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5)
* * *
내 '진짜' 여동생.
얼마 전 리아를 달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던 상대였다.
내가 여동생으로 여기고 지낸 이는 저택의 리아가 유일했으니까.
그럼에도 혈육의 정이 참으로 무서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여동생인데,내 가슴은 벌써부터 쿵쾅거리며 박동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서류를 열고 그 행방을 마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아직 아니었다.
나는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혹시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답니까?”
담백한 질문이었다.
많은 것이 함축된 그 물음에,검공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또한 인간인지라 측은지심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그다지.”
검공의 답변에 나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굴도 모르는 여동생이었으나,지금도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다면 내 가족의 가슴이 미어졌을 터였다.
나는 조금 덜할지라도,부모님과 형은 여동생과의 추억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연이어 던져지는 질문도 담백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부모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말은 했네…헌데 페르쿠스 부부는 자네에게 선택권을 일임하더군.모르긴 몰라도 과거의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일세.”
그럴 만도 했다.
여동생을 잃은 대가로 부모님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더불어 여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악감 또한 가지고 있으리라.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여동생을 찾을 단서가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깊이 고심했다.
문득 얼마 전 달래 주었던 리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여동생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었다.
지금껏 이뤄온 모든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만일 여동생을 찾는다면,리아는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괴로운 처지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던 여동생은 또 어떤 심정일까.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번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짧고 깊은 고뇌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괴로운 섞인 한 마디를 토해냈다.
“……그렇군요.”
찌익,하고 서류가 봉투째로 찢어졌다.
검공은 묵묵히 내 손짓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뒤이어 서류가 수십 갈래로 찢겨져 나갔다.내 손은 서류의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종이에 몇 차례의 열상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탁,하고 휴지조각이 된 서류를 다탁 위에 내려놓았다.
검공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괜찮겠나?”
“제게 여동생은 하나뿐입니다.”
그래,리아에게 약조하지 않았던가.
내게‘진짜’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나는 이것이 두 여동생의 평온한 일상을 해치지 않을 결정이기를 바랐다.
“……그 외에는,존재하지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다시 돌아와 결정을 번복할 바에야,나는 다소의 무례를 감수하고서라도 자리를 뜨는 편을 택했다.
다행스럽게도 검공은 내 마음을 헤아려 준 듯했다.
고개 숙여 예우를 표하는 내게,검공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보게,고생했네…제국 황실에서 내릴 보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감사합니다.”
그에 답하는 내 목소리가 어느덧 먹먹히 잠겨 있었다.
그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다.
단지 망설임이 길었던 만큼 괴로움도 컸을 따름이었다.
나는 얼른 감정을 가라앉히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엘시 선배를 만나러 갈 차례였다.
내게는 나만의 삶이 존재했고,낯 한 번 보지 못한 여동생 또한 그럴 터였다.
이 결정이 옳다.
스스로를 수없이 다독이며 나는 응접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검공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이안이 떠난 직후,응접실에 남아있던 검공은 서서히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찢겨진 서류가 놓인 자리였다.
그는 뭉친 서류 덩어리를 헤쳤다.그리고 더듬거리며 그 안에 남은 정보의 흔적을 찾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원하던 글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찢기고 찢겨도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
“……하나뿐이라.”
검공은 탄식처럼 중얼거리며,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손에 닿은 서류들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도를 넘은 마력의 주입을 견디다 못한 종잇조각들이 불타올랐다.갑작스러운 불길에 서류들이 흑색으로 물들며 활자들이 흩어졌다.
펑,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재가 된 종이가 낱낱이 흩날렸다.
중년의 입에 걸린 고소가 더욱 씁쓸해졌다.
“운명이 그대를 빗겨나가기를 빌지,페르쿠스.”
하지만 불길이 낼름거리며 활자를 삼키는 와중에도 남은 글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고 있었으나,아직 그 안에 남은 정보를 읽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되다 만 문단이었다.
‘미트람,특별히 제 복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해 드리죠.아,기대되네요.그 가증스러운 가짜를 몰아내고,제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되찾을 날이…….’
그마저도 훅,하고 까닭 모를 바람이 스치자 잿빛으로 스러져 버렸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운명이 페르쿠스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뒤뜰에 나갈 무렵에는 내 마음도 잔잔하게 가라앉은 뒤였다.
엘시 선배는 진작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모자챙을 꾹꾹 잡아당기고 있었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는데,이를 증명하듯 그녀의 낯빛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꽤 귀여운 모습이었다.
나는 괴로웠던 마음이 다소 풀리는 것을 느끼며,엘시 선배에게 인사를 건넸다.
“엘시 선배.”
“앗,아앗……!주,주인님!”
우물쭈물하고 있던 엘시 선배는 내 호명에 화들짝 놀라 답했다.
묘하게 긴장한 모양새였다.
나로서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이내 나는 그 의문을 지워 두기로 했다.
어차피 대화를 나눌 시간은 많았다.
오랜만에 나누는 단 둘만의 밀회가 아닌가.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화두도 이 기회에 청산해 두기로 했다.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내게 종종거리며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모,몸은 괜찮으세요?어떡해…아직도 안색이 파리하셔서.”
사납기로 유명한 엘시 선배였으나,내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울상을 지으며 두 주먹을 쥐었다 펴는 엘시 선배의 모습은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영락없이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녀가 이대로 입을 다물었다면 더욱 좋았으리라.
하지만 내 앞에 선 상대는 그 엘시 선배였다.
마냥 귀엽기만 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낯빛이 곧 사납게 가라앉았다.
“하여간,도움이 안 되는 썅년이라니깐?성녀라고 으스댈 땐 언제고,죽을 수도 있니 어쩌니…다음에 보면 그 젖탱이를 수박처럼 터트려야…….”
“그러지 마세요,엘시 선배.”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육두문자에 나는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 봐도 생김새와 달리 반전이 있는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 되다 보니 나도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도리어 요즘에는 엘시 선배가 욕을 하지 않으면 이상했다.
엘시 선배가 욕설을 자제할 때는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우울하거나,잘못을 저질렀거나,혹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상대 앞에서만 그녀는 얌전해지곤 했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예외가 없어지던 참이었다.
일단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엘시 선배는 최소한의 자제심마저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성녀와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된 까닭도 그 탓이었다.
“그나마 성녀님이 있어서 제가 살아있는 거니까.”
엘시 선배는 차마 내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단지 투덜거리며 불만스러운 심정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그 말대로였다.
성녀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거나, 불구가 된 지 오래였을 터였다.
금번의 중상에도 꼼짝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겠지.
성녀가 내 생명 유지 활동에 공헌한 바는 그토록 지대했다.
적어도 ‘젖탱이를 수박처럼 터트린다’라는 망언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 귀한 것을 왜 터트린단 말인가.
도리어 보존하고 지켜주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엘시 선배는 성녀를 칭찬하는 내 모습이 못내 분한 모양이었다.
“흥, 마음에 안 들어. 암만 봐도 속이 시커먼 년일 뿐인데…….”
나는 엘시 선배의 불만이 더 이어지기 전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내 손이 턱, 하고 엘시 선배의 고깔모자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엘시 선배는 곧장 심통이 난 안색을 지웠다.
단지 헤실거리며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을 따름이었다.
볼을 부비대는 엘시 선배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에헤, 헤헤헤… 주, 주인님…….”
“그래서, 오늘은 왜 불렀어요?”
내 입에서 본론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당연히 용건이 있더라도 그쪽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낯빛을 굳히는 엘시 선배를 목도할 수 있었다.
얼어붙은 소녀의 몸은 아무리 머리를 쓰다듬어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엘시 선배는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얼마 후에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내 품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헛기침을 하는 폼을 보아하니,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엘시 선배는 웬일인지 다소 진지한 분위기를 잡고자 했다.
내 애완견을 자처한 이후로는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낯선 경험이 많았다.
“그, 그러니까… 주인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던진 화두였다.
어울려 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무심코 소녀의 말을 가로막고 말았다.
“아, 마침 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맑고 푸른 빛깔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설마 내게도 용건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오해에 불과했다.
나는 늘 엘시 선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단지 그럴 만한 기회가 오지 않아 미루고 미루어 두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참에 이 문제를 풀고 넘어가기로 했다.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돼요?”
쩌적, 하고 무언가가 갈라지는 환청이 들렸다.
엘시 선배는 눈을 부릅뜬 채 몸을 굳히고 있었다. 불신이 가득 담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난번에도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엘시 선배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유기 당한 강아지라도 되는 듯한 모양새였다.
예전이었다면 마음이 약해져서 이쯤에서 그만두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나와 엘시 선배는 약혼 상대로 거론되는 와중이었다.
이 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추후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특히 라이넬라 백작을 만나뵐 때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는 라이넬라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둔 대마법사였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굳이 몸으로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처럼 단호한 내 태도에, 엘시 선배는 눈물을 머금으며 되물었다.
“……네, 네?”
“그리고 존댓말도 금지에요.”
잇따른 내 선언에 엘시 선배는 울상을 짓고 말았다.
“앞으로는, 반말만 써요. 제가 후배잖아요.”
그리고 엘시 선배는 강아지가 아니고.
이 당연한 말에 엘시 선배는 그만 찔끔 눈물을 흘렸다.
참 처량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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