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1)
* * *
고비 하나를 넘긴 페르쿠스 저택은 고요에 잠겼다.
짧은 평화였다.
이제 곧 제국 첩보부 요원들이 파견되면 영지 전체가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점에 대해 알게 모르게 부담을 느끼는 사용인들이 많았다.
물론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심약한 어머니는 나날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더해가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걱정은 주로 하나였다.
“미안하구나, 이안… 괜히 네게 폐를 끼쳐서.”
아들이 죽을 뻔했다.
더불어 잘 풀렸다지만 죄를 지어 제국 첩보부가 파견된 상황이었다.
비록 호위의 목적도 있다지만, 감시를 당하는 입장에서 그리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하물며 어머니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편이시기도 했다.
유아기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는 귀족 출신치고는 드문 경우였다.
떠올려 보면, 부모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었는지, 물어보더라도 늘 부모님은 쓴웃음만 머금어 보일 따름이었다.
형도 굳이 그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내심 무언가 사정이 있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페르쿠스 가문의 역사는 짧은 편이었지만, 몇 세대에 걸친 전통은 존재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모님의 연원 또한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다.
최소한 얼마 전 리아의 비밀이 밝혀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나는 일전에 느끼지 못한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직 페르쿠스 가문에는 수수께끼가 남아있으리라는 뜻 모를 직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제 힘없고 순수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내게는 제국 첩보부와의 끈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이에 대해서 조사할 수 있으리라.
단지 나는 감히 어머니를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못했다.
자식 된 도리 탓이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더라도, 여태껏 나를 사랑해 주고 키워준 은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달래 드려야 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시잖아요, 저 친구 많은 거.”
그것도 힘 있는 친구들이 잔뜩 있었다.
황제와 검공 또한 일단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한 듯했고 말이다.
어머니는 내 반복된 설득에도 온전히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는 내게 사죄의 말을 전하지는 않으셨다.
단지 이따금씩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선은 방학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점이 그랬다.
저택에 머무르는 일행들이 최근 들어 유독 바빠 보이는 까닭도 이와 연관이 깊었다.
다들 나름대로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덧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날이 눈앞이었다.
그들이 페르쿠스 저택에서 지낸 기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시간.
하지만 그 사이에 겪은 사건의 밀도는 남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게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가 도착한 직후부터는 늘 이랬다.
수렵제에서 느닷없이 강력한 마수를 만나지 않나, 고아원에서는 마인을 쓰러트렸고, 귀향제 때는 황녀를 구하기 위해 암흑사제와 맞서야 했다.
그리고 끝내는 내 고향에서 악신의 권속을 처치하기까지.
또 다시 날아올 편지의 내용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강한 적을 상대하고, 얼마나 더 잔혹한 운명을 맞이해야 할까.
살짝 두려운 마음마저 일었지만, 나는 애써 쓴웃음을 머금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때도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나는 각오를 다지며 미래를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나를 심란케 하는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최근 들어 내 심상을 강하게 사로잡은 인물은 따로 존재했다.
바로 엘시 선배였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잔혹한 성정과 걸걸한 입담으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 신분도 마도명문 라이넬라 가문의 아가씨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와 접점을 가질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마주친다 하더라도 내 쪽에서 먼저 피하고 말았으리라.
그만큼이나 엘시 선배의 대외적 인식은 최악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쩌다 엘시 선배와 함께 수많은 사선을 넘고, 또 오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는 그만 엘시 선배를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정이 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와 엘시 선배 사이에는 일종의 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고위 귀족의 자제였다. 당연히 가문의 명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나와의 동행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일 엘시 선배가 이를 좋은 추억이라 생각하더라도, 일생을 함께할 이는 따로 골라야 마땅했다.
설령 나와 엘시 선배가 약혼해도 내게는 핑계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문의 뜻일 뿐이지, 엘시 선배의 본의는 아니리라고.
그렇다면 언젠가 놓아주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모든 핑계와 변명은 얼마 전 일시에 분쇄되고 말았다.
엘시 선배가 내게 고백했다.
고작해야 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내 가슴에 그 이상의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날도 나는 엘시 선배를 떠올리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엘시 선배로부터 고백을 받은 이후로는 항상 이랬다.
조금만 넋을 놓으면 엘시 선배가 떠오르기 일쑤였다.
이러고 보면 나도 참 숙맥이다 싶었다.
고백 하나 받았다고 종일 넋을 놓고 있다니, 우스운 꼴이었다.
차라리 시체 거인과 맞서는 편이 심적으로는 더 편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똑똑, 하고 침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곧장 내 몸이 흠칫 굳었다.
“……이안 오빠, 들어가도 돼?”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의 음성이었다.
내심은 엘시 선배가 나를 찾아왔을까 염려하던 참이었다.
셀린 정도라면 기쁜 마음으로 응대해 줄 자신이 있었다.
나는 안도감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들어와.”
내 허가가 떨어지자 셀린은 문을 살짝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방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잽싸게 문을 닫으며 내 옆에 섰다.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셀린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답지 않게 꽤나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던 탓이었다.
“……뭐하냐?”
“쉿, 쉿!”
어이가 없다는 내 반응에도 셀린은 도리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면서 인중에 검지를 가져다대는 폼이, 내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러 온 듯했다.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셀린을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묻고 싶어도 짐작 가는 데가 존재하지 않아 불가능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의 용건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상대가 먼저 본론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불행 중 다행으로 셀린은 내게 거두절미하고 물어왔다.
“이안 오빠, 요즘 라이넬라 선배랑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못했다.
단지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침묵을 지키며 슬쩍 시선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이를 두고 수상함을 눈치 채지 못할 셀린이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채근했다.
“아아, 진짜! 이럴 줄 알았어… 요즘 라이넬라 선배가 얼마나 이상해졌는지 알아? 내 옆방이 라이넬라 선배 방인데, 밤마다 그러니까 견딜 수가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하소연을 하는 와중에도 셀린은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나와 엘시 선배 사이에서 중요한 대화가 오고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내던 셀린이었다.
며칠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이조차 알아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결국 나는 항복이라는 듯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별 일 없었어.”
“거짓말 하지 마!”
셀린은 택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 검지로 척, 하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요즘 둘이서 엄청 의식하고 있잖아! 마주치기만 해도 당황하질 않나!”
“야, 그건…….”
“나만 눈치 챈 줄 알아? 성녀님도 엄청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털어놓고 광명 찾아… 라이넬라 선배한테 뭐 했어?”
폭풍과도 같은 추궁이었다.
어차피 셀린에게 걸린 이상 내게 퇴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셀린을 잘 알고 있는 만큼이나, 셀린도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주로 리아나 셀린과 같은 여동생들에게 약한 편이었다.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내 입에서 절로 새어나왔다.
셀린은 그것이 함락의 전조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팔짱을 끼더니, 심문관의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라이넬라 선배가 뭘 했냐고!”
또 다시 한숨, 셀린은 이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더는 참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결국 나는 모든 사실을 실토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라이넬라 선배가 고백이라도 했……!”
“어, 했어.”
그러자 뚝, 하고 셀린의 모든 움직임과 목소리가 멎었다.
일순 석상이라도 됐나 싶은 극적인 변화였다.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셀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더욱 조급해진 음색으로 나를 추궁했다.
“고, 고백했다고? 언제?!”
“며칠 전에.”
내 담백한 진술에 셀린의 표정이 더욱 망연해졌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그래서 오빠는 뭐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날의 기억을 되짚기 위해 시선을 측면으로 틀었다.
셀린은 내 답변이 지연될수록 더욱 초조한 안색이었다.
나중에는 창백해진 낯빛으로 마른침을 삼켰을 정도였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내 입에서 짤막한 결론이 먼저 흘러나왔다.
“……거절했지.”
“뭐?! 왜, 왜?!”
셀린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내게 되물었다.
지당한 반응이었다.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지, 그 배경까지 훌륭한 엘시 선배였다.
상식적으로 거절할 까닭이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나 또한 그랬다.
내심으로는 엘시 선배와 맺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나는 엘시 선배와 맺어지기를 두려워하나.
몇날며칠을 고민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던 문제였다.
내 고심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기억이 침잠했다.
어느덧 나는 그날의 풍경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 거절의 말을 듣고, 엘시 선배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경악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때 엘시 선배도 내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었다.
눈가에 이슬을 맺은 채로, 울먹이면서.
“왜, 왜……?”
그렇게 물어봐야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단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엘시 선배의 마음을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너무 잔인한 결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엘시 선배에게 그 말을 던지고 말았다.
“그, 엘시 선배… 학교 폭력 가해자잖아요.”
쩌적, 하고 엘시 선배의 몸이 정수리부터 갈라지는 환청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건 좀.”
그랬다.
나는 엘시 선배의 사정을 헤아렸으며, 또 언제든 그녀의 편이 되어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엘시 선배에게는 아직 지우지 못한 죄가 남아있었다.
무고한 학생들을 괴롭히고, 깊은 상처를 남겼던 과거.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즉시 후회했다.
이것이 두고두고 엘시 선배에게 상처로 남을까 봐 무서웠다.
누군가는 죄값을 치른다고 하겠지만, 정작 엘시 선배가 먼저 생각나는 걸 보면 그새 정이 많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발언을 철회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엘시 선배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보는 분노한 기색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두, 두고 봐."
물기 어린 눈망울로, 소녀는 노기가 등등해서 외쳤다.
"두고 보라고! 나, 나는 고작 그 정도로 포기 안 해!"
엘시 선배는 그 말을 끝으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 걸었다.
그 뒷모습이 퍽 쓸쓸해 보여서,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다 말았다.
대신 나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했는데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모자란 새끼,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그렇게 그저 스스로를 욕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따름이었다.
그때의 나는 엘시 선배의 '두고 보라'라는 말을 상례적인 표현의 일환이라 여겼다.
물론 엘시 선배가 그토록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결과였다.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우리가 아카데미에 도착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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