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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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 라이넬라의 인생은 기구했다.
구구절절 어린 시절의 상처를 늘어놓기도 꺼려질 만큼은 그랬다. 한때는 가문의 투견을 자처하던 소녀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엘시가 난생 처음으로 가문의 뜻을 거슬렀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악신의 권속과 맞선 전장에는 피와 악다구니가 엉겨붙어 있었다.
소음, 비명, 괴성.
어느 것이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뿐이었다. 일천에 달하는 정병들과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 그리고 각 군의 정예들이 참전한 전투는 그만큼이나 치열했다.
적은 쓰러져도 되살아나는 불사의 괴물이었다.
누구라도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인간은 본래 불가해한 존재를 무서워한다. 하물며 시체 거인은 그 겉모습조차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그 용맹하다는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조차 움찔거리는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엘시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성녀가 대단위 제의를 올리고도 격파하지 못한 상대였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엘시는 포기하지 못했다.
어차피 개죽음이라면 이곳에서 죽겠다고 각오한 참이었다. 이안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엘시가 물러나는 일은 없으리라.
오히려 문제는 레이놀드에게 있었다.
시체 거인을 묶고 있던 마도병단의 대마법은 레이놀드를 핵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강제로 끊어지면 반동 또한 레이놀드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이며 피를 토하는 레이놀드를 보고, 엘시는 당황해서 외쳤다.
“삼촌!”
“크으… 괜찮다, 엘시.”
갑작스러운 부상에도 레이놀드는 마냥 침착하기만 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실전을 거쳐 온 그였다.
대마법사가 된 이후 위기를 겪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용병으로 살면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엘시를 꾸중하기까지 했다.
“그보다 집중해라. 이안 공자를 엄호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하, 하지만 마도병단의 대마법도 끊어버리는 녀석인데……!”
“기회는 반드시 온다.”
레이놀드의 손이 엘시의 어깨를 꾸욱, 하고 쥐었다.
푸른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눈보라 속에서 타올랐다.
“……네가 결정한 운명이 아니냐.”
엘시는 결국 입술을 짓씹으며 혈도에 마력을 돌렸다.
사실 그녀도 누구를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다.
무리한 마력의 운용으로 엘시의 혈도는 곳곳이 찢긴 지 오래였다. 가상의 열상으로부터 맹렬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마력을 돌리니, 더더욱.
신경말단이 비명을 내질렀고 안구는 피가 몰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울며 무너지고 싶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엘시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이 자리에 섰다.
레이놀드는 그 모습을 보며 나지막히 조언했다.
“결정타를 준비해야 한다.”
“……알고 있어요.”
그것이 마법사의 역할이었으니까.
다만 엘시는 그녀의 마법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6서클의 대마법사가 집단의 힘을 빌어 연성한 진조차 격파한 상대였다.
고작해야 5서클에 불과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단지 이안을 믿고, 치명적인 빈틈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그래, 사내는 언제나 강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엘시는 또 다시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놀드의 손바닥이 엘시의 등 위로 얹어진 것은 그때였다.
엘시가 화들짝 놀라 뒤를 보려 하자, 레이놀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중해라!”
엘시는 본능적으로 몸을 빳빳이 굳히고 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그 앞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인도해 주마… 한결 편안할 거다. 혹은, 네가 원하면 더 출력을 높일 수도 있고.”
대신 더 고통스럽겠지만.
그 덧붙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시는 망설임 없이 출력을 높였다.
파지직, 거리며 대기에 전하가 튀기기 시작했다.
레이놀드는 그러는 엘시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사랑이 무섭긴 무서웠다.
한때는 그도 그랬다.
그러니까 레이놀드는 제 조카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감각을 집중해라,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도록…….”
헐떡이며, 엘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뜨였다.
한계에 이르른 심장의 마력 고리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통각도 강해진다.
엘시는 끄으으, 하고 흘러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그 아픔의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엘시의 푸른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전신에 마력이 돌고 돌아, 이내 신체의 바깥에서도 드러나는 상태.
과부하였다.
팍, 하고 현이 끊기듯 혈도 하나가 튕겨 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엘시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으, 꺄아아악!”
“포기하고 싶느냐?”
레이놀드는 도발하듯 그렇게 물었다.
“포기해도 좋다. 이제 억지는 그만 부리고, 가문의 결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엘시는 핏발 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시간은 점점 더 가속된다.
어느새 비릿한 쇠 맛이 입에서 느껴졌다. 그러든 말든 엘시는 전장의 한 지점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인다, 무언가가.
척추를 칼처럼 파고드는 통증의 끝에서, 엘시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풍경이었다.
“……보이느냐? 그게 바로 진리의 파편이다.”
레이놀드는 마땅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엘시의 낯은 멍청해지기만 했다.
들숨과 날숨, 그 사이에서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아니었다.
이 풍광은 진리의 파편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 소녀의 기억이었다.
빽빽이 자란 나무들이 좌우로 펼쳐진다. 나른한 햇살 속에서 소녀는 연심을 품었고, 사랑을 하며, 이내 마음이 이어졌다.
그 활동사진의 끄트머리에는 불타는 대수림이 위치하고 있었다.
“드, 드디어 지켜냈다…….”
울먹이면서, 사내의 뺨을 쓰다듬으며 토해낸 그 절절한 음성.
“……내, 소중한 사람.”
명백한 타인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자, 심장의 고리가 더욱 강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그 도도한 마력의 흐름에 레이놀드조차 당황했을 정도였다.
대마법 ‘천뢰의 진’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6서클에 이르는 대마법은 단독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악신의 권속이더라도 약화된 채로는 저항이 불가능했다.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항거불가능한 적을 무릎 꿇리기 위해 몸을 한계까지 채찍질했다.
그 몸부림의 끝에, 대마법을 이루어냈다.
아직 대마법사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길의 초입은 분명히 보였다.
걷고 걷다 보면 언젠가 그곳에 닿을 수 있으리라.
엘시는 넋이 나갔다.
가문에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기뻤고, 그 이상으로 안도했다.
이제 이안의 품에 안길 수 있다.
가문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약혼을 진행하든 말든, 엘시는 제 의지로 이안의 옆에 설 것이다.
그 변함없을 사실이 그녀는 못내 기뻤다.
이안이 쓰러졌을 때는 무너져 내릴 뻔하긴 했다.
매일 밤 숨죽여 울거나,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기절하기 일쑤였다.
평생 믿지도 않던 신을 찾으며 기도를 하기도 했다.
주님, 부디 그 못난 젖탱이 년… 이 아니라, 성녀를 도와 우리 주인님을 치료해 주세요. 그래 주시기만 하면 앞으로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가 될게요.
그 노력이 통했던 덕일까.
이안은 결국 몸을 일으켰고, 엘시는 한동안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다.
가문의 투견으로 살 바에야 이안의 애완견이 되어 주겠다.
그 결심은 아직도 유효했으며, 엘시는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 이안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일순 뇌리가 새하얘져 엘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주먹을 움켜쥔 채로, 더듬더듬 토막 난 음성을 흘렸을 뿐이었다.
“아, 으, 아…….”
“아니,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에요?”
당연했다.
일전에도 이안이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평생 사랑해 주겠다고.
엘시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래서 가문을 버리고 떠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웠는데!
엘시는 핑 도는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유기당한 강아지의 심정이었다.
낙담한 엘시의 어깨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쯤 되니 아무리 이안이라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엘시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엘시 선배… 그래도 사회적 평판도 있고.”
“나, 나는 사회적 평판보다 주인님이 중요한데?”
반밀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애매한 어조였다.
이안은 탁, 하고 제 이마에 손을 얹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참 뻔뻔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엘시의 사회적 평판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지금 와서 수복하려 들어도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그럼에도 이안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또 라이넬라 가문의 체면도 있으니까…….”
“가, 가문도 버렸는데!”
이제는 이안이 넋을 놓을 차례였다.
훌쩍이면서 내뱉어진 그 말에, 그는 두 눈을 부비적거리며 재차 물어야 했다.
“……뭐라고요?”
“버렸다고요, 가문… 주인님을 위해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엘시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그처럼 노골적인 의문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엘시는 슬픈 낯빛을 하고 고개를 푹 숙였을 뿐이었다.
소녀의 구슬픈 읊조림이 이어졌다.
“그, 그런데 어떻게…….”
물기 어린 푸른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영락없이 이안이 쓰레기가 되는 구도였다.
이안의 의도와는 무관했다.
단지 소녀는 사내를 위해 가문까지 버렸고, 이안은 느닷없이 그 소녀에게 이별을 통보한 그림이 연출되고 있었다.
고작해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엘시는 실연이라도 당한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폭발이라도 할 기세였다.
결국 엘시는 참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 흐읏?!”
이안의 손이 그녀의 턱밑을 쓰다듬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엘시는 곧장 묘한 신음을 흘리며 허물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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