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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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의 대기는 고요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일출이 막 시작되는 이 무렵에는 기온이 그날의 최저치를 찍는다. 이는 태양이 대지를 달구는 한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여름이 한창일수록 새벽은 더욱 독특한 향취를 풍긴다.
햇볕과 장대비가 지배하는 계절이었다.
텁텁한 공기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 유독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름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련된 육체는 반복된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수련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야 했다.
여름도, 겨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검사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가능하면 무더위를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검을 아예 휘두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아직도 한낮이 되면 살갗이 익어버릴 듯 태양이 지글거리는 늦여름이었다.
이미 더위나 추위 따위에 굴하지 않을 만큼 강해지긴 했으나, 나는 굳이 새벽부터 시작되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땡볕 아래서의 수련은 여전히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쳇바퀴가 돌 듯 비슷한 하루가 반복됐다.
새벽 수련을 마치고, 식사를 한 뒤에, 또 다른 일상을 영위한다.
작년과 다르지 않은 일정이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또 하나의 일과가 추가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수련을 마친 직후,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겨 기숙사 옆의 숲으로 향했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단지 눈치 채 보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낯익은 인기척이 감지되면 숨을 죽이고, 풀숲에 몸을 숨긴다.
이것이 바로 내 새로운 일과였다.
공터에는 아침부터 묘한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라이넬라 남매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난데없이 왜 사죄를 연습하고 있단 말인가?
다름 아닌 그 엘시 선배가 말이다.
아카데미의 누구나 알다시피, 엘시 선배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 성질머리를 가지고 남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쉬울 턱이 없었다.
이는 몇 번에 걸친 실패가 증명했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포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며칠째 아침마다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누나, 그런데 진짜 사과하려고? 그깟 평민 녀석들은…….”
“괴롭혀도 찍 소리도 못한다고?”
엘시 선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정곡을 찔린 루핀은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그의 낯빛에는 여전히 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째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나가 그깟 평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하여간 누나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진심이었다.
인성도 그와 비례해서 별로라서 그렇지.
엘시 선배도 내심은 루핀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듯 새초롬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 쪽 눈을 슬쩍 뜨더니,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 주인님이 싫다는데.”
“아니, 그거야 뭐. 솔직히 말해 핑계가 아닐까…….”
“어쨌든 말이야.”
엘시 선배는 루핀의 일리 있는 추론을 단숨에 일축해 버렸다.
서서히 팔짱을 푼 소녀의 입에서 단호한 어조가 새어나왔다.
“그게 핑계라면, 모조리 없애주겠어… 핑계거리를 없애고 없애다 보면, 결국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루핀은 엘시 선배의 의지에 감탄이라도 했는지 침묵을 지켰다.
그러기를 한참, 루핀으로부터 조심스러운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러다 진심으로 차이기라도 하면……?”
“……야! 너 진짜,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엘시 선배가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자 루핀은 곧장 고개를 수그렸다.
남매 사이의 흔한 투닥거림이었다.
그 흐뭇한 일상의 틈새에서,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엘시 선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루핀의 추측이 옳았다.
사실 나는 아무런 변명이나 내뱉어 본 것에 불과했다. 엘시 선배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래서 나날이 마음이 괴로웠고, 내 진심은 그럴수록 더 알 수 없어졌다.
사실 나는 엘시 선배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라면, 거절하고 싶었던 차에 속 편한 핑계거리를 찾아냈을 뿐일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라이넬라 남매의 우스운 아침 훈련도 곧 끝을 맞이했다는 점이었다.
숲의 공터를 찾아가도 두 사람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해도 해도 안 돼서 포기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카데미를 활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어떠한 소문이 내 귀에 닿기 전까지는 그랬다.
“야,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수련을 끝마치고 수통을 채우러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앙대로의 양옆으로 늘어선 벤치에서 두 학생이 떠드는 소리가 얼핏 귓전을 스쳤다.
방학의 끝이 다가올수록 아카데미의 인파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간 나는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으나, 이제 슬슬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볼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예를 들어 엠마라든지.
엠마는 얼마 전 생활비가 떨어져 잠시 물약을 팔러 떠나갔다고 들었다.
한동안 버섯을 먹으며 견뎠으나, 결국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제값을 받고 물약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사 길드에 가야 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는 연금술사 길드의 지부가 없었으므로, 엠마는 워프 게이트를 타고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최소한 며칠은 아카데미에서 찾아볼 수 없으리라.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될 테니, 엠마도 슬슬 돌아와야 할 테지만.
그 소식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들려온 풍문이었다.
“있잖아, 그 ‘꼬마 악당’ 엘시 라이넬라 말이야… 그 선배가 요즘 사과를 하러 다닌다던데?”
걸음을 옮기던 내 발걸음이 우뚝, 하고 그 자리에 멎어버렸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한 여학생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대변하듯 되물었다.
“……헛소문 아니야?”
“아니,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벌써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야.”
괜히 내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통을 기울여 봐도 몇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더욱 입맛을 다셨으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학생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웃기지 않아? 그 라이넬라 선배가 평민한테 고개 숙이고 비는 모습이… 푸흐흐, 진짜 볼 만할 텐데.”
“아서라, 아서. 그러다 돌변해서 우리한테 불똥이라도 튀기면…….”
“……모르긴 몰라도, 그러지는 않을걸?”
그러면서 여학생 하나는 샐쭉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상만 해도 너무나 유쾌한 광경을 떠올렸다는 듯.
“욕도 먹고, 몇 대 맞기까지 해도 아무 말도 없었다던데?”
반면 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모를 당하는 엘시 선배를 상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물며 욕을 먹고, 폭행까지 당했다니.
수통을 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갈 정도였다.
물론 내가 그러든 말든, 여학생들은 무심한 목소리를 나누었을 따름이었다.
“쯧쯧, 그 애들도 어지간하다… 평민이 귀족을 때리다니.”
“그만큼 지독히 당한 거지, 너도 알잖아… 그 선배가 얼마나 잔인한지.”
그렇게 여학생 하나가 부르르 몸을 떨며, 엘시 선배에 관한 화제는 일단락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말도 없이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엘시 선배를 찾아가 보자.
그 충동에 몸을 맡겨, 나는 걷고 걸었다. 목적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내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성이 아닌 감정의 문제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엘시 선배의 행동은 옳았다.
그녀는 지금껏 무고한 약자들을 괴롭혀 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악의를 가지고 몇 번이고 평민과 하위 귀족들을 폭행해 오지 않았는가. 어찌나 심했으면 아카데미에 잔혹하다는 평판이 퍼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 죗값을 치러야 마땅했다.
단 한 번의 사과로 모든 과거가 씻겨 내려가지는 않겠으나, 최소한의 도리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 그래야 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기는 했다.
단지 엘시 선배를 만나면 무어라 말해야 할지, 그것만이 고민이었을 뿐.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내 방황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다 내 발걸음이 멈춘 것은 이른 점심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은은히 달구어진 목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숨을 죽이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음성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빼빼마른 사내였다.
안경을 쓴 그는 누가 보아도 수척해 보였다. 사내는가냘픈 주먹을 떨면서 눈앞의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깔모자를 쓴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엘시 선배.
비로소 나는 그토록 찾아헤매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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