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06화 (306/649)

〈 306화 〉 5. 빵과 비수(4)

* * *

소녀의 몸이 땅 위를 굴렀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었다. 그다지 놀랄 만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세리아는 그럴 때마다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 푸른 눈동자가 불가해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사실 세리아의 의문은 지당했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온갖 난제를 홀로 해결해 온 그녀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로서 유독 세리아는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유일한 편이 되어주어야 할 유르디나 후작조차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세리아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이복언니인 델핀뿐.

그마저도 세리아를 향한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의 델핀은 어렸고, 장기적으로 볼 때 세리아 또한 델핀의 경쟁상대였으니까.

다시 말해, 세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였다.

오직 단신의 힘으로 재능을 증명하고 유르디나의 성을 받아낸 것이다.

그 탓에 세리아는 다소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시련과 역경 따위에는 이미 익숙해진 그녀였다. 어떠한 난제가 찾아오더라도 종일 골몰하면 답이 보일 터였다.

여태껏 늘 그래왔듯이.

그것이 바로 세리아의 재능이었다.

검에 미쳐 살며, 스스로를 검 한 자루로 벼려낸 소녀의 유일한 무기.

그 어설픈 오만이 무참히 깨져나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사내는 셀린과 세리아가 전력으로서 유효하지 않다고 통보했다.

자존심 강한 세리아가 이를 얌전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울컥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그녀를 향해, 사내는 단 한 마디만을 던졌다.

“시험해 보겠나?”

지독히도 피로한 음색이었다.

그 무감한 눈동자에는 귀찮다는 기색마저 어려 있었다. 마치 성가신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눈빛에, 세리아는 더욱더 울컥하고 말았다.

여인의 입에서 달구어진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그 탓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 결말은 보이는 그대로였다.

대련을 위해 숲의 공터로 이동한 이후, 세리아는 사내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사실 예상하고 있던 결과이기는 했다.

일전에 미트람과 사투를 벌였을 때도 사내의 신위를 목격한 세리아였다. 홀로 암흑사제의 목숨을 거두던 그 차가운 낯이 아직도 선명했다.

애초에 승리를 점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원인조차 짐작할 수 없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헐떡이면서, 세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그 품새로 볼 때 몸에 타격이 누적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짙푸른 눈동자는 아직 맹렬히 타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내의 움직임을 파악해 보려는 시도였으나, 사내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든 말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같은 생각이 드러나는 낯빛이었다. 그 확신이 짙게 어린 안색에서는 일말의 균열도 엿보이지 않았다.

세리아는 일순 그 낯짝을 한 대 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가 사랑하는 선배의 몸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세리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욕망에 몸을 던졌으리라.

그만큼이나 사내가 세리아에게 보이는 태도는 낯설었다.

무시와 냉대.

어린 시절의 악몽을 자극하는 눈빛이었다.

“……더 해보겠나?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텐데.”

“그야 모를 일이죠.”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각오가 서린 그 답변에,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지 다시 자세를 취하는 세리아를 향해 나지막한 경고를 남겼을 따름이었다.

“마지막이다.”

그러니 전력을 다하라는 뜻일까.

어차피 남은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생각이었던 세리아였다. 그런다고 해도 옷깃을 스칠까 말까 한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리도 바란다면 더욱 후회 없는 공방을 나누리라.

한동안 침묵하던 소녀의 발걸음이 사뿐 내딛어진 것은 그때였다.

그 직후, 압축.

포탄처럼 쏘아진 몸뚱아리가 시야를 실선으로 짓이겨 버렸다. 거리가 단숨에 줄어들며 어느덧 세리아는 사내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까지도 사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리아를 놓친 것은 아닐 터였다. 여전히 사내의 금빛 눈동자는 침묵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수리처럼.

세리아의 출수는 발작적이었다.

신중은 독이다.

지금껏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세리아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고민해서 수를 짜내봐야 어차피 상대는 더 고단수였다.

그럴 바에는 짐승처럼 본능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나았다.

투로가 단순해지자 검은 더욱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를 악문 채, 횡으로 검을 휘두르는 세리아의 눈빛에서는 귀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일격이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의 눈동자에 옅은 이채가 서렸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택한 세리아에게 흥미를 느낀 듯했다.

물론 사내의 손속은 그와 별개로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팍, 하고 짧은 파공성이 스쳤다.

사내의 검이 어느덧 비스듬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단 한 번의 칼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결과는 단 한 줄로 그치지 않았다.

대기가 찢어발겨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진 검이었다. 그 뒤를 따라 텅 빈 허공을 채우는 공기가 폭발했다.

옷깃이 미친 듯이 펄럭이며 그 충격량을 가늠케 했다.

그럼에도 세리아가 눈을 부릅뜬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이 튕겨 나갔다.

두 손으로 든 검이었는데, 충돌하는 감각조차 없이 검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뒤늦게 하늘로 솟구친 팔과 어깨에서 맹렬한 통증이 일었다.

그러나 세리아에게는 비명을 내지를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콱, 하고 세리아의 명치에 발길질이 틀어박혔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내질러진 일격이었다. 세리아는 그 일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

덜덜 떨리는 손이 애처로웠다.

세리아는 재빨리 방금 전의 공방을 상기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궤적이 어느새 그어졌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검이 세리아의 손을 벗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찢겨진 손아귀로 사정을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었다.

힘과 속도에서 밀린 것이다.

너무나 명백한 차이였다.

그토록 단순무식한 사유로 패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득, 하고 제 어깨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아, 아으윽?!”

세리아는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엎어져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무심한 낯빛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세리아의 어깨를 짓밟으면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세리아가 의문을 품을 찰나에, 사내는 어깨를 짓밟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으드드득, 하고 연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통증에 세리아는 점차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으, 으… 아아아아아악!”

어깨가 완전히 박살난 세리아는 곧 신음을 흘리며 땅 위를 굴렀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기계적으로 발을 놀릴 뿐이었다.

세리아를 발로 차고, 무릎을 박살내고.

몇 번의 폭력이 더 가해진 뒤에야 세리아는 그 고문과도 같은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난데없는 가학의 향연이었다.

그 피해자인 소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물들고 말았다.

의문과 두려움으로 젖은 세리아의 눈을 마주하며, 사내는 담백한 한 마디를 던졌다.

“……말했잖아, 마지막이라고.”

미친 새끼.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사내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사지를 박살내 놓은 것이다.

세리아가 더는 반항할 수 없도록.

소녀는 도를 넘은 통증에 파르르 몸을 떨면서도, 그 발상과 잔혹한 행동력에 공포와 분노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결코 사내의 뜻대로 이 공방이 마지막이 되지는 않으리라.

세리아는 신전에서 몸을 회복하는 대로 사내에게 도전했고, 그 결말은 뻔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세리아는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부상을 당했다.

세리아를 쓰러트리는 일격은 언제나 같았다.

인지조차 불가능한 초속의 검격.

그 단순무식한 검로를, 세리아는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아작이 난 세리아를 두고 사내는 말했다.

“……어차피 따라올 수도 없겠군.”

단순한 혼잣말인지, 혹은 조롱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세리아는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손가락 관절조차 박살이 난 상태였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엎어진 자리에서 덜덜 떨며 신음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비참한 몰골이었다.

그런데도 세리아의 눈동자에서는 빛이 꺼지지 않았다.

세리아는 승부욕이 강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안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이안 선배를 따라가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리아는 단 하루라도 이안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까지 따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안과의 동행을 포기하라는 소리가 아닌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푸른 불길을 보며, 사내는 흐릿한 한숨 소리와 함께 등을 돌렸다.

“최소한 내가 보여준 기술은 재현할 수 있어야 해.”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던진 말이었다.

그 무심한 음색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동(?)은 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명심해라.”

그것이 세리아가 사내와 나눈 최후의 대화였다.

그 이후 기절한 세리아가 눈을 뜬 곳은 집중치료실이었다.

성녀는 드물게도 뚱한 표정을 한 채, 세리아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최소 2주 이상의 입원이 필요해요. 그동안은 외부 활동 엄금입니다.”

그제야 세리아는 사내의 속셈을 눈치 챘다.

다쳐서 입원을 해버리면 따라가고 싶어도 따라갈 방도가 없었다.

연달은 패배에, 도발에 넘어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까지.

세리아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소심한 소녀로의 귀환이었고, 사내의 말이 옳았다는 증명이었다.

세리아는 짐만 될 뿐이다.

그 말이 가슴에 유리파편처럼 틀어박혀서, 세리아는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피가 날 때까지.

분하고 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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