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7)
* * *
전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내게 대항할 의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몇 명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고, 몇 명은 주춤거리다가 얌전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항복의 표시였다.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을까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엘시 선배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를 굳이 붙들고 폭행할 까닭은 없었다.
내게 덤벼들었다면 또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나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왕년의 별명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페르쿠스 가문의 평화주의자.
얼마나 멋진 호칭이란 말인가.
결국 진심은 언젠가 통하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들 얌전히 주저앉는 모습을 보라.
이제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아카데미 생활과는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내 입가에는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적의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학생이 그랬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잇새로 옅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도끼에 당한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고민에 잠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낯이 익은 인물이란 뜻이었다.
한동안 턱을 쓰다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이름을 떠올려 냈다.
“……루드밀라 선배?”
아카데미는 넓으면서도 좁았다.
재학생 전원의 얼굴을 알고 지낼 수는 없었으나, 몇 년 동안이나 함께 부대끼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인물이 있었다.
일명 아카데미의 ‘유명인사’들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델핀 선배나 엘시 선배는 물론이고, 셀린이나 세리아가 이에 속했다. 그 외에도 유렌이나 성녀, 네리스 선배와 황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다 보면 그들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아카데미에서 소문이 도는 속도가 빨랐던 탓이었다.
셀린조차도 2학년 검술학부의 두 송이 꽃으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면 ‘유명인사’라고 불리기엔 조금 부족한 양아치들도 알게 되는데, 바로 루드밀라 선배가 그랬다.
아카데미 내에서 나름 악명을 날리던 인물이었던 기억이 났다. 어느 시점부터 얌전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엘시 선배만큼은 아니라도, 저학년 시절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선배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 앞에서 파르르 몸을 떨고 있는 신세라니.
참 시간의 흐름이 무상했다.
또 속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먼 옛날에 힘을 앞세워 남들을 제압하던 루드밀라 선배와 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가 싶어서였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조금 더 강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회가 앞섰으나, 당장은 이를 티낼 때가 아니었다.
내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그, 그러니까…….”
‘징계위원회’를 운운할 때는 그토록 기세가 등등하던 루드밀라 선배였다.
그러나 내가 재차 물으니 도리어 기가 죽은 모양새였다.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에서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내 태연자약한 태도가 그녀를 더욱 공포로 몰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신은 설득을 부른다.
나는 진심으로 루드밀라 선배가 나를 신고해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민을 해야 할 쪽은 루드밀라 선배였다.
도대체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범주에 속하고 있으리라.
혹은 이대로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연달아 이어지는 의심과 공포 속에서, 그녀의 기세는 한 풀 꺾이고 말았을 터였다.
루드밀라 선배의 심지가 굳었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났겠지.
하지만 그녀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보일 만한 기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루드밀라 선배가 선택한 것은 변명이었다.
“……그, 그래! 나, 나는 단지 사과를 받으려고 그랬어!”
내 눈이 슬그머니 엘시 선배를 향했다.
엘시 선배는 우물쭈물하며 내 눈을 피해 버렸다.
루드밀라 선배에게 당하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아직 나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루드밀라 선배였다.
그녀는 엘시 선배가 입을 다물자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의 팔에 흉측한 흉터가 비치고 있었다.
“나, 나 옛날에 이 년한테 당한 적이 있거든! 학교폭력이었어… 그래서 사과를 받으려고 한 거야, 어차피 요즘 사과하러 다닌다며?”
흐음, 하고 내 입에서 침음이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개입할 여지는 딱히 없었다.
엘시 선배를 구석에 몰아가고 위협한 것이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저만한 상처가 남을 만한 폭력이었다.
아무리 내가 엘시 선배를 아껴도 이를 두둔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정당방위야! 오히려 이 년이 사과를 요구하는 나를 폭행하려고……!”
“엘시 선배.”
나는 그렇게 나지막이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내리깐 엘시 선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솔직히 말해 루드밀라 선배의 증언을 전부 믿기는 힘들었다.
지금껏 엘시 선배가 일방적으로 폭행했던 인물들은 대개가 평민이나 하급 귀족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고위 귀족인 루드밀라 선배를 함부로 건드렸다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 담백한 물음이 뱉어진 사정이었다.
“진짜에요?”
엘시 선배는 말없이 발끝으로 애꿎은 땅 위를 긁었다.
할 말이 궁하거나, 망설이고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엘시 선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다급해진 쪽은 루드밀라 선배였다.
그녀는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려 들었다.
“당연히 진짜……!”
“……아니라면?”
그 전에 엘시 선배가 조심스레 반문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잠자코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 소심한 음색으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엘시 선배답지 않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건네러 다니면서, 온갖 수모를 당했을 그녀였다.
난생 처음으로 자존감이 바닥까지 깎이는 경험을 했겠지.
괴로웠을 터였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이 사죄를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또 고작 그 정도로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자신만만하던 태도를 져버려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은근한 불안이 묻어나오는 그 목소리에, 내 눈이 조용히 루드밀라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절박하게 외쳤다.
“너, 너 쟤 말 믿을 수 있어……? 지금 나한테는 흉터가……!”
“네.”
그리고 콱, 내 발길질이 루드밀라 선배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루드밀라 선배는 그대로 숨이 막혀 바닥으로 엎어졌다. 부르르 떨리는 손이 제 가슴팍을 두드리고 있었다.
불신이 어린 시선이 나를 향하기도 전.
나는 땅을 짚은 루드밀라 선배의 손을 살며시 즈려밟았다.
“끄흐, 으으… 아아아아아아악!”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심한 한 마디를 던졌다.
“믿는데요.”
적어도 엘시 선배는 내게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배치되는 증언의 발화자가 양아치라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엘시 선배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예전에 약속했듯이.
**
루드밀라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의 진상을 실토해야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엘시 선배와 루드밀라 선배의 패거리는 예전부터 충돌이 잦았다.
흔한 세력다툼이라고 해도 좋았다.
특히 루드밀라 선배는 엘시 선배와 달리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관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쓰기 편한 일꾼처럼 부르기도 하고.
엘시 선배는 주제파악도 못하는 주제에 여왕 노릇을 하려 드는 루드밀라 선배가 싫었으며,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주로 루드밀라 선배가 부른 피해자들을 위협해서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루드밀라가 피해자에게 뭐라고 하면, 엘시 선배가 나서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계기로 갈등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루드밀라 선배는 엘시 선배에게 참패했고, 엘시 선배의 말로는 ‘영광스러운 흉터’를 팔에 얻었다고 했다.
비유하자면 그랬다.
“……그냥 깡패들 영역 싸움이었어요?”
“꼬,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멋쩍어진 엘시 선배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루드밀라 패거리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폭행의 정도도 심하지 않고, 무저항의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는 것은 내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앞으로 엘시 선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다시 볼 일도 없으리라.
대신 루드밀라 선배에게는 조금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아직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엘시 선배와 단 둘이 남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나는 엘시 선배의 어깨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옷 너머였으나, 골절된 상처를 잠시 봉합하는 데는 이 정도로 충분할 터였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반격하지 뭐하고 있었어요? 어차피 무고한 녀석들도 아니고, 더는 피해자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좋게 끝난 일인데.”
내 질문에도 엘시 선배는 한동안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는 결국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주, 주인님이 싫어하시니까…….”
나는 붕대를 감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엘시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이 더욱 눈에 띄었다.
“주인님이, 싫어하시잖아요… 누구 때리는 거.”
“……그래서 사과하러 다녔어요?”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 핑계나 대겠다는 마음으로 한 말이 결국 이곳까지 엘시 선배를 몰아붙였다.
사실 언젠가는 풀고 가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엘시 선배의 죗값은 엘시 선배가 치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만일 지금 털고 가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은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갔으리라.
그래서 나는 더욱 진심으로 엘시 선배의 실수를 지적해야 했다.
“엘시 선배, 그거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사과한 거예요?”
엘시 선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거짓말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엘시 선배는 내 ‘믿는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 부채의식이라도 생긴 듯했다.
조금이라도 내게 거짓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움찔 몸을 떨며 내게서 시선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또 다시 후우, 하고 달구어진 한숨을 토해냈다.
“엘시 선배, 그건 사과가 아니에요. 그냥 엘시 선배의 자기위로일 뿐이죠. 필요에 의해서, 상대를 이용하는… 피해자는 엘시 선배를 보기만 해도 덜덜 떨릴 텐데,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도 없으면서 가면 어떡해요.”
그건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 타박에도 엘시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단지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뿐이었다.
그동안 당했던 온갖 수모와 멸시가 이슬이 되어 떨어졌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엘시 선배의 목소리가 유독 가냘팠다.
울음을 억지로 삼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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