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08화 (308/649)

〈 308화 〉 5. 빵과 비수(6)

* * *

사내의 낯빛이 암울하게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황녀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 기묘한 대조가 명과 암처럼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황녀가 워낙 눈치가 없던 탓이었다.

애초에 타인의 감정을 ‘용의 눈’으로 읽어왔던 그녀였다. 굳이 타인의 눈치를 볼 까닭도 없었고, 그와 관련된 능력을 길러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눈치’란 사회성의 일부였다.

당연히 어린 시절부터 학습을 거쳐야 했고, 불우한 유년기는 황녀의 사회성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사내는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토록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는 흐릿한 질문을 토해냈다.

“……‘애완 용’ 말입니까?”

“네! 그, 애완견은 이미 라이넬라 선배가 있으니까…….”

그러면서 황녀는 다시금 흘끔흘끔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몇 번 더 헛된 개폐운동을 반복하더니, 종래에는 포기했다는 듯 입술 사이로 한숨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황녀는 그 부정적인 기류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눈빛은 드물게도 다소 괴로워 보였으니까.

당장 황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녀의 몰골을 더는 보고 있기가 힘들다는 뜻이었다.

물론 유독 눈치가 없는 황녀는 이를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이안 경… 너, 너무 건방졌죠?”

느닷없는 사죄였다.

사내로서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황녀의 마음에 이는 격랑을 증언하고 말았다.

결국 사내는 또 다시 황녀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우묵한 눈빛에서는 이제 당혹이나 당황마저도 읽히지 않았다.

단지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겠다는, 구슬픈 각오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녀는 사내의 아픈 기대에 곧장 부응해 주었다.

“저, 저 따위가 감히 애완동물을 하겠다고… 이안 경에서 그딴 잘못을 해놓고서! 미, 미안해요. 이안 경. 잘못했어요… 앞으로 주제넘지 않을게요. 그, 그러니 버리지 말아주세요…….”

황녀는 울먹이며 사내에게 매달렸다. 그 눈동자에는 어느덧 물기가 맺혀 있었다.

사내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신음을 흘렸다.

그가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흘린 신음이었으나, 황녀가 그 기념비적인 기록을 알 리가 만무했다.

황녀의 구슬픈 애원이 계속 이어졌다.

“따로 여동생 분께 사죄의 말씀을 전하긴 했어요… 그, 그래도 부족하겠죠? 이안 경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무엇이든 부탁하셔도 되니까…….”

“……무엇이든 말입니까?”

사내의 눈동자가 이채를 머금은 것은 그때였다.

불행히도 황녀는 그 수상쩍은 징조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단지 사내의 품에 매달려 울고불고 했을 따름이었다.

“네, 네!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제, 제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무심하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에 감정의 편린이 맺히고 있었다. 사내로서도 실로 오랜만에 보이는 감상적인 반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입에서 묵직한 약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무엇이든 들어 주시겠다고.”

두 말 하면 잔소리라는 듯 황녀는 이슬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열렬한 움직임에는 필사적인 마음씨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네, 물론…….”

“그럼 여행 갑시다.”

그 한 마디가 신호였다.

황녀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더니, 얼빠진 연회색 눈동자가 사내를 향했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탄식과도 같은 음색은 흘릴 뿐이었다.

“여행을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황녀 전하. 함께 가시죠.”

무심한 목소리였으나, 그 내용의 파급력은 가히 폭탄에 비견될 만했다.

한창 때의 두 남녀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의미는 뻔했다.

제국 황실에서 자라난 황녀가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소녀는 뻐금거리며 제대로 된 언어를 뱉어내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녀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이안의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연회색 동공이 서서히 세로로 찢어지고 있었다. ‘용의 눈’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더는 ‘용의 눈’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평생 동안 써오던 능력이었다.

위급 시에 의지하고 마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위급을 넘어 비상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황녀로서는 자연스레 용의 눈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번의 상대는 유독 황녀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사내의 심리는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황녀가 흐릿하게 드러나는 색조조차 포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내의 경지가 마스터에 준할 만큼 높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감정이 이미 닳을 대로 닳아 드러나지도 않는다는 것.

어느 쪽이든 파릇한 20대를 두고 논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황녀는 더더욱 혼란에 빠졌고, 어버버 하며 초점을 핑핑 돌릴 수밖에 없었다.

종래에 이르러 황녀는 얼굴을 푹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소심한 목소리로 소녀는 되물었다.

“하, 하지만 그러다가는 소문이…….”

“그래서 안 됩니까?”

재차 던져지는 질문에 황녀는 제 검지를 서로 톡톡 부딪혔다.

흘깃흘깃 사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시엔은 결국 고개를 더욱 떨구어야 했다.

그 얼굴은 이미 달아오를 만치 달아오른 뒤였다.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었다.

“아, 안 되는 건 아닌데요…….”

“그럼 준비하시죠. 2주 이내로 떠나야 되니까.”

계속되는 단호한 요구에, 시엔은 다소곳한 대답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네, 이안 경.”

사내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등을 돌렸다.

곧장 또 다른 곳으로 향할 심산인 듯했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얹였다.

“아, 그리고.”

“넷, 네헷……!”

우물쭈물하던 황녀는 깜짝 놀라 그렇게 답하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대답이었는지, 소녀는 또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정작 사내는 그러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황제 폐하께 늙은 사자를 조심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 알 듯 말 듯한 말을 끝으로 사내는 떠나갔다.

홀로 남은 황녀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늙은 사자’라니, 누구를 말하는 걸까.

물론 그 고민은 길지 못했다.

이미 황녀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던 탓이었다.

짝사랑하는 선배와의 여행.

2주라는 시한이 있기는 했으나, 아직 채비를 할 시간은 남아있었다. 시엔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 그럼 속옷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녀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을 텐데, 어느덧 황녀는 곰돌이 속옷밖에 없는 제 서랍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내의 속내조차 모른 채로.

“……어차피 감당은 내가 안하니까.”

그렇게 씁쓸한 중얼거림을 남기며, 사내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참으로 기대가 됐다.

추억을 더럽혀지고 만 인간의 소소한 복수였다.

**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세리아의 병실을 나섰다.

세리아를 두고 황녀를 데려간다니.

지금으로서는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세리아가 황녀보다 더 뛰어난 전투인원인 것은 분명했다.

실전 경험도 많았으며, 함께 사선을 거치며 손발을 맞추기까지 했다.

심지어 실력도 황녀보다 한 수 위라고 봐야 했다.

황녀가 마법학부 1학년 수석이긴 하나, 세리아도 검술학부 2학년 수석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짜증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황녀에게 ‘여행’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일행이 향해야 할 곳은 평화롭고 한적한 휴양지 따위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전장이었다.

상식적으로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오지로 향하는데, ‘여행’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게다가황녀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1학년에 불과했다.

목숨을 건 적도, 거둔 적도 없을 테지.

어느 쪽이든 만만찮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나마 아직 소문이 덜 퍼졌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세리아도 미래에서 온 ‘나’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니, 나와 황녀의 때 아닌 밀월여행은 나중에나 알려질 듯 싶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반응할 사람들만 생각해도 무시무시했다.

우선 제국의 황제가 제일 걱정이었고, 그 외에도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밀어닥칠 이들은 꽤 있었다.

마침 그중 하나를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누가 봐도 특정 인물을 찾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고깔모자를 쓴 머리가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내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띠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폭, 하고 내 품에 안기는 자그마한 몸집.

“……주인님! 에헤헤.”

엘시 선배였다.

나에게 고백을 한 이후, 엘시 선배는 이처럼 거리낌 없이 내게 접촉해 오곤 했다. 때로는 너무 거리감이 없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지금만 해도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시 선배처럼 예쁜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때와 장소를 가려주었으면 하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었다.

이곳은 신전이었다.

남녀간의 상열지사를 논하기에 부적절한 공간 중 하나였다.

마침 지나가던 사제들 몇몇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래고자 시도했다.

“엘시 선배, 반가워요. 그런데 우선 품에서 좀 떨어지고…….”

“이안, 신전 안은 애완동물 출입 금지에요.”

그러나 내가 엘시 선배를 채 만류하기도 전에, 도도한 음색이 내 귓전을 간지럽혔다.

복도 끝에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인상 깊은 여체의 굴곡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녀였다.

느닷없는 강적의 등장이었다. 엘시 선배의 눈빛이 곧장 차게 식었다.

그녀는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내 품에서 몸을 빼냈다.

그 와중에도 내 팔을 끌어안는 것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엘시 선배였다.

“야, 젖탱이. 네가 뭔데 참견질이야? 내가 주인님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차이고 나서도 질척거리는 꼴이 다소 보기 안쓰러워서 말이죠.”

그와 함께 성녀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성호를 그었다.

“부디 이안의 기분도 생각해 주지 않겠어요? 분명 이안도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아하.”

하지만 엘시 선배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성녀의 기대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정도였다.

의아하다는 듯 연분홍빛 눈동자가 향하자, 엘시 선배는 짙은 조소를 머금었다.

“못 들었구나? 나, 다시 고백했어. 그리고 거절당하지도 않았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백에 대한 답변은 나중에 내놓기로 했으니, 아직 거절을 당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가서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다만 오해의 소지가 너무나 다분한 농담이라, 나는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짓궂어도 너무 짓궂었다.

나는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괜히 성녀님이 오해…….”

그러나 내 말은 제대로 끝맺어지지 못했다.

성녀로부터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 미동조차.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성녀에게 향했다.

그곳에는 얼어붙어 버린 미인의 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를 넘은 충격에 미소 띤 채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오해가 서서히 나비효과를 몰고 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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