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6)
* * *
엘시는 며칠 동안 온갖 굴욕을 겪어야 했다.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속으로는 화가 나고 인내가 끊어질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으나, 엘시는 끝끝내 이를 악물며 제 성질머리를 죽였다.
분하고 힘들었다.
평민 따위에게 왜 그녀가 사죄의 말을 읊어야 한단 말인가.
약자는 짓밟히는 것이 당연하다.
엘시가 그들을 재기할 수 없을 만큼 무너트린 것은, 언젠가 그들이 강자가 되어 그녀를 짓밟으려 들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엘시가 살아가는 세계는 늘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강자는 짓밟고 괴롭히며, 약자는 짓밟히거나 강자가 되어 다시 짓밟는다.
따라서 그녀의 폭력 또한 정당방위에 속했다.
엘시는 또 다시 짓밟히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아프고 힘들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엘시의 숨김 없는 본심이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엘시는 슬프고 억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안을 떠올렸다.
약자를 짓밟기는커녕 지탱하고 보듬어 주던 사내였다.
첫 만남은 좋지 않았지만, 그를 만나면서 엘시의 운명이 일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엘시의 세계는 더는 라이넬라 가문에 갇혀 있지 않았다.
이안이야말로 엘시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주인이었으며, 삶이었고, 세계였다.
그러니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윤리를 요구한다면 그에 얼마든지 맞춰 주리라.
그렇게 소녀는 이를 악물며 굴욕의 길을 감내했다.
과거의 악연을 마주친 것은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요즘 고위 귀족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던… 개새끼 라이넬라?”
사탕을 입에 물고 등장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패거리를 몰고 다니고 있었는데,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고학년쯤 되면 누구나 패거리에 속하거나 몰고 다녔으니까.
엘시는 흘깃 그 여인을 노려보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지난번에 맛본 전기 맛이 잊히지 않았나 봐? 루드밀라.”
루드밀라라 불린 여인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엘시의 패거리와 맞붙었다가 박살이 난 전적이 있는 여인이었다.
엘시와 마찬가지로 딱히 질이 좋은 집단은 아니었는데, 고위 귀족이라는 점 때문에 일부러 건들지는 않고 방치했던 존재였다.
그러다 시비가 걸리자, 기회를 노려서 완벽한 명분을 잡고 단숨에 제압했었지.
아카데미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의 사건이었다.
그 대가로 오른쪽 어깨가 박살나긴 했지만, 루드밀라의 가문을 닥치게 하는 데 유효했으니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루드밀라는 엘시의 앞에 서면 기가 죽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기세가 등등한 모습이었다.
엘시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루드밀라는 여전히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라이넬라, 요즘 열심히 평민들한테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던데? 그 값싼 고개 좀 나한테도 숙여주지 그래.”
“좆까, 썅년아.”
파직, 하고 엘시의 손에서 전하가 피어올랐다.
상대는 다수였다.
본래라면 마법사인 엘시의 열세겠지만, 지난 시체 거인과의 전투에서 한꺼풀 성장한 그녀라면 아직 해볼 만은 했다.
또 열세라면 어떻겠는가.
원래 싸움은 가장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지는 놈이 이기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루드밀라는 여전히 희희낙락하기만 했다.
“그래도 되겠어? 또 나를 건드렸다간, 나쁜 소문이 퍼질 텐데… 또 폭력 사건에 얽혀 버렸다고.”
“그거야 힘없는 평민 새끼들 이야기고, 너 같은 양아치 새끼가 걔네랑 같아?”
“응, 같지.”
루드밀라는 그러면서 제복에 가려져 있던 제 새하얀 왼팔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흉터처럼 붉은 실선이 균열처럼 가 있었다.
마치 벼락이 퍼지는 모양새였다.
누가 남긴 흔적인지는 명백했다.
그 시절에, 엘시가 남겨주었던 상처.
그것이 아직 흉터로 남아있는 것이다.
엘시는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쭈, 옛날 생각 좀 나게 하는데?”
“누가 네 말을 믿어줄까?”
루드밀라는 나지막히, 타오르는 눈빛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엘시의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루드밀라를 향했다.
“너 말이야, 요즘 이안 그 꼬맹이가 너 쫓아다니던 거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못 미더우면 그랬을까… 심지어 네가 당하고 있는데도 그냥 보내줬다더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후우, 하고 루드밀라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썅년 만들기는 쉽다는 거?”
“……주인님은 절대 안 믿을걸.”
“그 주인님한테 버려져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유기견처럼.”
푸흐흐, 하고 루드밀라는 웃음을 터트리며 양팔을 펼쳤다.
“그리고 애초에 난 너랑 싸우러 온 거 아니야… 그냥 사과 받으러 온 거라고.”
엘시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하, 하고 토막 난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루드밀라의 속셈이 보였다.
싸우러 오진 않았다.
옛날에 엘시도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단지 구석에 몰아두고, 오래도록 잡아두고 있을 뿐이다. 말로 괴롭히면서.
이 수법이 짜증나는 까닭은, 그렇다고 폭력으로 대응할 수도 없단 점이었다.
그러면 일단 선제공격을 이쪽에서 가하는 셈이었으니까.
아카데미 곳곳에 벌어지는 사실을 기록할 만한 장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증언과 흔적으로 살펴봐야 하는데, 싸움의 흔적이 가장 선명히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엘시는 코웃음을 치며 떠나가려 했으나 이를 놓아줄 루드밀라가 아니었다.
루드밀라가 엘시의 어깨를 꾹, 하고 힘주어 쥐었다.
엘시는 상상 이상의 악력에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자존심이 있어 매서운 눈빛으로 루드밀라를 쏘아보는 것으로 그쳤지만 말이다.
루드밀라는 위협적인 목소리를 흘렸다.
“……그냥 사과 좀 해, 썅년아.”
질척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음색이었다.
자존심을 다칠 대로 다친 맹수의 으르렁거림이었다.
“네가 평민 따위한테 고개 숙이고 다니면서,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알아? 그런데 내게는 사과 못하겠다고? 하급 귀족한테는 알랑거리면서 주인님, 주인님, 하고 다니잖아?”
엘시는 탁, 하고 루드밀라의 손을 쳐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어느덧 주위로 패거리들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겪는 위기에 엘시는 입술을 짓씹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즘 이안 그 꼬맹이가 너 쫓아다니던 거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못 미더우면 그랬을까…….’
루드밀라가 이토록 막 나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엘시가 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루드밀라는 절묘하게 그 선 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엘시는 헷갈렸다.
과연 이안은 엘시를 용서해 줄까?
‘꼬마 악당’ 시절의 엘시로 돌아가는 것은 간단했다.
개처럼 싸우고, 그래도 안 되면 옛 패거리를 소집해서 패싸움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싫다고.
엘시는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싶었다.
겁이 많아서, 도리어 컹컹 짖고 사람을 물어뜯던 투견 시절의 자신과.
엘시도 사람이었다.
그간 사과를 다니면서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한 결과, 그녀의 정신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뒤였다.
오히려 낮아진 자존감이 그녀에게 오판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한 번 당해주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전하를 피워올리던 엘시의 손이 움찔했다.
그 눈빛에 담긴 망설임을 읽어내지 못할 루드밀라가 아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사실이었구나? 미친년… 지를 도끼로 팬 놈한테 반한 것도 모자라, 애완견을 자처해, 이제는 고위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까지 팔아먹어?”
으득, 하고 루드밀라는 이를 갈았다.
지금껏 숨겨왔던 엘시를 향한 열등감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엘시에게 당한 이후 루드밀라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무시무시하던 엘시는 일개 애완견으로 타락해 버렸다.
그 점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엘시뿐만 아니라, 루드밀라조차 우스운 존재로 격하시켜 버리는 것만 같아서.
루드밀라는 이제야 그 분노를 터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미칠 것만 같았다.
으드득, 하고 엘시의 어깨를 붙잡은 루드밀라의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엘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 끄… 꺄아아아악!”
그러면서도 엘시는 루드밀라에게 반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루드밀라는 희열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며 말했다.
“미안, 미안. 그래도 좀 참아줘? 어쩌다 그런 거니까… 조금만 대화를 나누자.”
엘시와의 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그래, 그때까지는 영락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콰득, 하고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는.
어라, 힘 조절을 잘못했나?
루드밀라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 뜨끈한 액체가 제 볼을 적시자 시선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카데미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깨에 틀어박힌 손도끼.
루드밀라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내달렸다.
마치 본능처럼, 루드밀라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뇌리를 새하얗게 태우는 통증.
“으극, 끄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핏물이 공터를 적신다.
*
나는 후우, 하고 달구어진 숨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지켜보고 있을 심산이었다.
또 엘시 선배가 괴롭힌 사람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엘시 선배가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내 인내는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손도끼를 던진 이후였다.
나는 손목을 풀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나를 향하는 좌중의 시선이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오직 하나, 엘시 선배만이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름 모를 여학생 하나가 손도끼를 얻어맞고 신음을 흘렸다.
나를 보자마자 공포에 젖어 주저앉았다.
그리고 엉덩이를 질질 끌며 도리질을 치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징계위원회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탁, 하고 여학생의 어깨에서 뽑혀 나온 손도끼가 다시금 내 손에 안착했다.
그러자 손도끼가 가로막고 있던 출혈이 더욱 극심해졌다.
여학생은 이를 악물고 참아내려 했으나, 결국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비틀 무너져 내렸다.
“으, 끄… 끄으으으으윽……!”
그 신음을 배경으로 삼아, 나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피 묻은 손도끼로 손바닥을 두드리면서.
“어, 신고해 봐.”
용혈 문자 쓰면 그만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