……주인님?”

살짝 열린 문의 틈새로 고깔모자가 드러났다.

뒤이어 사랑스러운 외양을 한 소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눈을 깜박이며 나를 응시하는 그녀를 보고,나는 쓴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엘시 선배…….”

또 찾아왔구나.

최근 들어 엘시 선배는 언제나 이랬다.

성녀가 나의 절대안정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성녀가 자리를 비웠다 싶으면 눈치껏 나타나 내게 얼굴을 보이곤 했다.

물론 성녀의 말이 신경 쓰인 탓인지 자제하는 기미는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내 품에 안기려는 기색은 없지 않은가.

한동안 엘시 선배가 내 품을 독차지했던 탓에,셀린이나 세리아와 기 싸움을 벌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아찔했다.

성녀도 엘시 선배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지금은 대화를 나누는 정도로 만족하니 다행이었다.

또 한가롭던 차에 엘시 선배의 방문이 반갑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따라 엘시 선배는 다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에요?”

“이,이따가 저녁에…….”

엘시 선배는 긴장한 낯빛으로 조심스레 내게 일정을 물었다.

“……혹시,단 둘이서 만날 수 있을까요.”

흐음,하고 내 입에서 옅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성녀가 허락해 줄까?

최근 들어 내 몸이 꽤 호전되기는 했다.방학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남은 기간 내에 재활을 마칠 수 있으리란 말도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또 레토도 내게 조언을 하지 않았는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했던가.

이만하면 성녀에게 약간의 억지를 부릴 사유로는 충분했다.

“그럼요,이따 저녁에 뒤뜰에서 봬요.”

“……네,넷!”

엘시 선배는 펄쩍 뛰며 그렇게 답했다.

이내 엘시 선배의 만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그녀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내 방을 떠나갔다.

뒤이어‘좋았어!’라고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쥔 채 흔들어댈 엘시 선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 전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내 발걸음은 곧장 엘시 선배를 향했을 터였다.

드넓은 응접실에 자리한 이는 단 둘뿐이었다.

본래라면 일행들이 모여 북적거리고 있을 시간이었으나,이곳을 찾아온 인물의 무게감을 생각하여 모두가 자리를 비운 뒤였다.

검은 정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희끗한 머리만이 그의 진정한 나이를 암시하고 있었다.

노년에 이르른 지 한참되었을 그의 몸은 건장하기 그지없었다.

한창 때의 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그 호칭으로 유명했다.

‘제국의 검공’.

한동안 뒷짐을 진 채 침묵을 지키던 그는,내게 묵직한 한 마디를 건넸다.

“……살아있을 수도 있네.”

서너 장쯤 되는 서류를 내게 건네며 그가 덧붙였다.

“자네의‘진짜’여동생.”

서류를 받아드는 내 눈빛이 망연해졌다.

그것이 검공이 나를 찾아온 까닭이었다.

반드시 나와 나누어야 한다던 대화.

그 주제는 내‘진짜’여동생의 행방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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