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 5. 빵과 비수(11)
* * *
엘프의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야 지금껏 중상자를 수도 없이 상대해 온 성녀였다. 고작해야 코뼈가 주저앉고, 팔이 박살이 난 정도로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터였다.
특히 근래 들어서는 내 담당사제가 되다시피 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성녀한테는 미안한 점이 많았다.
매번 나를 따라다니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서 날 건져낸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무리 감사를 표해도 모자랐다.
한동안 나는 엘프의 치료에 열중하는 성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기분 탓인지 이틀만에 보는 성녀의 낯이 퍽 수척해 보였다.
어느덧 내 옆에는 여리여리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와 있었다.
성녀의 호위기사, 유렌이었다.
그는 속모를 얼굴을 하고 있다가, 팔꿈치로 내 팔뚝을 쿡쿡 찔러댔다.
“이안, 너 혹시 누님한테 뭔 말 했냐?”
“……아니, 딱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아니던가.
내가 무어라 잘못이라도 했다면 성녀가 저렇게 나올 턱이 없었다.
이를 모를 유렌이 아니었으나, 나를 대하는 유렌의 표정은 아직도 영 떨떠름하기만 했다.
드물게도 그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의 입에서 이내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그의 손이 짜증스럽게 제 뒤통수를 긁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던져진 것은 그 직후였다.
“그럼 왜 요즘 누님이 밤마다 우는데?”
“성녀님이 우신다고?”
유렌의 반문에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반문밖에 없었다.
성녀가 밤마다 눈물을 흘린다니?
금시초문일뿐더러, 그 도도한 여인을 그처럼 심약하게 만들 수단이 존재는 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유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렌은 또 다시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안, 잘 생각해 봐… 누님이 그럴 이유는 너밖에 없다니까?”
재차 이어진 유렌의 설득이었다.
이쯤 되니 나도 마냥 유렌의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성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유렌일 테니까.
그리고 내심 걸리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엘시 선배와 함께 성녀를 마주쳤을 때, 그녀는 눈물이라도 흩뿌릴 태세로 나를 떠나간 적이 있었다.
혹시 그때의 기억으로 아직도 꽁해 있는 걸까.
내가 침음을 삼키며 고심에 잠기자, 유렌은 숫제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이안, 제발 잘 좀 하자… 직속상관이 하루 종일 저기압이라고 생각해 봐. 얼마나 끔찍한 줄 알아?”
“……그게 내 탓이야?”
“그럼 내 탓이겠냐?”
내 소심한 저항은 유렌의 절절한 반론에 곧장 무너졌다.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어도 유렌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성녀의 눈물을 그치게 할 해법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유렌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잘 좀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잘 이야기해 봐. 누님도 여러모로 불안할 거야, 아무래도 천신교의 성녀라는 입장이 있다 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유렌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슬슬 엘프를 돌보던 성녀가 치료실을 나서고 있던 참이었다.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는 의도가 명확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결국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어차피 성녀와는 여러모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기회가 된다면 유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솔직히 말해, 성녀가 자꾸 눈에 밟히기도 했고.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분하고 슬프고, 처량해 보이던 그 눈빛.
이러나저러나 나 또한 널리고 널린 사내놈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본성을 알면서도 성녀에 유독 약한 꼴을 보아하면 말이다.
내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성녀는 지친 낯빛으로 내게 다가섰다.
치료는 섬세한 작업이라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더라도 심력이 소모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특히 느닷없이 나타난 응급환자라 더더욱 그랬을 터였다.
나는 괜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녀는 샐쭉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슬슬 사정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성녀로서는 지당한 요구였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차에 환자를 받은 것도 모자라, 그 환자는 인간조차 아닌 엘프였다. 누구라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리라.
나 또한 성녀에게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심과 동시에 내 입에서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흘러나왔다.
그중에는 엘프와 별 관계도 없는 이야기도 많았다.
다섯 번째로 도착한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부터 시작해서, 미래에서 온 ‘나’의 행적이나 세리아와 셀린의 훈련, 그리고 엠마를 찾아갔다 아비앙을 상대한 사실까지.
나는 그 모든 곡절을 전부 다 털어놓았다.
성녀는 그 기나긴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내 이야기가 아무리 길어져도 나를 제지하는 법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일단 흥미는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사실 내가 불필요해 보이는 정보까지 싸그리 털어놓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성녀의 존재가 앞으로의 여정에서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비롯해 일행들이 무사히 지낼 수 있던 주된 이유는 성녀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더불어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의 폭도 좁아졌으리라.
유능한 사제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중요했다.
그 자체로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을뿐더러, 부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전력 이탈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성녀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의 전말을 밝히는 것이 상례였다.
성녀가 필요한 만큼 그에 알맞은 예우를 보이고 싶었다.
또한 성녀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아닌가.
성국의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였다. 여태껏 내가 놓치고 있던 사실을 짚어주더라도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내 증명됐다.
성녀는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내 말을 듣고 있더니, 이내 옅은 신음을 흘렸다.
곧이어 뜨인 그녀의 눈빛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북부와 엘프라…….”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내 말에 성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몸짓과는 달리, 성녀의 입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전에 병사들의 위문 차 방문한 적을 제외하면 없어요. 다만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성녀는 검지로 톡, 톡, 제 입술을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일순 그 입술이 무척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일부러 그 마음을 숨겼다.
내색해 봐야 놀림거리만 될 뿐이었다.
다행히도 성녀가 답을 도출해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본 엘프들은 대체적으로 적대적이긴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했어요. 특히 삶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 그들은 목숨을 소중히 여기죠.”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비앙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이를 악문 채 내게 달려들던 아비앙의 눈빛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서슬 퍼런 적의.
엘프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최소한 성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랬다.
“하지만 아비앙은…….”
“아비앙? 아, 저 엘프… 여하튼,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단순히인류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엘프만이 첩자가 될 수도 있고요.”
그 또한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섞여 살아갈 이들이었다. 인류에게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적대감도 강해야 하겠지.
다만 나는 묘하게도 아비앙의 외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인간들은 전부 다 똑같아.'
씹어뱉듯 내뱉은 그 한 마디는 결코 학습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절절히 느낀 감정을 언어로 토해낸 것에 가까웠다.
아비앙은 스스로 10년 이상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다고 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인간에게 당했던 적이 많았던 걸까. 아니라면 또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다시 침음을 삼키며 생각에 잠기자, 성녀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을 깨닫고 성녀와 눈을 마주했다.
왜 그러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성녀는 주춤주춤 주위를 돌아보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춰 내게 물었다.
"……저 엘프, 어떻게 하려고요?"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도리어 헛웃음을 머금으며 성녀에게 되물었다.
"성녀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 그야 뭐……."
성녀는 우물쭈물하며 힐끔힐끔 내 안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바라는 처우가 따로 있는 듯했다.
그녀는 이내 결심을 굳힌 낯빛으로 내게 말했다.
"너, 너무 어리잖아요!"
"아마 첩자 생활만 10년 이상 했을 텐데요."
"그래도 엘프 기준으로는 갓 성인일 테니까… 괜히 제국 첩보부에 잡혀가면, 그……."
그녀다운 요구였다.
본래부터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강한 성녀였다. 더욱이 고아 출신인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특히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니 제국 첩보부에 압송될 운명의 엘프 꼬마가 불쌍해 보일 수밖에.
제국 첩보부에 붙잡힌 엘프의 말로가 어떨지는 뻔했다.
잘해야 감금, 대개는 고문을 당하며 정보를 뽑힌 채 죽겠지.
다만 성녀로서도 강하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엘프와의 전쟁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제국의 영토였다. 따라서 엘프 첩자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도 대개는 제국의 몫이었다.
제국 첩보부에 엘프의 존재를 보고한다고 해서 성국의 성녀가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나 또한 아비앙의 존재를 제국 첩보부에게 은폐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성녀의 요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걱정 마세요,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지, 진짜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성녀는 깜짝 놀라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낯빛이 단박에 환해졌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일 터였다.
나는 성녀의 맑은 웃음에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더 보고 있다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네, 진짜로…대신 황실에 보고는 올리고, 아비앙을 제가 감시하는 식으로 두면 어떨까 싶네요. 마침 엘프들의 동향에 대해서도 들어봐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성녀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나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다, 다행이에요… 정말 잘 생각했어요, 이안. 가슴 만질래요?"
이 아가씨가 큰일날 소리를 하네.
성녀의 도발을 들은 나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으로라도 외간 남자에게 함부로 던질 말은 아니었다. 이를 이 기회에 단단히 일러둘 예정이었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진짜요?"
내 앞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하는 성녀의 신성력 주머니를 보고, 내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영 딴판이었다.
무심코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아차 싶긴 했다. 요망한 성녀의 농간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라서, 성녀는 요염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으음, 아니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대신 대답 하나만 해주면 진짜 만지게 해줄 수도 있는데."
성녀의 몸이 내게 밀착한 것은 그때였다.
푹신한 탄력감이 느껴지면서, 성녀의 달큰한 체향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숨이 막혀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단지 내 목덜미에 닿는 성녀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성녀의 연분홍색 눈동자가 가슴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이내 성녀의 나긋한 질문이 내 귓가로 날아들었다.
"……그 연애편지, 누구한테 왔어요?"
일순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얼이 빠지고 말았다.
'연애편지'라니? 느닷없이?
그러나 또 다시 성녀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나는 결국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동공에는 어느덧 음영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독히도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한 마디.
"누구냐고."
나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갑자기 장르가 달라지는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