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2)
* * *
셀린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했다. 그 풀어지는 낯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안도감, 기쁨, 그리고 흐릿한 동정과 연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오히려 드물었다.
다만 나는 엘시 선배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나를 향한 집착이 유독 강한 셀린이었다.
당연히 내게 고백한 엘시 선배의 행동이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비유하자면 친근한 오빠를 빼앗아 가는 존재처럼 보일 테니까.
그랬던 셀린의 눈빛에서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그럴 만한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여인으로서 엘시 선배의 비참한 심정에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커다란 상처를 줬나.
일견 강해 보이지만, 엘시 선배는 여린 내면을 숨기고 있는 여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내 추측은 이내 증명되었다.
셀린이 씁쓸한 중얼거림을 토해낸 덕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어쩐지, 매일 밤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뿐이었어?”
“그리고 이안 오빠를 욕하는 소리도.”
셀린이 곧장 나를 찾아온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과연 엘시 선배다웠다.
최근 들어 나를 마주치면 풀이 죽은 기색을 하거나,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힐 뿐이었는데 방에서는 내 욕을 하고 있었다니.
그래봐야 여전히 내게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인사를 건넬 때마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거나, 어쩌다 사소한 부탁을 건넬 때마다 곧장 이행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면 그랬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속에 품은 여인의 한은 사그라지지 못했단 말이겠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울적한 표정을 하고 있자, 셀린은 내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라이넬라 선배쯤 되면 이안 오빠보다야 더 괜찮은 짝이 있겠지, 응.”
“……그거 칭찬이냐?”
나는 다소 울컥해서 되묻고 말았다.
엘시 선배가 실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야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하필 나보다 더 좋은 남자가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식으로 위로를 건네다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고.
물론 그러든 말든 셀린은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느덧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지워낸 그녀의 표정은 온전히 풀어진 뒤였다.
나는 내심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셀린을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헤실거리는 몰골이 꽤 귀엽긴 했으니까.
그러기를 한참, 문득 불안해졌다는 듯 셀린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안 오빠, 알지? 나 누구 괴롭힌 적은 없는 거.”
“누가 뭐래?”
나는 코웃음을 치며 셀린의 걱정을 일축해 버렸다.
사실 세리아를 향한 나쁜 여론을 조성한 전적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세리아와 잘 풀었을까. 예전에 사과는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한 번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날 밤은 오랜만에 셀린과 단 둘이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내 가슴 한 구석에 드리운 엘시 선배의 그림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채로.
**
그래도 다행스러운 사실은 하나 있었다.
시체 거인을 쓰러트린 덕에 수많은 고민거리가 해결되었다는 점이었다.
수백의 영지민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도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내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존재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도 기세가 등등해진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성녀였다.
그녀는 우쭐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어깨를 쫙 폈다.
존재감 넘치는 젖가슴이 또 다시 강조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녀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회고하곤 했다.
부드럽고 탄력 있던 그 감촉.
훌륭했다.
나는 무심코 턱을 짚고 고개를 주억거리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성녀만 있으면 몰라 그 옆에는 유렌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유렌에게 이상한 오해를 사는 것은 사양이었다.
혹시 누님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칼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르고.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잘난 체 하는 성녀를 감상했다.
“아하하… 이안, 당신이 그때 아인델 총주교의 반응을 봤어야 한다니까요? 그 영감탱이, 예비용 혈정을 썼다니까 노발대발하려다 입을 꾹 다무는데… 푸흡.”
“……악신의 권속을 토벌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업적입니까?”
“당연하죠!”
아직 승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성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이토록 들뜬 모습도 오랜만이었다.
내가 막 일어났을 때만 울고불고 하며 내게 매달리더니, 그 ‘아인델 총주교’란 사람한테 한 방 먹인 것이 그 정도로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녀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좋다면 나도 좋았다.
“천신교는 악신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해요. 그리고 악신의 권속은 그 최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야말로 신화적인 업적이에요.”
물론 그 빛나는 업적의 주봉에는 내가 서게 되었다.
성녀로서는 다소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처사였다.
아무리 내가 목숨을 걸어가며 달려들었다곤 하지만, 시체 거인을 약화시켜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사람은 성녀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쓴 혈정은 성 한 채에 준하는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조금도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뿌듯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잘 돼서 도리어 그녀가 더 신이 난 모양새였다.
“……그, 그래도 또 그때처럼 무모한 짓을 저지르면 안 돼요? 이안,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 그때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조금도 지켜지지 않을 듯한 약속을 나누면서, 나는 슬쩍 유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흐뭇하다는 눈빛으로 나와 성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성녀가 대화를 나누든 말든 일절 참견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원의 침엽수처럼 홀로 두기는 무안해서 말이라고 건네려던 찰나.
“이안, 그럼 잠시 누님을 부탁한다. 나는 못 꾸린 짐이 남아있어서…….”
그는 눈 한 쪽을 찡긋하며 떠나갔다.
오늘은 마침 저택을 떠나 아카데미를 향하는 날이었다.
챙기지 못한 짐이 있다면 그쪽을 우선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호위기사가 자리를 비우며 부탁을 남겼다는 것은, 내가 한동안 성녀의 곁을 지켜야만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나는 우쭐거리는 성녀의 자랑을 한참 동안이나 더 들어 주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성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으니까.
덕분에 나는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시간을 녹일 수 있었다.
가족들과의 이별은 늘상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리아를 차례로 꼭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조심하라는 말을 남겼고, 형은 내게 오팔 원석을 건넸다. 나조차 처음 보는 원석인 것으로 보아, 최근에 발견한 광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장 진한 포옹을 나누는 상대는 언제나 리아였다.
그녀는 내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보드라운 여체의 감촉이 내 몸을 꾹꾹 압박해서 여러모로 곤란한 느낌이었다.
리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잘 지내야 해?”
“그래, 리아. 다음 방학 때 또 보자.”
뻔한 인사였다.
이를 마지막으로 나는 발걸음을 돌리고, 페르쿠스 일가는 내가 타고 떠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면 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사이에 새로운 수수께끼가 추가되었다.
늘 그랬듯 쪽, 하고 내 볼에 입술을 맞춘 리아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던 탓이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거야, 오빠.”
무슨 소리일까.
일순 의문이 들었으나 일행이 너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리아의 말을 머리 한 켠에 치워두고, 걸음을 옮겨 저택을 떠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에서는 벌써부터 도란도란 일행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그 대상은 엘시 선배였다.
성녀는 입을 가린 채로, 안쓰럽다는 눈빛을 엘시 선배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라이넬라 자매님, 들었습니다… 이안에게 고백해서 차이셨다고. 가슴이 아프네요. 혹시 천신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탄없이 찾아와 주세요.”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나와 엘시 선배 사이에 있었던 사건은 일행 전원이 알게 되었고, 그 탓에 오늘도 엘시 선배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철저히 입단속을 시키는 건데.
그러나 소문이 퍼져 나간 진원지가 정작 내 쪽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듣기로는 성녀의 도발에 걸려든 엘시 선배가 무심코 실토하고 말았다던가.
과연 성국의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을 걸어온 성녀의 말솜씨는 무시무시했다.
물론 성녀가 놀린다고 해서 얌전히 있을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야, 너 그 손 좀 치워 봐.”
그 말에 성녀는 말없이 슬쩍 제 입을 가린 손을 치워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분명히 보였다.
히죽, 하고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가.
더는 참지 못하고 엘시 선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썅년이 오냐오냐 했더니 진짜……!”
크흠, 하고 내가 헛기침 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엘시 선배의 눈이 나를 향하더니, 이내 당황해서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힌 소녀가 주춤주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나와 대화를 나눌 용의는 없어 보였다.
그 점에 조금 씁쓸한 눈빛을 한 나였으나, 성녀는 승자의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결국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엘시 선배와 또 한 번 자리를 마련해야 할 듯 싶었다.
그렇게 일행과 대화를 나누기를 며칠.
나는 비로소 익숙한 교정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동안 온갖 난리를 겪었던 터라 유독 실감이 나지 않는 풍경이었다.
아직 방학이 끝나지 않아 중앙대로가 한산한 탓도 있었다.
진짜로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온 것일까?
넋을 놓고 있던 나를 일깨우는 것은, 느닷없는 울부짖음이었다.
“……크아아아앙!”
자그맣고 귀여운 목소리였다.
나름 위협적인 짐승을 흉내 낸 모양인데, 그 음색 탓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내 눈이 멍하니 그 소리의 진원지를 쫓았다.
그곳에는 암청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두 손은 짐승의 발톱을 따라하듯 오므리고, 눈을 감고 상반신을 앞으로 내민 폼이 꽤나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는 멍청히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뭡니까?”
크흠, 하고 소녀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그래도 수치심은 있는지 볼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소녀는 그 연회색의 눈동자를 내리깔며 말했다.
“그, 그…용이에요! 강아지는, 아무래도 이미 자리가 있는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흐릿한 미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처럼 눈치 없는 황녀가 머무르는 곳은 지상에 한 곳뿐이었으니까.
기나긴 방학의 끝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