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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91화 (291/649)

〈 29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4)

* * *

검공의 방문은 돌연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는 저택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용인들은 처음에 그 신분조차 몰라보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검공은 자신을 막아선 사용인들을 타박하지 않았다.

단지 허공에 글자를 새겼을 따름이었다.

핏빛의 마력이 흘러내리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

그 뜻은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해당 문자의 연원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용혈 문자(?血文子).

제국 위에 오롯한 지존의 상징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용족이 남긴 유산이었다.

사용인들은 대경하여 곧장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는 황제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다.

함부로 눈높이를 맞추는 것조차 실례였다.

그 걸음을 가로막는 것은 더더욱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검공은 무탈히 페르쿠스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난리가 난 쪽은 페르쿠스 일가였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를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리어 제국의 신하로서 최선을 다해 접대해도 모자랐다.

심지어 검공은 제국 황실의 큰 어른이 아닌가.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검공은 딱히 호사스러운 응접을 바라고 찾아오지는 않은 듯했다.

이는 그가 저택에 들어선 즉시 나를 응접실로 호출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의 방문목적은 단순명료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

그 외의 용무는 그에게 있어 무용한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저택의 주인인 부모님과 몇 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을 따름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시골 자작가에 불과한 페르쿠스 가문이었다.

갑작스레 방문한 황족을 대접할 여력도 없었을뿐더러, 사용인들조차 황족을 대하는 예우를 온전히 알지 못하던 차였다.

괜한 트집을 잡힐 바에는 실무적인 논의만 나누는 편이 몇 배는 더 나았다.

검공 또한 그러기를 기대하고 찾아왔으리라.

그는 제국의 유일한 마스터이자 황제의 삼촌이었다. 바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굳이 한미한 가문을 괴롭히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연락조차 없이 찾아온 것이겠지.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려던 내게, 검공은 나지막한 인사를 건넸다.

“쓸데없는 예우는 됐네. 그나저나,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두 번째로군.”

나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는 일전에 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를 되짚어 봐도 내게 검공과 대화를 나눈 기억 따위는 없었다.

내가 이처럼 중요한 인물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검공은 미래에서 온 ‘나’와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는 걸까.

나는 누군가를 향한 반감이 불쑥 치솟는 것을 느꼈으나, 이를 가까스로 다스렸다.

단지 태연을 가장하여 은인께 감사를 표했을 따름이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검공 어르신.”

“무얼, 오히려 이 늙은이가 늦어 미안했네. 예전이었다면 그보다는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검공은 그렇게 아련히 말끝을 흐리며 찻잔을 들었다.

후룩, 하고 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찻물은 은은한 향을 풍겼다. 저택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 고급 찻잎이었다.

그래도 황족이 방문했다고 급히 내온 모양인데, 이를 마시면서도 검공은 흔한 상찬의 말 하나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제국 황실은 찻잎도 최고급품만을 취급한다. 연배로 따지면 황제보다도 윗줄에 있는 그가 범상한 차를 먹고 다닐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감탄한 쪽은 따로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의심이 많아지고 영악해지지… 그러다 보면 늘 행동에 망설임이 섞이게 되지.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감탄했네.”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중년의 형형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느닷없는 칭찬의 말에 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말해, 부담스러웠다.

신분으로 따지나 실력으로 따지나 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전설적인 검객에게 인정받는 것은 좋았으나, 또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사지 않았을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배부른 투정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대륙에 검공의 인정은커녕 눈동자이라도 한 번 찍어보고자 하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들에 비하자면 나는 운이 무척 좋은 편에 속했다.

검공은 멋쩍어 하는 내 태도를 겸양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더군…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에게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짓이나, 젊은 검수가 갖춰야 할 미덕이기도 하지. 만일 자네가 없었다면 내 도착은 더욱 늦어졌을 걸세.”

검공이 눈짓으로 슬쩍 제 맞은편을 권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일순 머뭇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황족이 아닌가.

맞은편에 앉는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타의 황족이라면 몰라, 검공이라면 무릎을 꿇은 채 대화를 나눠도 모자랐다.

다만 고민은 길지 못했다.

검공의 권유였다.

내게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맞은편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검공은 친절하게도 내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라주기까지 했다.

살다 보니 황족이 따라주는 차를 받아보는 날도 있었다.

만일 받는다고 해도 황녀 시엔에게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얼떨떨해 하는 나를 앞에 둔 채, 검공은 말을 이어갔다.

“본래는 백익 기사단과 함께 진입할 예정이었네. 그래봐야 며칠 정도의 시차겠지만, 그 괴물이 날뛰기 시작하면 영지 하나가 박살나는 건 순식간이겠지… 자네가 이 영지를 구한 걸세.”

내 덕에 영지를 구할 수 있었다.

검공의 진술이었으니 빈 말은 아닐 터였다.

그래서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내게 페르쿠스 영지는 단순한 시골이 아니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영지민들이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이곳이 엉망진창이 되면 수많은 영지민들이 실향민이 되어 흩어졌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실향민의 미래야 뻔했다.

대개는 소식이 끊기고 죽어 버리겠지.

그러한 비극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내 안도하는 기색에 검공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한동안 페르쿠스 영지에는 첩보부 요원이 머무를 걸세. 자네의 공을 보아 페르쿠스 일가를 처벌하지는 않겠지만, 알다시피 암흑교단과 관련된 일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검공이 사과라도 할까 싶어, 나는 얼른 그렇게 답했다.

검공의 눈빛이 묘해졌다.

첩보부 요원을 두어 가족을 감시하겠다는데 마음이 편할 사람은 없었다.

처벌을 피해 다행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래, 만일 통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나는 한 술 더 떠 재차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일부러 신경 써 주셔서…….”

“……영리한 친구로군.”

검공은 더욱 흡족한 미소를 띠우며 옅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 페르쿠스 가문에는 신원미상의 인물이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를 판이었다.

가면을 쓴 괴한.

그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으므로, 그가 아직 저택에 남아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국 첩보부의 감시는 도리어 내 쪽에서 환영해야 할 결정이었다.

지켜보겠다는 말은, 다시 말해 유사시 위험에서 보호할 수도 있단 뜻이었으니까.

나는 비로소 걱정 하나를 덜어낸 느낌이었다.

솔직한 말해, 아이린 경보다는 제국 첩보부가 더 믿음직했다.

실습생에 불과한 네리스 선배의 실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엔 멍청해 보여도, 제 전문 분야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제국 첩보부는 기본적으로 유능한 집단에 속했다.

다소 맛이 가 있긴 했지만, 최소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보다는 호위에 더 적합했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권력이란 가까이 하면 이토록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다만 검공의 용건은 그것이 끝이 아닌 듯했다.

도리어 진정한 용무는 따로 남아있다는 듯, 그는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검공이나 되는 인물이 망설일 까닭을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곧이어 중년의 입에서 뱉어진 말은, 나조차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살아있을 수도 있네.”

느닷없는 한 마디였다.

내 의아한 눈빛이 검공을 향했다. 그러나 검공은 더욱 심유해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몇 장의 서류를 내게 건넸다.

단단히 밀봉된 서류였다.

기밀에 속하는 문서라는 의미였다.

내 의문이 더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검공이 그 직후 덧붙인 말에,

“자네의 ‘진짜’ 여동생.”

내 사고가 정지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며 일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나는 멍하니 검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검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세한 사항은 서류를 참고하게. 그래봐야 정확한 행방은 찾지 못했네만.”

문득 내 손에 들린 몇 장의 서류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는 고작해야 서너 장 남짓할 서류를 바라보았다.

‘진짜’ 여동생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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