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04화 (304/649)

〈 304화 〉 5. 빵과 비수(2)

* * *

To. 사랑하는, 나의 이안 페르쿠스에게

오늘도 달이 밝네.

주인님도 알고 있어? 차가운 밤공기는 술을 마실 때 멋진 풍취를 제공해 주지, 덧붙여 달빛마저 아름다운 날에는 무심코 포도주를 떠올리게 돼.

그래, 그리고 당신도.

달보다도 빛나는 내 사랑,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

감미로운 미주의 취기조차 당신을 내 마음 속에서 쫓아내지 못하네.

되짚어 보면, 참 재미있는 인연이야.

가주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내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거든. 사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실권은 내가 쥐고 있었으니, 무어라도 달라질 리는 없었지.

내 삶은 늘 그랬어.

태어날 때부터 걸어갈 길이 정해져 있었지.

아마도 승리와 영광으로 점철된 미래였을 거야. 북부의 맹주는 누구에게도 패배해서는 안 되니까, 어린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었어.

만일 꺾이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내 삶의 마지막 날이어야 했거든.

그런데 우습지?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아양을 떨고 있잖아. 더불어 사랑에 눈 먼 여자가 돼서 아직도 당신을 쫓아다니고 있고.

몇 년 전의 나에게 말해줬다면 웃다가 까무러쳤을 거야.

아니, 그날 당신이 우리 영지에 찾아오기 전까지의 나도 마찬가지겠지.

그야말로 많은 것이 달라진 전투였어.

그날 무수한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야. 물론 그중에는 내 운명도 포함되어 있겠지.

승리를 향한 집착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불쌍한 계집애.

사랑도 절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삶이었어. 그러던 내게 난생 처음으로 시련이 들이닥쳤던 거야. 최소한 내 삶의 ‘계획표’에는 포함되지 않은 사건이었지.

그래서 더더욱 내 모자람을 실감했는지도 몰라.

내가 알고 있던 세계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거짓이었거든.

스스로 가문의 창살을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탓이겠지, 그러다 보니 온갖 오해와 오류가 내 뇌리를 짐승처럼 물어뜯더라도.

엘프에 대해서도.

여동생에 대해서도.

아버님에 대해서도.

더 나아가 가문과 제국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당신과 함께해서 살았어.

나 또한 많은 것을 버리고 희생해야 했지만, 내 곁에 당신이 남아주었으니 감사해. 몇 년 전이라면 ‘사랑에 넋이 나간 멍청한 년’이라고 욕했으려나?

그래도 상관없어.

멍청하더라도 행복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까.

포기하지 않는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주어서 참 행복해.

그러니 앞으로도 그 여자들이 귀찮게 굴면 찾아와, 언제든지 품을 내줄 테니까.

내 몸도, 마음도 이미 당신의 것이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나는 이미 당신의 소유물이니까, 거부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걸.

북부의 태양이라 칭송받는 미모도, 뭇 남성들이 군침을 흘리는 내 가슴도, 은밀한 골짜기를 숨기고 있는 내 엉덩이도.

오직 당신만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

당신도 나와 같은 달을 보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네.

달빛은 내 색을 닮았고, 우리 둘의 첫날밤도 달이 밝은 밤에 이루어졌으니까.

포도주를 머금은 채 혀를 섞었었지, 아마?

지금껏 맛본 술 중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 났던 기억이 나.

오늘도 나는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언제든 찾아와, 그 여자들한테는 특별히 비밀로 해줄게.

알겠지, 주인님?

당신의 암컷이 북방에서 애타게 벌을 바라고 있어.

추신 1: 얼마 전에 여동생이 아란코트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무리 싸가지 없는 동생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멀리 보낸 것 아니야? 물론, 나야 좋지.

추신 2: 그 사나운 강아지가 요즘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며? 기대되네, 마침 나도 후계자가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누구의 배가 먼저 불러올지 궁금해졌어.

추신 3: 황녀 전하께 대신 안부 전해줘, 그리고 너무 견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해주고. 당신이 나를 가진 거지, 내가 당신을 가진 건 아니잖아? 내가 당신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내게 붙으라고 해. 모조리 빼앗기기 전에.

From. 당신의 소유물이자 노예, 그리고 비밀의 연인으로부터.

제국력 571년 낫의 달 두 번째 날에.

­­­­

편지를 읽은 나는 옅은 신음을 토해냈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낯 뜨거운 내용들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편지의 뒤편을 확인해 보았다.

본래라면 거칠게 휘갈겨 쓴 글귀가 있어야 할 테지만, 그곳에는 새하얀 공백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꿈속에서 얼핏 들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재생됐다.

‘한동안은 너를 돕지 못해.’

아무래도 지난 전투에서 다소 무리한 결과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 전에는 강제로 미래의 인격을 불러오기도 했으니, 후폭풍이 오더라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억울한 부분이 하나 있다면, 하필 왜 이 시점에 그의 조력을 포기해야 하냐는 점이었다.

여태껏 온 편지 중에서 유독 수수께끼가 많은 편지였다.

어째서 편지가 두 통이나 온 것인지, 그리고 그 수많은 ‘비밀’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미래의 내가 남긴 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절대 함부로 맞서지 마라.’

지난번과 비슷한 요지의 조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도 강도 높은 경고였다. ‘절대’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맞서야 할 적 또한 그때 이상이라고 봐야 옳았다.

악신의 권속, ‘시체 거인’.

그 신화 속의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겨야 했던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영지에 집결한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뒤에야 가까스로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때마침 검공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보다 강할 수도 있는 적이라.

“……죽겠네.”

허탈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는 그렇게 한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리라.

답답한 마음에 나는 수통을 들어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찬물이 식도를 적시자, 비로소 혼탁하던 정신이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일단은 늘 하던 대로 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정보 수집이 먼저였다.

편지의 내용은 노골적으로 북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애초에 엘프들의 거주지는 북부의 침엽수림밖에 남지 않았기에 확실했다.

이는 곧 내가 곧 아카데미를 떠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아카데미를 떠야 한다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투덜거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흘깃 보니 달력은 어느새 며칠이나 넘어간 뒤였다.

며칠 동안은 미래의 인격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래에서 온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파악해야 했다.

그 며칠 동안의 행보를 추적해 본다면, 대략적인 감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껏 늘 그래왔으니까.

행선지를 정한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피곤한 몸뚱아리를 억지로 채찍질하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그럼에도 기숙사는 벌써부터 인파로 붐볐다. 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찾아왔으니 아카데미의 일상이 돌아온 것이다.

일단 내가 안심했던 점은, 그들 중 누구도 나를 두고 시비를 걸거나 수군거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대중 앞에서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다행이었다.

어차피 더 나빠질 인식도 없었지만, 하지도 않은 짓을 가지고 욕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악명이라면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쌓여 있었다.

더는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언제나 미친 짓을 하나씩 저지르고 다녔던 탓이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는 공식이었다.

대중 앞에서만 저지르지 않았다 뿐이지, 그가 무슨 짓을 하기는 했으리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며칠씩이나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아침 식사마저 거르고 기숙사를 나섰다.

마음이 급해서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간 미래에서 온 내가 무엇을 하고 돌아다녔는지가 더 궁금했다.

의외로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기숙사를 나서, 내 발걸음이 중앙대로에 이르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뒤로 정리한 소녀였다.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걸음걸이였으나, 몇 년이나 보아온 사이라서 알 수 있었다. 저 앞에 걸어가는 여인이 내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막막하던 차에 만난 동앗줄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셀린!”

하지만 셀린이 보여준 반응은 내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흠칫, 하고 몸을 떨던 셀린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당차고 활달한 성격의 셀린이 이토록 두려워할 상대는 무척 드물었다.

만일 제국의 황제를 본다면 저렇게 기가 죽을까.

셀린은 한동안 세차게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소꿉친구는 무언가 이상을 눈치 챈 듯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이, 이안 오빠……?”

“그래, 나야. 이안 페르쿠스.”

그렇게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셀린이 나를 보고 떨어야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미래에서 온 ‘나’에게 있을 터였다.

그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셀린은 울먹거리며 내 품으로 뛰쳐 들었다.

“드, 드디어 돌아왔구나! 흐어엉… 이, 이안 오빠. 나, 너무 힘들었어…….”

셀린의 울음소리가 이어질수록 내 의문은 점점 더 깊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셀린에게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몇 분간 통곡을 하며 마음을 추스린 셀린은, 제 눈가를 쓱쓱 소매로 닦으며 내게 말했다.

“아니지, 아니야… 이럴 시간이 없어, 오빠. 얼른 세리아한테 가자.”

“……세리아? 왜?”

내 멍청한 되물음에도 셀린은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만 울적한 안색으로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세리아, 지금 집중치료실에서 입원 중이거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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