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5)
* * *
엘시 선배, 하고 내가 무심코 그녀를 부르기 직전.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사과하러 다니는 거야, 그런다고 내 죄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굴욕을 인내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담백한 어조에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엘시 선배가 아니던가.
성질머리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였다. 사과는커녕, 지금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어야 정상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평민 앞에서 고개를 숙였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과를 전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성과였다.
혹시 루핀에게는 교육자의 자질이 있는 걸까?
하지만 그 감격의 여운은 길지 못했다.
내가 감동을 채 느끼기도 전에, 사내의 입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던 탓이었다.
“……웃기지 마!”
엘시 선배는 움찔, 하고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함 따위는 이제 익숙하다는 태도였다.
“내, 내가 그 이후로 얼마나 악몽에 시달렸는지 알아?! 매일 길을 걸을 때마다 눈치를 살펴야 했다고! 혹시 당신 패거리가 있을까 봐……!”
“……미안.”
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사내의 말에도, 엘시 선배는 묵묵히 사죄의 말을 입에 담을 뿐이었다.
사내는 그 유순한 태도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 또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엘시 선배의 손속은 특히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더불어 가문의 힘을 앞세워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연줄도 없는 평민이 견디기에는 힘든 협박이었다.
그러다 보면 누구든 꺾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혹은 둘 다든.
그렇게 심신에 깊은 상처를 남긴 당사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느닷없이 사과를 하러, 그간 더없이 반성했다는 모습으로.
어이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엘시 선배를 용서할 마음도 들지 않겠지.
사내의 목소리가 더없이 싸늘해진 것은 그 탓이리라.
“……꺼져.”
희미한 물기마저 섞인 음색이었다.
메마른 사내는 안경을 벗고 허겁지겁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겪었던 아픔이 다시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시 선배는 고개를 숙인 채, 또 다시 사과를 건넸다.
“다시 말하지만, 미안… 네가 바란다면 몇 번이고 다시…….”
“꺼지라고 했잖아!”
사내가 거칠게 엘시 선배의 몸을 밀친 것은 그때였다.
꺄악, 하고 엘시 선배는 자그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엎어졌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소문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과연 엘시 선배가 이마저 참아낼 수 있을까?
보아하니 사내도 나와 비슷한 의문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엎어진 엘시 선배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 들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내는 더듬거리며 경고를 남겼다.
“아,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리고 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당신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거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사내는 비틀비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엘시 선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그는 이내 건물 뒤에 숨어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외진 건물의 뒷마당은 사방팔방이 뚫려있었다. 노리고 이 길을 고르지 않았다면, 나와 마주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사내가 내가 있는 곳을 노리고 찾아왔을 가능성은 전무했으니 말이다.
당장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명백히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나는 엘시 선배 이상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야 중앙대로 한복판에서 황녀의 호위기사들을 박살낸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황녀 본인을 폭행하기까지 했는데, 내게 정상적인 사고를 기대하는 인물은 이제 아카데미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신전의 집중치료실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심지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황녀가 배후에서 나를 지원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굳이 나와 맞서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하자면 엘시 선배의 상위호환이었다.
그 실력이나 손속의 잔인함, 그리고 나를 뒷받침하는 배경까지도 그랬다.
어느 쪽이든 억울한 명성이 아닐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먼저 상대를 공격한 적이 없었다.
대개는 정당한 반격이었고, 힘없는 평민에게 폭력을 가한 적도 없었다.
황녀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뿐이고.
하지만 이 구구절절한 사정을 모두가 알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사내가 엘시 선배보다 나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물며 내가 엘시 선배와 각별한 관계라는 소문은 이미 아카데미에 파다했으니, 그로서는 더더욱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사내의 몸이 덜덜 떨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울먹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마치 전설 속의 마수라도 마주친 듯한 모습이었다.
“오, 오해… 오해입……!”
“……됐어.”
한숨을 푹 내쉬며, 내가 내뱉은 답이었다.
물론 사내는 불신을 담은 눈빛으로 내 기색을 힐끔힐끔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실제로 내 심기는 편치 못했다.
눈앞에서 엘시 선배가 밀쳐지고 엎어지는 꼴을 보니, 이유를 불문하고 울컥 솟구치는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나도 알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애써 마음을 다독이면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가장했다.
“네가 피해자잖아… 그냥 가.”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어느덧 엘시 선배와 정이 들고 보니, 무작정 엘시 선배의 편을 들고 싶은 욕구가 인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 욕심을 경계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파오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불쌍한 엘시 선배.
아니, 불쌍하면 안 되는데 왜 자꾸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는 걸까.
사내가 허겁지겁 자리를 피할 때까지도, 나는 말없이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상을 팍 구기면서, 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 후에는 늘 그랬듯이 험한 입담을 선보였다.
“……아오,씹새끼.사내놈이 속은 좁아터져서.”
그러나 그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과 굴욕이 묻어나오고 있어서.
나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엘시 선배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조용히 물러났을 뿐이었다.
다음날, 결국 나는 레토를 찾아갔다.
엘시 선배와의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기가 꺼려졌으나, 내게는 믿음직한 참모가 필요했다.
레토라면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터였다.
과연 그는 이미 엘시 선배에 대한 소문을 전부 들어 알고 있던 차였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왜 일을 그 지경으로 꼬아 놔?”
“……나도 내가 이렇게 못난 놈인 줄 몰랐지.”
“그럼 이 기회에 내가 알려줄게. 넌 아주 못났고, 감당할 수도 없는 주제에 여지나 잔뜩 주고 다니는 쓰레기야.”
레토는 늘 그렇듯 가차 없는 평가를 건넸다.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나는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었을 따름이었다.
“좋아, 내 잘못이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레토.”
“네 마음은?”
곧장 되돌아온 반문이었다.
그리고 도무지 대답할 수가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허라도 찔린 기분이었다.
레토의 연녹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네 마음은 어떻냐고, 그걸 알아야 할 것 아니야.”
그러나 며칠을 고민해도 나오지 않던 답이 곧바로 튀어나올 턱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다시 기나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사실, 그것도 잘…….”
“제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레토는 그렇게 말하며,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한 장 훅 넘겨 버렸다.
마치 내가 어떻든 간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숨기거나, 착각하거나, 눈을 돌릴 뿐이지… 지 마음을 지가 모르면 누가 알아 줘? 연애소설에 빠진 계집애들이나 믿을 소리지. 뭐,그게 또 인간 심리의 재미있는 부분이다만…….”
레토의 눈동자가 다시 흘깃 나를 향했다.
나는 레토의 지적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너는 이제 도망칠 여유도 없어. 나처럼 뿌리까지 썩은 인간이라면 몰라, 너는 어정쩡한 인간이라 계속 힘들어할 게 뻔하거든.”
“……그럼?”
“진심을 털어놓는 수밖에.”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레토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또 다시 책장을 휙휙 넘기며, 내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딱 봐도 모르냐? 그 선배는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도 진심으로 답해야지.”
고민 끝에 나는 레토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늘 그랬왔듯이.
레토의 말이 옳았다.
아무도 진심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도, 엘시 선배도.
그러니 내게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 셈이었다.
결국 나는 각오를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엘시 선배의 진심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진심과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