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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97화 (297/649)

〈 297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3)

* * *

오랜만에 본 황녀는 한결같았다.

여전히 눈치가 없었고, 그러면서 내게는 헌신적이었으며, 또 ‘이안 경’이라 부르며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동일했다.

고작해야 두 달 남짓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악신의 권속부터 시작해서, 온갖 밀도 높은 사건을 겪은 내 시간 감각이 지나치게 어긋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창 청춘을 구가할 시기의 60일이었다.

누구에게든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바로 황녀가 이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오랜만에 재회한 황녀는 두 손을 모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기색이 팍팍 느껴졌다.

참 난감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나는 황녀로부터 이만한 동경을 받을 처지가 되지 못했다.

비록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곤 하나, 한창 때는 황녀와 극한의 갈등을 빚은 적도 있었다.

더불어 사정이 있었다지만 군중 앞에서 황녀를 폭행한 장본인도 나였다.

만일 용혈 문자가 없었다면 진작에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내가 황녀에게 저지른 짓이라곤 대개 나쁜 일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나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다.

단지 만나기만 해도 설렌다는 듯이.

나로서는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오랜만에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사람을 만나 신이 났으리라, 그렇게 속으로만 추론해 볼 따름이었다.

때때로 그 호의가 부담스럽다고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사이였다.

나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어여쁜 후배가 싫을 턱이 없었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멋있어요, 이안 경!”

다짜고짜 내뱉어진 감탄사였다.

내 어리둥절하다는 눈빛이 황녀를 향했다.

그러나 황녀는 이미 진리를 설파하는 예언자와 같은 태세였다.

즉 ‘이안 경은 멋있다’라는 주장이 지극히 당연하며, 누구도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내가 당황할 새도 없이 황녀의 찬사가 쏟아져 내렸다.

“들었어요, 악신의 권속을 해치우셨다고! 그러다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솔직히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과연 이안 경은 기사 중의 기사에요! 어떻게 그 괴물한테 두려움 없이 달려들 수 있…….”

“……잠시만요, 황녀님.”

그대로 두었다간 몇 분이고 내 업적을 찬미할 기세였다.

나는 우선 황녀의 입을 다물게 한 뒤에,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중앙대로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방학이 끝나지 않은데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황녀처럼 미리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굳이 새벽부터 밖에 나서는 자처할 이는 많지 않았다.

아니, 아카데미로 한정하면 사실 그럴 만한 사람이 많기는 했다.

단지 지금은 이미 수련실이나 도서관에 틀어박힌 뒤였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황녀에게 조심스레 주의를 주었다.

“황녀 전하, 알고 계시죠? 그 사건은 아직 대외비입니다… 악신의 권속이 나타났다고 하면 난리가 날 테니까요.”

“하, 하지만 어차피 목격자도 많고 증거도 확실해서 대부분은 알고 있을걸요? 애초에 이안 경의 그 영웅적인 활약을 숨겨야 할 까닭이……!”

“……피곤해지잖아요.”

한숨 섞인 한 마디였다.

나도 내 활약이 동네방네 알려지고, 명성이 드높아져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모든 인간은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휴식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그보다 더 강할 뿐이었다.

가문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뒤에도 엘시 선배의 고백 등 온갖 사건을 겪어야 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쌓인 피로가 막대했다.

어차피 악신의 권속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오래 숨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사건이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짧은 평화를 누려도 좋지 않겠는가.

이는 무척이나 상식적인 판단에 속했다.

하지만 황녀는 그러한 내 욕구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다시 몽롱해졌다.

“명예를 탐하지 않는 겸양의 자세까지… 멋져요, 이안 경. 과연 이안 경은 욕망에 찌든 인간들과 달라요…….”

나는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입맛을 다시며 포기해 버렸다.

죽어라 눈치가 없는 황녀는 용의 눈이 없으면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저 콩깍지를 벗겨내지 않는 한, 황녀가 내 심정을 먼저 알아챌 날은 멀기만 했다.

결국 나는 대화의 주제를 틀어보기로 했다.

“그보다, 아이린 경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아, 앗! 네, 네!”

잠시 멍하니 나를 응시하고 있던 황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 들었어요… 아직 수련이 남아 조금 더 저택에 남아있겠다고. 감사해요, 이안 경. 제 부하까지 챙겨 주셔서…….”

그러면서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황녀의 모습에서는 진심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제 부하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짜인 듯했다.

하기야 그러니까 아이린 경이 그 꼴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붙들고 있겠지.

아마 처음부터 아이린 경이 그처럼 의기소침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연달아 충격적인 실패를 겪으며 망가져 버렸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나조차도 그 죄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확히는 미래에서 온 ‘나’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으나, 나와 그 인간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테니.

그래서 내게는 황녀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린 경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요한 목격담을 전해 주기도 했고…….”

느닷없이 아이린 경을 칭찬하려니 온갖 소리가 다 나왔다.

중요한 목격담을 전해 주다니.

첩보원이라면 몰라도 호위기사가 맡아야 할 역할은 아니었다. 하물며 호위대상을 지키지 못하던 순간의 일이라면 더더욱.

또 그 증언이 ‘중요한 목격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저택을 떠나던 날, 아이린 경은 내게 또 다시 강조했다.

“그, 그때 눈앞이 번쩍이던 기억이……!”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이린 경. 리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나는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눈앞이 번쩍거린다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만일 누군가한테 얻어맞고 기절한다면, 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한 증언을 반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헛웃음을 머금으며 나는 황녀와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황녀가 의외의 화두를 꺼낸 것은 그때였다.

“그, 그런데 이안 경……?”

머뭇거리는 황녀의 안색이 살짝 파리했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식은땀이 그녀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 자연스레 의문성이 흘러나왔다.

“……네?”

“그, 호, 혹시 말이에요…….”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황녀는, 이내 각오를 다진 듯 눈을 질끈 감고 내게 물었다.

“여, 여동생 분께 따로 귀띔 받은 이야기는 없는……?”

‘여동생’이라.

황녀가 사기라도 당하지 않았다면 리아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터였다.

물론 나는 리아에게 전달받은 사항이 없었다.

더욱 의문이 깊어진 목소리로, 나는 황녀에게 되물었다.

“아니요, 없는데요…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아앗! 아, 아니에요!”

황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맹렬한 부정을 표했다.

고개를 재빨리 내젓던 그녀는, 허겁지겁 등을 돌려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 그, 그러고 보니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나중에 또 봬요, 이안 경!”

노골적으로 수상한 행색이었다.

나는 잠시 황녀를 뒤쫓아 추궁해 볼까 고민했다.

황녀는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 허당 같은 모습을 볼 때 몇 변만 캐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무례한 생각을 접어 버렸다.

황녀는 긴장한 탓인지 뻣뻣하게 굳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선배가 돼서 후배를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짐을 질질 끌며 숙소로 향했다.

오늘 하루는 방에서 푹 쉬리라 생각하면서.

**

아카데미로 돌아온 이후에도 내 일상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우선은 병상 신세를 진 사이 빠진 근육을 복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재활에 최선을 다했고, 그후에는 근육이 다시 회복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힐링 포션이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근섬유가 회복되는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개강이 오기도 전에 몸의 상태를 만전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아카데미에 돌아오고 나서도 걱정거리는 남아있었다.

바로 엘시 선배였다.

아카데미로 돌아온 직후, 엘시 선배의 행방이 묘연했다.

아마도 나를 피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에 대해 델핀 선배와 상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델핀 선배는 아카데미 1학년 때부터 엘시 선배와 악연을 맺어온 전적이 있었다. 당연히 아카데미의 그 누구보다 엘시 선배를 잘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델핀 선배는 아직도 유르디나 영지에서 복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내가 델핀 선배와 상담하겠다고 유르디나 영지로 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루핀 라이넬라.

엘시 선배의 남동생인 그라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 줄지도 몰랐다.

나로서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긴 했지만 말이다.

루핀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엘시 선배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핀의 반응이 벌써부터 두려웠다.

얼마나 나를 달달 볶을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어떻게 네 주제에 누나를 거절할 수 있냐고 뭐라 하겠지.

나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니, 남동생인 루핀은 몇 배로 더 답답한 심정일 터였다.

그렇게 나는 물어물어 루핀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카데미에는 인적이 드물었던 터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찌저찌 루핀의 행선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기숙사 옆의 숲.

마법 수련이라도 하려는 걸까, 싶어 나는 감각을 열어 루핀의 기척을 쫓았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익스퍼트에 이른 지금 내게 불가능은 없었다.

남쪽 숲이라면 몰라, 기숙사 옆에 위치한 숲은 규모도 작은 편이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핀을 발견해 냈다.

단, 루핀의 곁에 의외의 인물이 함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얼핏 보이는 고깔모자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엘시 선배였다.

나는 무심코 기척을 죽이고 수풀에 몸을 숨겼다.

아직 엘시 선배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는 껄끄러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답답할 지경이었다.

엘시 선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가 엘시 선배의 괴로운 심정을 증언했다.

그 앞에서, 열의에 가득 찬 루핀이 외치고 있었다.

“그래, 누나! 그 자세야! 용기를 가지고 해… 진정한 귀족은 잠깐의 수치를 견디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는 법이니까!”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무슨 훈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엘시 선배가 루핀을 가르치면 몰라, 루핀이 엘시 선배를 가르칠 일이 뭐가 있지?

내가 설핏 의문을 품었을 찰나.

“미, 미, 미, 미…….”

엘시 선배가 더듬거리며 토막 난 음성을 토해냈다.

꽤나 힘겨운 기색이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어느덧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엘시 선배가 무얼 연습하는지 알 듯했다.

사죄의 연습이었다.

‘미안하다’라는 그 한 마디가 어려워, 엘시 선배는 저토록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으나, 루핀은 도리어 엘시 선배의 마음에 십분 공감하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분루를 삼키며 외쳤다.

“그래, 그 기세야! 누나 조금만 더……!”

“미, 미, 으으… 미, 미아…미…….”

그리고 그 오랜 인내의 끝에, 엘시 선배는 비로소 완성된 언어를 토해냈다.

“……미친년아,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비록 그것이 사죄의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라이넬라 남매의 황당한 훈련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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