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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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긴장되었던 몸은 더욱 예민하게 감촉을 인식한다.
이는 엘시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움찔 몸을 굳히며,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쭉 내밀었다.
지난번 그녀를 덮쳤던 쾌감의 파도를 떠올린 탓이었다.
이안은 그 반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시는 울상을 지으며 달뜬 숨을 토해냈다.
“그,그마내애앳…….”
물론 희미한 저항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안은 한 술 더 떠 엘시를 말없이 품에 안기까지 했다.
엘시는 후각을 파고드는 사내의 체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녀는 사랑에 한없이 약한 동물이었다.
그 몽실거리는 감정에 엘시는 그만 얼굴이 풀어지고 말았다.
애써 인상을 찌푸리려는 듯 미간은 어떻게든 좁히고 있었으나,이는 무의미한 저항에 속했다.
실룩거리는 입꼬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이안은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요,엘시 선배.”
“하,하지마아안…응읏?!”
엘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화를 내고 싶은데,이안의 속삭임이 귓가를 스치자 한껏 예민해진 촉각이 찌르르 떨리는 쾌감을 전달했다.
기껏해야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그랬다.
그뿐인가.
이안의 품에 안긴 것만으로 제멋대로 풀어지는 마음을 제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이대로만 있을 수 있다면,이안에게 빼앗기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정폭력의 희생자나 할 법한 사고였다.
엘시도 이를 알고는 있었으나,간질거리는 가슴의 충동마저 제어하기는 불가능했다.
이안은 소녀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누가 엘시 선배를 버린다고 했어요?단지 쓸데없는 오해를 줄이자는 말이에요.”
“……쓰,쓸데없는 오해?”
결국 엘시는 혹하는 마음을 거스를 수 없었다.
고작해야 두어 마디 사탕발림을 했다고 이렇게 홀랑 넘어가다니.
엘시는 첫사랑이 이안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다른 남자한테 홀렸으면 간까지 빼먹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론을 듣지도 않고 반쯤 설득이 끝난 엘시였지만,그녀는 짐짓 화난 기색을 유지했다.
뚱한 눈빛과 달리 움찔거리는 입꼬리가 볼 만했다.
이안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길이 턱밑을 스치자,엘시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무심코 제 얼굴을 이안의 품에 파묻었다.
“네,쓸데없는 오해…괜히 이상한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건…….”
“엘시 선배는 제 애완동물이 아니잖아요.”
삐쭉,하고 엘시의 입술이 불만스레 툭 튀어나왔다.
이안의 얼굴을 슬쩍 흘겨보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사내의 말이 퍽이나 섭섭하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또 다시 엘시가 난동을 부릴까 싶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엘시 선배는 저와 동등한 존재죠,동료…아니,동반자?”
다시 심술이 나려던 엘시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안의 손길을 즐기면서,내심 고민에 잠겼다.
엘시는‘애완동물’이라는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안에게 의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엘시가 이안을 따르는 이상 이안 또한 그녀를 보호해 주려 할 터였다.
무엇보다 아낌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데 또‘동반자’라는 어감도 나쁘지는 않았다.
옆에서 함께 걸어간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낱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시의 고민은 꽤 길어졌다.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엘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함부로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기본적으로 욕심이 많은 그녀의 성미 탓도 있었다.
엘시는 이안에게 온전히 종속되고 싶었다.
더는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그럴수록 이안 또한 엘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또 반려자로서 알콩달콩 함께 지내는 미래 또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애완동물로 남으면 이안에게 버림받지 않을 수 있다.
대신 동반자를 택하면 이안도 마냥 자신을 귀엽기만 한 존재로 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보다 동등한 존재,다시 말해 여자로 대해야 하겠지.
그렇게 엘시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드디어 묵은 숙제를 청산할 시간이 왔다는 듯,더욱 필사적으로 설득에 매달렸다.
“엘시 선배…당당하던 그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그때 엘시 선배를 따르던 사람도 많았잖아요.”
끙끙거리며 엘시는 더욱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안은 엘시의 턱밑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의 엘시 선배는 언제나 주도적이었어요.그래서 늘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는데…요즘에는,제가 억지로 엘시 선배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 같아요.”
담백한 음색이었으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엘시는 일순 그 설득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안은 끝없이 엘시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엘시가 목숨을 거는 까닭이 단지 그의 지시 때문일까 봐.
엘시의 진정한 뜻을 차마 눈치 채지 못할까 싶어,그는 언제나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섬세한 마음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작 그토록 당당하고 주체적이던 엘시를 손도끼로 꺾은 장본인이 이안이었음에도 말이다.
당연히 그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고,지금도 한창 양심의 목소리와 괴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에 그 괴로움이 비칠 리는 없었다.
결국 엘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묘안을 떠올려 냈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의 입에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두어 걸음 물러나며 이안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소녀는,그대로 뒷짐을 지었다.
살짝 달아오른 그 얼굴이 새초롬했다.
“……정 그렇다면야,뭐.”
살짝 시선을 피하며 내뱉은 대답이었다.
이안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하던 오명과도 안녕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엘시 선배…최대한 엘시 선배의 의사를 존중할 테니까.”
“그래?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불쑥 한 걸음을 내딛으며 던진 제안이었다.
이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으나,이내 내친김이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엘시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전투에 공헌해 왔던 동료였다.더불어 페르쿠스 영지와 아무런 연관도 없음에도 시체 거인과 맞선 전적도 있었다.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안이 그렇게 동의를 표하자마자,엘시는 곧장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계산이었다.
“나,네 애완견 할래.”
“좋습니다,그 정도야 뭐…네?”
이안은 얼빠진 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상상도 못했던 부탁이었다.
말문이 턱,막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어리둥절한 낯빛을 보며,엘시는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꼬리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내 의지로,네 애완견 하겠다고…그럼 이제 걱정 없지?앞으로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주인님.멍멍!”
엘시는 두 손을 내밀며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시늉을 했다.
눈 한 쪽을 찡긋하며 내뱉어진 그 말에,한동안 이안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는 도돌이표에 불과했다.
그가 무어라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연 그때.
“그,그리고 또…동반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는데.”
엘시는 또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괜시리 발끝으로 땅바닥을 긋는 폼이,무척이나 쑥스러운 듯했다.
이안은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를 불러낸 사람은 엘시였다.
그녀에게도 용건이 있었을 텐데,이야기가 길어져 지금껏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리고 또‘동반자’로서 전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안은 엘시의 의지를 존중하고,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미 그러겠다고 선언한 뒤였으니까.
이안의 황금빛 동공이 물끄러미 소녀를 향했다.
엘시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수많은 추억들이 파도처럼 사고를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았을 때는,꽤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다 싶었다.
이후에는 주로 악몽 속에서 그 눈동자를 보았으며,어쩌다 사랑에 빠진 뒤로는 한결같이 타오르는 황금색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강인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더욱 두근거렸다.
엘시는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애써 침으로 축였다.
벌써부터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앞이 핑핑 돌고,얼굴은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용기를 내서 한 마디.
“……야.”
눈을 질끈 감은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심호흡을 하며,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의 눈이 살포시 뜨였다.
맑고 푸른 눈동자였다.
이안은 그 안에 가득 비치는 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매력적이라고, 이안은 무심코 그러한 감상을 품고 말았다.
그리고 소녀는 뒷짐을 진 채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내와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피기 직전의 꽃망울처럼 많은 감정을 담은 낯빛이었다.
그제야 엘시는 꽁꽁 숨겨 두었던 제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
“너,나랑 사귈래?”
조금쯤 부끄럽고,조금쯤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소녀는 제 운명을 한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하는 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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