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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14화 (314/649)

〈 314화 〉 5. 빵과 비수(12)

* * *

성녀가 던진 질문의 요지는 간단했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의 발신인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몇 번의 설명이 오갔던 참이었다.

일단 미래에서 온 ‘나’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가 첫 번째였다.

그때 당시에도 레토는 열과 성을 다해 그의 존재를 해명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온 이야기가 바로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였다.

애초에 모든 사건의 시작에는 편지가 존재했다. 그러니 이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 이후의 일을 논하기도 난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있었다.

당시는 워낙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암흑사제의 습격으로 죽을 위기를 넘기고, 미래에서 온 ‘나’의 존재가 드러났으며, 더불어 리아의 진실과 페르쿠스 가문에 얽힌 비밀까지.

그야말로 온갖 문제가 얽히고설키던 때였다.

한가롭게 ‘연애편지’에 주목할 여유를 가진 이는 없었다. 그 덕에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에 관한 이야기는 어영부영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또 하나의 사건이 다가오고 있긴 했으나, 성녀에게는 아직 심적 여력이 충분했다. 다시금 부상한 ‘연애편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는 내가 아니었던가.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는 누구도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 내용마저 발설할 수 없었다.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 정보를 유출하려 들면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존재만큼은 알릴 수 있었다.

과거에 레토가 그랬듯이, 성녀 또한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앞서 모든 사정을 털어놓은 것이 실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 도착한 편지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이를 듣고 성녀의 묵은 호기심이 자극받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소 위험천만한 방식으로.

성녀의 빛이 사라진 눈동자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때아닌 오한을 느낄 지경이었다.

먼 옛날에도 성녀가 이랬던 기억이 났다.

한창 수렵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셀린과 세리아와 함께하던 시절, 난데없이 성녀가 그 둘을 견제하곤 했었는데.

그때의 성녀는 진심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했다.

성녀의 메마른 동공을 바라보며,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누, 누가 보냈냐고요?”

더는 묻지 않아주길 바라며 내뱉은 말이었다.

물론 성녀가 그 요망을 들어줄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일순 숨이 멎을 만큼.

단지 내가 숨이 막히는 원인이 그 미모 때문인지, 아니면 그 스산한 눈빛 때문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성녀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네, 누구… 아니, 어떤 년이 보냈어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본심조차 숨기지 않았다.

설령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더라도 말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랬다가는 성국에서 보낸 암살자가 누군가의 방을 방문할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 사실 이보다 유화적인 분위기에서도 나는 대답을 망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하기 부끄러웠으니까.

발신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고백한단 말인가.

물론 각각의 미래에서 날아온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오해를 사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스스로를 ‘약혼자’라 주장하는 여인이 다섯 명이라니.

이를 실토하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지금 성녀에게는 죽어도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성녀의 미소는 점점 더 옅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소름이 돋을 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기 직전.

나는 가까스로 묘수를 짜냈다.

“……누가 보냈을 것 같습니까?”

단순한 발상이었다.

받은 질문을 역으로 되돌렸을 뿐인 반문.

그러나 그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를 압박해 오던 성녀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멀뚱멀뚱 개폐운동을 반복했다.

“누가… 보냈을 것 같냐고요?”

“네, 누가 보냈을 것 같… 아니지, 누가 보낸 거면 좋겠는데요?”

말이 오고가며 질문의 내용이 묘하게 달라졌다.

‘누가 보냈을 것 같으냐’에서 ‘누가 보낸 거면 좋겠느냐’로.

성녀에게 보다 유효했던 쪽은 단연 후자였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한동안 말이 없던 성녀는, 이내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아하하… 아하하하하!”

느닷없는 반응이었다.

왜 웃음을 터트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성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성녀의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아, 성녀도 모르는구나.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는 쿵, 하고 앞발을 내딛더니 후다닥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제정신을 되찾은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성녀는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는데요?! 관심 없어요, 응… 하, 하나도 관심 없어요! 당신한테 누가 연애편지를 보내든, 남이사. 흥.”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꽤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내 눈빛이 떨떠름해지자, 성녀도 찔리는 바가 없지는 않았던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지, 진짜 관심 없다니까요!”

정 그러기를 바란다면 따로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농을 던졌다.

“그래요? 저는 꽤 관심 있었는데, 왜냐하면…….”

쨍그랑, 하는 파열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내 말을 기다리고 있던 성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명백히 치료실 쪽이었다.

성녀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내 이야기를 마저 듣지 못한 탓인지, 혹은 환자가 걱정이 된 탓인지.

어느 쪽이든 성녀의 입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새어나왔다.

“말도 안 돼, 벌써 일어날 리가…….”

사건이 발생한 이후 빈번히 나오는 대사였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무의미한 말이기도 했고.

나는 손으로 성녀에게 남아있으란 신호를 보낸 후, 곧장 치료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깨진 꽃병을 든 채 나를 경계하는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과 팔 곳곳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꼴이 조금 안쓰럽긴 했다.

그러게 진작 말 좀 들을 것이지.

엘프 소녀를 나를 보자마자 더욱 겁을 먹었는지 히익,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 푸른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번져가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난동을 피운 까닭도 두려움 때문이겠지. 그러나 막 병상에서 몸을 일으킨 중상자가 취할 태도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를 타박하기 위해 곧장 목청을 돋우었다.

“야, 너 다친 직후에 그렇게 움직이면……!”

내 눈에 어떠한 장면이 포착되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말을 끝맺었을 텐데.

벌어졌던 내 입이 점차 다물어졌고, 그와 비례해 내 낯빛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으르렁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엘프 소녀.

그녀는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작을 내버려서, 피 묻은 뼛조각으로 화했을 생니들을 말이다.

치아는 일생에 단 두 번밖에 나지 않는다.

신성력의 기적을 빌리면 몇 번이고 더 재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치이가 자라고 다시 나는 과정을 수반한다. 아무리 빨라도 몇 시간만에 치아가 다시 날 수는 없었다.

엘프는 인간과 신체 구조가 다른 걸까?

하지만 이종족에 대한 지식을 접할 때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불어 이미 엘프를 한 번 본 적 있는 성녀도 말하지 않았던가.

벌써 일어날 리가 없다고.

그렇다면 무게추는 저 엘프 소녀가 이상하다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엘프 소녀는 더욱 겁에 질리고 말았다.

두 손으로 깨진 꽃병을 내게로 향하다가, 이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고도 발을 죽죽 밀어 엉덩이를 뒤로 끌고 있었다.

그래봐야 도망 갈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엘프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외쳤다.

“오, 오지 마! 이 괴물아… 너희, 너희가 우리들을 망쳤어!”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허, 하고 헛웃음을 머금으며 나는 엘프에게 응수했다.

“망치다니, 괴물은 오히려 네 쪽이잖아… 그 재생 능력은 뭐야?”

“입 닥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외친 한 마디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서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그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서 절절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 너희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역시, 인간 따위는 믿으면 안 됐는데…….”

그러면서 엘프 소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난감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일부러 엘프에게 승복을 받아낸 까닭은, 그러지 않고서는 대화가 불가능해 보였던 탓이었다.

일단 적대만 하고 보니 다짜고짜 기절시켜 봐야 결과는 뻔하리란 예측이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고작 한 번 승복을 받아낸 정도로는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다.

“흐윽, 흑… 나, 나는 절대 너희한테 넘어가지 않을…….”

“아, 그래.”

탁, 하고 땅을 박차자마자 내 몸뚱아리는 어느덧 소녀의 앞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엘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깨진 꽃병을 내질렀다.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덕인지 그 자세가 꽤 올발랐다. 실린 힘도 제법이라서, 만일 일반인이라면 중상을 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 일반인이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꽃병을 차올렸다.

와장창 깨져나간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틈새에 나는 차올린 발을 곧장 소녀의 가슴팍으로 내리꽂았다. 엘프는 팔을 교차시키며 저항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콱, 하고 명치를 짓밟힌 엘프 소녀가 제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끄으, 으으… 아아아아악!”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야, 너 이빨 다시 나냐?”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엘프 소녀.

아직도 그 기세가 덜 꺾였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이곳이 적진 한복판이며, 내가 엘프와 오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국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한 태도였다.

나는 엘프 소녀에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다행이라고.”

그 직후.

빡, 하고 내 발이 엘프 소녀의 관자놀이를 후려찼다.

엘프 소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그 충격 반경에 있는 생니가 두어 개 뽑혀 나왔을 정도였다.

사건이 끝나자 성녀가 조심스레 내 뒤로 다가왔다.

잔혹한 손속에 화를 낼 줄 알았으나, 성녀는 그보다 엘프 소녀의 몸 상태에 더욱 관심이 많은 듯했다.

“……재생 능력이 지나치게 활성화돼 있어요. 이건 신성력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마법이나, 연금술… 아마도 그쪽이 아닐까 싶은데요.”

새로운 증언이었다.

나는 흐음, 하고 턱을 쓰다듬다가, 기절한 엘프 소녀를 다치 들쳐멨다.

그리고 엘프를 담아왔던 자루에 다시 한 번 수납.

자루를 어깨에 메자마자 성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뒤쫓아왔다.

“이, 이안! 어디 가려고요!”

“어차피 재생 능력 때문에 가만히 놔둬도 치료되는 녀석 아닙니까? 일격으로 끝냈으니, 치료는 더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작별의 인사였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북부 관련으로 상담 드릴 일이 있어서…….”

마침 성녀의 ‘연애편지’를 향한 집착에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이렇게 멋진 핑계가 준비됐는데, 떠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성녀가 얼이 빠져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태양의 쉼터를 빠져나왔다.

내 등 뒤로 성녀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이안! 그런데 지난번 그 고백 이야기는……!”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그거 별 거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내 친구 유렌을 향한 최저한의 의리였다.

정작 시체 거인 때는 나를 두고 도망치자고 했다던데.

하여간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피 묻은 자루를 들쳐멘 내 몸이 바람처럼 쏘아졌다.

행인들은 그 기괴한 모습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엠마의 공방에 도착하자마자 자루를 내던졌다.

내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엠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데없는 나타나서, 영문 모를 자루를 던져놓은 상황이었다. 당황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어 봐, 그… 선물이야.”

아니, ‘선물’이라니.

말이 조금 이상해졌는데.

그러나 내가 내뱉은 말을 주워담기도 전에, 엠마는 주춤주춤 몸을 움직여 자루를 열어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을 담은 엠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이 마치 나를 책망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거 아비앙 씨야! 너한테 사기쳤다는 그 사람!”

엠마는 내 말을 듣고 자루 속의 엘프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엠마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안… 아비앙 씨를 왜 가녀린 소녀로 만든 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생략된 뒷말이 들려오는 듯해서, 나는 억울한 마음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안했다고!”

아무래도 엠마는 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내가 한 짓이라곤, 코뼈를 주저앉히고 치아가 날아갈 때까지 주먹질을 한 뒤 자루에 담아 이동한 것밖에 없는데.

적에게 한 처사치고는 무척 자비로운 편이었다.

아마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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