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 5. 빵과 비수(7)
* * *
성녀는 얼어붙은 채로 말이 없었다.
미동조차 없는 여인의 모습은 조각상을 연상시켰다.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끝에도 성녀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일순 시간이 정지했나 싶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만큼이나 성녀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복도를 살랑거리며 흐르던 바람조차 자취를 감출 지경이었다. 묵직이 가라앉은 분위기가 성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어리둥절한 내 눈빛이 측면을 향했다.
내 팔을 끌어안고 있던 엘시 선배 또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로 보였다. 일상적으로 던진 도발이었는데, 설마 성녀가 이토록 순진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물론 이를 두고 후회 따위를 할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더욱 끌어당겼다.
보드라운 탄력감이 팔 근육 너머로 전해졌다.
엘시 선배는 어느덧 히죽, 하고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라? 진짜 못 들었나 봐? 나, 주인님이랑 조금 진지한 관계를 맺기로 했거든.”
그야 진지하다면 진지한 관계이기는 한데.
나는 성녀의 진의를 종잡을 수 없어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일단 성녀가 왜 저러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옆에 레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벌써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을 터였다. 그리고 무작정 시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읊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엘시 선배였다.
성녀와 앙숙 관계를 꼽자면 반드시 이름이 나올 법한 소녀였다.
나와 성녀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내게 고백까지 한 입장이었으니, 내 옆에 있는 여인들을 견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성녀의 멈춘 시간 속에 균열이 인 것은 그때였다.
여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괴로운 음색이 토해졌다.
“……거,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그러나 애써 짜낸 부정의 말은 재차 부정당했다.
엘시 선배는 요염한 눈빛을 하며 더욱 내 팔에 제 뺨을 밀착시켰다. 그럼에도 내가 밀어내는 기색이 없자,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궁금하면 물어 봐, 주인님한테.”
한동안 몸을 바르르 떨던 성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흐릿한 원망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었으나, 은은히 어린 물기가 마음에 밟혔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한 나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때 함부로 대답하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 것이란 사실을.
잠깐 머뭇거리던 나는, 부유하는 언어를 정돈했다.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답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성녀님,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다소의 오해가…….”
물론 내 선량한 의도가 순탄하게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꾸욱, 하고 내 팔을 강하게 끌어안는 감촉이 느껴졌다.
엘시 선배가 까치발을 하며 자연스레 내 팔에 의지한 것이다.
이내 달콤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적셨다.
“주인님… 우리 그거 해요.”
그윽한 눈빛이었다.
한밤의 커튼 너머로 달빛처럼 고혹적인 푸른색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가 달구어진 안색을 담금질했다.
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엘시 선배가 무얼 하자는 것인지, 그 함의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거’라니?
차라리 짐작이 가는 답이라도 없으면 다행이었다. 헛웃음만 머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상대는 그 엘시 선배였다.
무엇이든 두루뭉술하게 뭉개놓으면 걸리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엘시 선배의 유혹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거, 그거 있잖아요… 주인님이 만져주면 찌르르, 하고 전기가 통하듯 기분 좋아지는 그거. 지난번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기까지 했는데…….”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엘시 선배는 ‘턱 쓰다듬기’를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 쓰다듬기’에 이어 개발한 새로운 포상이었는데, 엘시 선배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었다.
다만 나의 기쁨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허공을 타고 전달되는 묘한 떨림을 느낀 탓이었다.
화들짝 정신을 되찾은 내 눈동자가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성녀가 있었다.
옅은 분노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기도하듯 모아진 가녀린 그 두 손에, 어느덧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비로소 사단이 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성녀님?”
내 조심스러운 호명에도 성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몇 번 짓씹다가, 이슬 맺힌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더듬거리는 음성이 내뱉어졌다.
“내, 내, 내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든 그녀를 만류하려던 찰나.
“……내가 먼저였는데!!”
성녀는 빼액,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며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눈물을 훔치는 폼이 실연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나는 얼이 빠져 그 뒷모습만 지켜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먼저라는 걸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의문이 해소되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엘시 선배가 홍소를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내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소녀가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누렸다.
그녀는 주먹을 쥔 채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꺄하하하하핫! 싸가지 없는 젖탱이 년, 꼴좋다! 그렇게 날 비웃더니!”
예상했던 대로, 이는 엘시 선배의 계략이었던 듯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질투심만큼은 진짜였다.
난감함을 담은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엘시 선배…….”
책망을 하려는 의도였으나, 엘시 선배는 약삭빠르게도 선수를 쳤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이 다시금 내 품에 폭 안겨들었다. 그리고 엘시 선배는 애교 있게 눈 한 쪽을 찡긋거렸다.
“……용서해 주실 거죠, 주인님?”
일전의 고백 이후 엘시 선배는 조금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안절부절 하지 못하거나,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을 상황에도 능글맞은 대응을 보였다.
어쩌면 이제야 연상의 여유를 갖추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손도끼만 들면 덜덜 떨던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었으니.
이 또한 성장이라 보아야 할 터였다.
그 대가로 내가 엘시 선배를 온전히 제어할 수단은 하나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엄히 말하면 들어주기는 하리라.
나는 그 점이 못내 뿌듯하면서도 서운해서, 엘시 선배에게 벌을 주기로 했다.
“주인님, 지금 뭘… 잠, 읏?! 흐으으응?!”
그 벌이란 바로 엘시 선배가 바라마지 않던 ‘턱 쓰다듬기’였다.
엘시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벅지를 오므려야 했다.
그럼에도 쓰다듬기는 그치지 않았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엘시 선배는 흐물흐물 녹아내려 주저앉았다.
풀린 동공과 달뜬 숨결, 달아오른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혀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지, 엘시 선배는 맹한 콧소리를 흘렸다.
“자, 잘묫… 흐으응, 잘모태써여…….”
그러고 나서야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시 선배도 이만하면 충분히 반성했을 터였다.
성녀가 마지막으로 보인 눈물이 걸리긴 했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오해를 풀 기회가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전을 나섰다.
아직 내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델핀 선배와 북부, 그리고 황녀.
이 수수께끼를 엮을 사슬이 필요했다.
**
델핀 선배로부터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강의가 시작되었음에도 델핀 선배가 돌아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세리아조차 제대로 된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내가 나서 봐야 제대로 된 단서를 얻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나는 북부로 떠나기 전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 두기로 했다.
그중 첫 번째는 단연 엠마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체 거인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엠마의 물약 덕을 톡톡히 봤다. 만일 엠마의 물약이 없었다면 일찌감찌 나는 생을 마감했을지도 몰랐다.
반대로 엠마의 물약 덕에 치료가 늦어진 감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야 내가 물약을 과용한 탓이니 엠마의 잘못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중태에 빠졌단 소식은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다.
시체 거인과의 혈투는 영웅적인 전적이었다. 하물며 그 이전부터 암흑교단과 갈등을 빚어왔던 인물이 바로 나였다.
떠오르는 신성의 추락을 알리는 건 여러모로 부담이었다.
특히 암흑교단의 존재감이 나날이 선연해지고 있다면 더더욱.
또 제때 나를 지원하지 못했다는 비난마저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제국과 성국은 최대한 신중을 기해 내 상세를 살폈다고 했다.
그 덕에 엠마가 울고불고 하며 내게 찾아오는 불상사는 없었다. 나는 그 점에 특히 감사했다.
가뜩이나 마음 여린 엠마가 내 소식을 접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로 혼절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불운한 상상을 떠올린 내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엠마가 또 다시 쓰러져 집중치료실에 입원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오늘 다량의 금화를 챙겨온 이유도 이로부터 근원했다.
수소문에 따르면, 엠마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재료비로 지출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숲의 버섯을 따다 먹거나 쫄쫄 굶고 있단 이야기마저 들려오던 참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오늘만큼은 엠마에게 단단히 일러 식비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리라.
나는 단단히 결심하며 엠마의 공방 앞에 섰다.
하지만 똑똑, 하고 공방의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전례가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일전에 내가 공방에 방문했던 날, 엠마는 과로로 쓰러져 있던 전적이 있었다.
이를 떠올린 내 마음이 곧장 다급해졌다.
다소 성급히 공방의 문을 걷어찬 것은 그 탓이었다.
“……엠마, 괜찮아?!”
내 고함과 함께 쾅, 하고 공방의 문이 억지로 열렸다.
그 직후, 나는 동그랗게 뜨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엠마는 공방의 의자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슬쩍 보니 말린 버섯으로 보였다.
그것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이를 오물거리는 엠마의 눈동자에는 흐릿한 눈물마저 맺혀 있을 정도였다.
참담하고 당혹스러운 심정에 내 입이 꾹 다물어졌다.
놀란 쪽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내 꿀꺽, 하고 오물거리던 버섯을 삼킨 엠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안녕. 이안…….”
그리고 침묵.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던 엠마는, 곧 뻣뻣히 굳은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여인의 음색에 울먹임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렇게 눈물을 글썽거리기를 얼마쯤.
꼴사나운 광경을 들킨 소녀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나, 나… 죽으러 갈게!”
그 말을 끝으로 엠마는 눈물을 흩뿌리며 달음박질을 쳤다.
내가 필사적으로 만류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여인의 마음은 참 섬세했다.
특히 엠마의 마음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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