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 4.5 막간: 연인과 애견 사이(8)
* * *
“나,나도 최선을 다했어…그런데 평생 배워 온 게 그딴 것밖에 없으니까,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나도,나도 진심을 다해서 사과하고 싶단 말이야…….”
나는 한동안 그 울먹임을 감내했다.
엘시 선배의 흐느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한 울음소리로 화했다.
“……미안하다고,미안하다고 생각해.내가 잘못했겠지.앞으로도 노력할 거야.언젠가는,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그런데 난,이제 단 한 순간이라도 네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애원에 가까운 어조였다.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내 모습을 애절하게 담았다.나는 그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에 그대로 빠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도도하던 여자였다.
아마 평민 따위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여인이 모든 자존심과 명예를 팽개치고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욕을 먹고 폭행을 당하더라도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할 만큼.
그것이 오직 내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언젠가 그녀도 변해서,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이라도 내 곁에서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하잘 것 없는 이유였다.
나는 결국 또 다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엘시 선배는 불안과 초조를 담아 내게 물었다.
“이런 내가 미워……?”
그것이 엘시 선배의 진심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가슴에 새겨두었던 레토의 조언을 떠올렸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초로 내 여린 부분을 고백해 보기로 했다.
“……엘시 선배.”
내 부름에 엘시 선배는 침묵을 택했다.
그녀도 내 분위기가 일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사실 저 말이에요,그다지 강하지 않아요.죽는 것도 무섭고,속이 좁기도 하고…그런데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소중한 사람이 늘어나는 거예요.”
난생 처음으로 털어놓는 이야기라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으나,엘시 선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여전히 진지한 태도였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알다시피,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잖아요…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잃는 것도 무서운데,제가 죽어서 제 소중한 사람들이 그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이미 충분히 소중한 사람인데?”
“그래도 연인만큼은 아니겠죠.”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느닷없이 내 등에 짐이 얹어졌을 때에는,그 무게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실감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내 등에 얹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서서히 알게 되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이,그러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미래가.
왜 나여야만 하냐고.
스스로를 학대하듯 몰아붙이며,삶과 죽음의 능선을 오고가며 나는 수없이 물었다.
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였다.
다만 나는 이 짐이 내가 짊어지는 선에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언젠가 이 짐에 눌려 압사하더라도,아픈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엘시 선배의 마음을 일단 밀어냈다.
내 진정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내 어깨 위로 얹어진 짐의 무게에 신음하면서.
“그래서 엘시 선배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어요…절대로 엘시 선배가 미웠던 건 아닙니다.미안해요,그때 거짓말해서.”
기나긴 고백이었다.
여태껏 레토나 셀린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진심이었다.
그러다간 괜히 더 불안해 할 것만 같아서.
내가 맞서야 할 적은 그 규모조차 불분명한 암중의 세력이었다.중심이 되어야 할 내가 흔들리면 그 불안이 전염될 위험이 존재했다.
특히 델핀 선배 같은 경우는 오직 내 강함만을 보고 따르는 인물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엘시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괜히 머쓱해져 눈을 돌렸다.
내게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엘시 선배도 델핀 선배처럼 내 강함을 선망하는 듯 보였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엘시 선배가 떠나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씁쓸하기는 했지만, 엘시 선배를 속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 옆에 선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한참 후,엘시 선배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귀,귀…….”
초조한 침묵 끝에 뱉어진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하고 내 눈동자가 다시 엘시 선배를 향했을 찰나.
훅,하고 향긋한 여인의 체향이 내 코끝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느껴졌다.나는 한참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엘시 선배가 나를 제 가슴팍에 끌어안은 것이다.
나는 일순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엘시 선배는 체형 탓에 가슴이 작은 듯 보였지만,은근히 컸다. 적어도 내 입과 코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이대로 몸을 빼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리해서 빠져나갔다가는 엘시 선배의 다친 어깨가 더욱 망가질 수도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숨이 막혀 탁탁,하고 엘시 선배의 팔뚝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든 말든,엘시 선배는 꺅꺅거리며 희열에 찬 소리를 뱉어낼 뿐이었다.
“귀,귀여워어어어!우리 주인님,내가 슬퍼하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요?그래서 나 밀어냈어요?오구구,오구구!”
아니,그보다 숨을 쉬고 싶다고요.
나는 필사적으로 의사를 표출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엘시 선배가 한 술 더 떠 제 볼을 내게 부비댔던 탓이었다.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엘시 선배, 예전부터남동생을 꽤 아꼈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녀는 동생 캐릭터에 약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어울려 주고 싶기는 했다.
솔직히 말해서 엘시 선배의 품 안은 기분 좋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숨이 막혀서, 결국견디다 못한 내 손이 엘시 선배의 팔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그럼,함께 노력하면 안 될까?”
탁,하고 그 말과 함께 내 몸을 긴장시키던 힘이 풀렸다.
엘시 선배가 나를 끌어안는 힘이 느슨해지는 것 또한 그와 동시였다.
속박에서 풀려난 나는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의아한 시선을 엘시 선배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자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엘시 선배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그래, 마치 어른 같았다.
아니,당연히 우리 둘 다 어른이긴 했는데.
“앞으로 나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받을 테니까,주인님도 대답을 정해두는 거야…그때까지는 참아볼게,나.”
그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나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엘시 선배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을까.
그 해답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나는,그저 멍하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그럴게요.”
시련과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혹시 몰랐다.시체 거인과의 일전이 엘시 선배를 한 꺼풀 성장시켰는지도.
물론 그 이후의 엘시 선배는 평소와 같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이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우득,하는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어깨뼈에 충격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엘시 선배는 입술을 짓씹으며,늘 그렇듯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악!그 씨발년 때문에 진짜……!”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엘시 선배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후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내 눈치를 살피기를 얼마쯤.
결국 엘시 선배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내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헤헤,주인님한테 한 말 아닌 거 아시죠?이,이건 다 그 루드밀라 썅년한테 하는 말……!”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성숙한 모습이 환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흐릿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이러는 엘시 선배도 좋았다.
오히려 마음은 이쪽은 더 편했다.
드디어 엘시 선배와의 관계가 되돌아온 것 같았으니까.
이후 엘시 선배는 내‘애완견 이상 연인 미만’을 자처하며 분란을 몰고 오기도 했으나,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저 지금을 만끽하기로 했다.
**
엘시 선배와의 갈등이 해소된 날,나는 술을 마셨다.
혼곤한 정신 사이로 나는 네 번째 편지를 다시금 읽어 내렸다.
이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일지는 대략 예상이 갔다.
아마도 엘시 선배겠지.
그렇다면 나는 미래에 엘시 선배와 연인이 된 걸까?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을 이야기였으나,나는 어쩐지 그것이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모든 아귀가 착착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지나온 궤적은, 네 번째 편지에서 말하는 미래와 정확히 일치했다.
또 다시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에 나오는 미래를 지켜낸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편지가 올지 모르겠으나, 여태껏하던 대로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끝이 다가오리라.
나는 그렇게 흐뭇한 심정으로 잠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꿈을 꾸었다.
기나긴 꿈은 생생한 이상으로 혼잡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헐떡이면서 나는 눈을 떴고,본능처럼 머리맡의 탁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편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아니, 실은 '언제나'와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도착한 편지와는 노골적으로 다른 양상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흐르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한 채, 나는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탁자 위에는,편지가 두 통이나 와 있었다.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